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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216)

89화

처음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코이는 멍한 머릿속으로 뭔가 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기분만 겨우 느꼈을 뿐이었다.

“……응?”

뒤늦게 고개를 돌린 코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던 애슐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이 유난히 붉어 보였다.

나도 저렇게 달아올라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얼굴과 목이 화끈 달아올라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애슐리가 짧은 숨을 뱉어 내더니 입을 열었다.

“코이.”

“……응.”

뭔지도 모르고 코이는 대답했다. 머릿속은 완전히 비어 버리고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애슐리의 검은빛에 가깝게 어두워진 보라색 눈만이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애슐리의 커다란 손이 코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멍하니 애슐리가 시키는 대로 손을 내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이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넋을 잃고 애슐리의 얼굴만 바라볼 뿐.

……어?

묘한 위화감에 정신 일부가 깨어났다. 코이는 눈을 깜박이며 애슐리를 올려다보다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막 자신의 손에 닿으려는 거대한 아나콘다를.

“……!”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예 소리가 안 나온다는 걸 코이는 처음 실감했다. 온몸이 굳어지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어깨만 들썩이며 자신을 향해 빳빳하게 일어서 있는 미지의 생물을 그저 보기만 했다. 애슐리 또한 그의 반응을 눈치챘다.

“코이.”

애슐리의 음성에 간절함이 섞여들었다. 이토록 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넣지 않을게, 그가 속삭였다.

“한 번만 만져 줘.”

애슐리가 다시 코이의 손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하지만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힘을 줘 버티고 말았다. 저건 그냥 뱀이 아니었다. 저렇게 온몸을 쳐들고 분노에 차 머리를 껄떡거리는 생물체를 어떻게 단순히 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맞아, 저건 그냥 몸의 일부일 수가 없어.

코이는 마른침을 삼키고 생각했다.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 아냐, 살아 있어. 분명해. 바짝 얼어붙은 모습에 애슐리는 더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코이…….”

“미, 미안!”

위기감에 내몰려 말문이 터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굳어 있던 입이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모모 못 해, 못 해, 도저히, 도저히……!”

고개까지 가로저으며 맹렬히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 애슐리는 움직임을 멈췄다. 기겁을 하는 코이를 보자 이성의 일부가 간신히 되돌아왔다.

“코이.”

“미, 미안해, 미안해.”

“코이.”

“하, 하지만, 하지만 이건, 이건 너무, 너무!”

“코이.”

결국 애슐리가 손을 놓고 대신 코이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뒤늦게 정신이 든 코이가 고개를 들자 애슐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간신히 진정을 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알았어, 코이. 안 해도 돼. 그만할게.”

“어…….”

코이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물론 애슐리가 강제로 코이를 어떻게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둬도 될까?’라는 의문이 곧바로 떠올랐다.

패닉에 빠졌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다른 걸 깨달았다. 저 정도로 발기하면 굉장히 괴로울 것이다. 코이는 저렇게까지 흥분한 적은 없었고, 그랬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니 저 정도로 커질 리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그도 남자였다. 애슐리가 지금 얼마나 힘들지 코이도 알 수 있었다.

꿀꺽, 저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러면 나도 노력은 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남자 친구잖아. 저렇게 힘들어하면 조금 도와줄 수도 있잖아. 기껏해야 손일 뿐인데.

손만 대면 되니까 눈은 감고 있으면…….

거기까지 떠올렸던 코이는 곧 부정했다. 아냐, 그러면 애쉬가 상처받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의 몸인데 보는 것도 무서워하면 나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테니까.

애쉬가 날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코이.”

순간적으로 불안해졌을 때,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코이에게 애슐리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코이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든 안심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더욱 당황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됐으니까 먼저 나가 있을래? 난 좀 이따 나갈게.”

“어…….”

코이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뒤늦게 애슐리의 생각을 눈치챘다. 그러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그를 찾아왔다.

“미, 미안해, 내가…… 내, 내가 해…… 해 볼게…….”

뒷말은 정말로 성대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스스로 듣기에도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코이는 패닉에 빠져 버렸다. 애슐리는 분명히 눈치챘을 것이다. 코이처럼 둔한 녀석이 절대 아니니까.

어떡해!

그만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을 때, 애슐리가 말했다.

“괜찮아, 코이.”

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좀 나가 있어 줘.”

“애쉬…….”

“코이.”

다시금 말을 해 보려던 코이를 애슐리가 가로막았다.

“내가 후회할 짓을 하기 전에 나가 달라고, 제발.”

애슐리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걸 코이 또한 알 수 있었다. ‘제발’이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더 미적거릴 수도 없어서, 코이는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주춤거리며 애슐리의 옆을 스쳐 나가려던 코이가 발을 멈췄다.

“애쉬.”

뒤를 돌아봤지만 애슐리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코이는 애슐리의 등을 보며 물었다.

“내가 도와줄 일이 정말, 없을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코이는 용기를 내어 한 번 더 그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애슐리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잠시 반응이 없던 그가 하, 짧은 한숨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젖혔다. 여전히 코이를 보지 않은 채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네 치어리딩 유니폼이라도 줘.”

“어? 유니폼?”

코이는 의아해졌으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도 서둘러 샤워실 밖으로 달려갔다. 유니폼은 그가 옷을 벗어 둔 자리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코이는 낚아채듯 그것을 잡아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애슐리는 수전을 잠근 채 벽에 한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코이는 황급히 그에게 옷을 내밀고 말했다.

“여, 여기.”

애슐리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손만 내밀었다. 그가 옷을 붙잡은 뒤에야 손을 놓은 코이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기, 더 필요한 건…….”

애슐리가 원하는 건 간단했다.

“나가서 기다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고 얼핏 쉬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너무나 안쓰러웠지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코이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닫히는 샤워실 문 너머로 언뜻 신음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확실치 않았다.

*

애슐리가 샤워실 안에서 나온 건 한 시간가량이 지나서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진작 옷을 갈아입고 평의자에 앉아 기다렸던 코이는 조바심이 나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다.

혹시 쓰러지거나 한 건 아니겠지?

결국 시계를 보면서 딱 5분만 더 기다려 보자고 결심했을 때, 애슐리는 밖으로 나왔다.

“애쉬…….”

코이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으나 뒤이어 발견한 애슐리의 안색에 순간 멈칫했다. 저런 낯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흘 내리 술을 마시고 병원에 실려 갔던 아버지의 얼굴이 저랬던 것 같기도 했다.

어떡해, 많이 피곤한가 봐.

코이는 사색이 되어 급하게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의 경우엔 911에 신고를 해야겠지? 형질이 알려지면 곤란해지지 않을까? 그럼 어떡하지? 맞아, 감독님이랑 코치님은 알고 있다고 했지? 그쪽에 먼저 연락을 해 보고……. 잠깐, 연락처를 모르잖아. 경비 아저씨가 알고 계실까? 빌은 알고 있을 텐데. 그렇지, 애쉬의 휴대 전화를 찾아보면 긴급 연락처가…….

머릿속으로 온갖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는데, 애슐리는 샤워실 앞에 쌓여 있는 수건을 집어 들고 곧바로 자신의 로커로 향했다. 코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를 돌아보았다.

“애쉬.”

‘괜찮아?’ 하고 물으려던 찰나 그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미술책에서 조각상 사진을 보았을 때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실물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2미터에 달하는 애슐리의 몸은 ‘운동으로 다져진 육체’ 라는 말 그대로였다. 저렇게 몸이 큰데도 지방은 거의 없어 보였다. 코이는 어째서 애슐리가 저런 커다란 몸을 가지고도 그렇게 날렵하게 움직이는지 납득이 갔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생각해 보니 코이는 여태껏 찬찬히 그의 몸을 볼 기회가 없었었다. 방금 전 샤워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보지 못했다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만약에 사람의 근육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다면 애슐리를 세워 두고 하나씩 이름을 외워도 될 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몸은 눈부실 정도로 훌륭했고 큰 근육 사이사이 작은 근육이 정교하게 맞물려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수건으로 몸을 닦을 때마다 미세한 근육들이 도드라지며 물결치듯 일렁거렸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애슐리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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