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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90/216)

90화

“어, 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코이는 자신이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왜 불렀었지?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당황해 눈만 깜박거리자 애슐리가 바지만 입은 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제야 코이의 시야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은 안색은 파리하고 눈 밑이 검었다.

아.

그제야 코이는 자신이 왜 그를 불렀었는지 기억을 되살렸다.

“저기…… 몸이 안 좋아 보여서…….”

망설이던 그는 어렵게 말을 보탰다.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입 밖으로 내놓고 나니 그것은 코이에게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애슐리의 안색이 나빠진 것도 몸이 안 좋아 보이는 것도 전부 그의 잘못이었다. 그가 애슐리를 거절해서.

애쉬가 날 싫어하게 됐으면 어쩌지.

원하는 대로 해 줬어야 했는데.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그게 뭐라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잠깐만 참으면 됐는데, 애쉬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실컷 좋아한다 어쩐다 떠들어 놓고 정작 애쉬가 날 필요로 할 땐 거절하다니. 고작 좀 만지는 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뭐든 다 괜찮다고 했어야 했는데.

후회와 자책을 거듭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다. 벌써 분위기는 깨져 버렸고, 남은 건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괜히 코끝이 찡해져 급히 훌쩍거리며 숨을 가다듬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코이, 또 우는 거야?”

“아, 아냐.”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애슐리는 믿지 않고 두 손으로 코이의 뺨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얼떨결에 시키는 대로 시선을 올린 코이를 애슐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코이, 설마 후회한다거나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애슐리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일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고. 솔직히 말해 줘, 우린 사귀는 사이니까 서로 숨기거나 거짓말하면 안 돼.”

‘사귀는 사이.’

그 말에 코이의 불안은 사라지고 대신 신뢰가 생겼다. 애쉬의 말이 맞아.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화가 난 거라고 생각했어.”

“화나지 않았어, 전혀.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애슐리가 너무나 선뜻 대답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코이는 안도했지만 반면 그래서 또 죄책감이 들었다. 애쉬는 그런 짐승이 아닌데, 왜 난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을까.

미안, 하고 사과한 뒤 코이는 덧붙였다.

“표정이 별로 안 좋고 힘들어 보여서…… 저기, 그런 상태에서 그만두면 얼마나 괴로운지 나도 아니까…….”

말하다 보니 자신이 또 그에게 잔인한 짓을 했다는 자각에 저절로 침울해졌다.

“내가 조금만 용기를 냈으면 됐는데, 미안해.”

“코이.”

애슐리가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망설이다 고개를 들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코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마. 분위기가 그랬고 내가 원했다고 해도 네가 바라지 않으면 하지 않는 거야.”

뜻밖의 말에 코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애슐리가 먼저 말을 이었다.

“만약에 그때 넌 원하지 않는데 나 때문에 마지못해서,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렇게 했다면 그건 날 강간범으로 만드는 거야. 넌 내가 강간범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아, 아냐, 절대로 아냐!”

“그래.”

강력한 부정에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후회하지 마, 그때 네 마음에 솔직해지면 돼. 네가 원하지도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내 기분에 맞추려고 억지로 그렇게 하면 나도 상처받아.”

그의 말은 너무나 강하게 코이의 마음에 와닿았다. 코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에 흘러나온 음성은 한결 가벼웠다.

“그렇게 할게.”

코이의 대답을 들은 애슐리는 그럼 됐다는 듯이 미소를 짓더니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후 고개를 들었다.

“이건 싫지 않지?”

“응, 좋아.”

무심코 말해 버린 코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애슐리는 소리 내어 웃더니 다시 한번 키스하고 로커로 돌아갔다.

기분 나빠 하지 않았구나.

후, 안도하며 그가 셔츠를 꺼내 입는 것을 바라보던 코이는 뒤늦게 뭔가가 떠올랐다. 기분은 그렇다 치고 몸은……?

아까도 뭔가 걷는 게 좀 불편해 보였다. 코이는 다시금 걱정스러워 입을 열었다.

“저기, 애쉬.”

애슐리가 셔츠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그를 바라봤다. 코이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몸은, 괜찮아? 그러니까, 저기, 내 말은.”

지금 상황에서 오해가 생기기 않도록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샤워를 너무 오래했잖아, 감기 걸리면 어떡해.”

진심으로 걱정을 담아 말했으나 애슐리는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왠지 말을 고르는 것처럼 사이를 뒀던 그가 대답했다.

“……이제 감기는 걸리지 않을 거야. 아마도.”

코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애슐리는 더 설명하지 않고 가방을 들었다. 사실 이유는 하나였다. 하지만 설명하자면 너무나 길었다.

애슐리가 극알파로 발현했기 때문에.

극알파가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탁월한 면역성 때문이다. 그 면역성을 평균 수치의 몇 배로 치솟는 이유는 그들의 페로몬 때문이었는데, 일반적인 알파와 페로몬의 향기도 다르고 자체적으로 생성되는 양 또한 몇 배나 많았다.

양과 질이 월등히 차이 나는 바로 그 페로몬의 영향으로 극알파는 기본적으로 감기를 포함한 질병에 잘 걸리지 않고, 술이나 약에도 특히 강했다. 술에 취하는 일도, 약에 중독이 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별다른 문제 없이 명대로 산다면 평균 수명 또한 일반인들보다 길었다. 그 외에도 육체적, 정신적인 효과는 끝도 없었다. 극알파로 발현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축복이었다.

그 페로몬은 이렇게 극알파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지만 그만큼의 대가도 요구했다. 눈동자 색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주 작은 해프닝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큰 문제는 페로몬이 뇌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수시로 엄청난 양이 분비되는 페로몬은 축적될 경우 독으로 변했다. 그것을 학계에서는 간단하게 ‘뇌가 녹아버린다.’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드러나는 현상은 여러 가지였다. 흔하게는 기억력 장애가 오고 심할 경우에는 미치거나 치매가 생기기도 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주기적으로 페로몬을 빼야 했다.

언젠가 애슐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앞으로 긴 세월을 그는 평생 자신의 안을 갉아먹는 페로몬과 싸우며 살아야 한다. 언제든 그를 집어삼키려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검은 덩어리를 필사적으로 외면한 채.

“나가자, 이제.”

먼저 말을 꺼낸 애슐리는 평의자 위에 놓여 있던 코이의 가방을 들더니 선뜻 어깨에 걸쳤다.

“어.”

코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저기, 내 가방은 내가 들게.”

양쪽 어깨에 각각 자신의 가방과 코이의 가방을 메고 있는 그의 모습에 코이는 너무나 미안해졌다.

“피곤하잖아, 많이.”

코이는 애슐리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말했다. 아까보다는 좀 나아진 것 같았지만 샤워실에서 갓 나왔을 때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또다시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애슐리는 너무 오랫동안 거기에 있었다. 수시로 감기에 걸리는 그를 생각하자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애슐리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난 괜찮아, 코이. 정말이야.”

진심이었다. 그의 상태가 안 좋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씨발, 아래가 아파.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위를 이렇게 격렬하게, 오래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는 자위라는 행위를 자주 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고, 가끔 여의치 않을 때 손으로 빼긴 했어도 고작해야 한두 번 정도였다. 그야말로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문지르는 짓 따위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필수불가결한 행위였다. 코이가 입었던 치어리딩 유니폼이라니, 그것만큼 달아오르게 하는 재료는 그걸 입은 코이 말고는 없었다. 치어리딩 유니폼에 남은 그의 체취를 힘껏 들이켜며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유니폼에 문지르며 가 버렸다.

코이는 유니폼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지만 애슐리는 달랐다. 한쪽 어깨에 멘 자신의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그의 유니폼을 떠올리자 다시 아래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한 시간에 걸쳐 달래 주지 않았다면 그의 아나콘다는 지금 또 일어났을 것이다.

이토록 강렬한 욕망은 페로몬 때문일까.

웃기지 마, 넌 발현하기 전부터 코이를 감금하고 온갖 짓을 다 하고 싶어 했어.

맞아, 별 더러운 상상을 다 해 놓고서 무슨 페로몬 탓이야.

웬일로 내면의 자신이 한 목소리를 냈다. 애슐리는 마지못해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걸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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