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응, 으응, 응.”
꼭 다문 입에서 조금씩 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슐리는 한 팔로 코이의 허리를 안은 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라와 있는 주먹 쥔 두 손 중 하나를 잡아 자신의 목뒤로 끌어당겼다. 엉거주춤 끌려온 팔로 목을 두르게 하고 다른 손도 끌어당기자 코이가 이번엔 스스로 움직여 애슐리의 목을 감았다. 애슐리는 입술을 맞댄 채 웃음을 지었다.
역시 코이는 배우는 게 빨라.
애슐리는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는 입을 벌릴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핥고 살며시 깨물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으나 마치 공략하기 어려운 성채처럼 입술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아직은 무서운 걸까.
애슐리는 자신의 첫 키스가 어땠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입술을 열 수 있지. 고민하면서 다시 입술을 맞대려는데, 코이가 갑자기 머리를 뒤로 뺐다.
“저기.”
입술을 놓쳐 버린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코이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 우리 너무 오래…… 이러고 있는 거, 같아서. 어서 씻고,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곧 있으면 여기도 문 닫으러 오실 거 같은데…….”
로커룸의 문은 들어오면서 잠갔지만 경비에게 들키면 이 달콤한 분위기는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코이의 말이 맞았으나 애슐리는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자신의 머릿속은 코이와의 키스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코이는 별걸 다 떠올린 모양이었다. 문 쪽을 흘긋거리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왠지 얄미워 애슐리는 허리를 안고 있던 두 팔을 풀고 대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으, 으아아악!”
치마를 들쳐 속바지만 입고 있는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각자 움켜쥐자, 코이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반응에 애슐리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코이는 반사적으로 목을 감고 있던 팔을 풀고 대신 자신의 엉덩이로 두 손을 가져갔으나 이미 그 거기엔 애슐리의 커다란 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코이는 사색이 되어 그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애슐리는 놀리듯이 그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엉덩이도 작구나, 코이.”
하지만 감촉은 상당히 좋았다. 자신의 커다란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라거나, 말랑거리는 살성 덕분에 키스 못지않게 달콤했다. 무엇보다 이건 입술처럼 속을 썩이지 않았다. 실컷 주물거리는 애슐리의 손에 그만 코이는 패닉에 빠져 버렸다. 급기야 그는 애슐리의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치, 치한이야! 이런 건 치한이 하는 거야!”
“난 네 남자 친군데?”
애슐리가 벌이라도 주듯 잡고 있던 엉덩이를 꽉 쥐었다. 코이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 목소리가 마치 교성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코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런 건 남자 친구는 하면 안 돼.”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내려다봤다.
“왜 안 돼?”
이번엔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이었다. 어째서 남자 친군데 상대의 몸을 만지지 못한다는 건가. 이건 심각한 상황이었다. 코이도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잠시 대꾸를 하지 못한 채 더듬거렸다.
“그, 그건, 그건…….”
애슐리는 미간을 모은 채 엄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코이는 점점 더 구석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저기, 저기, 하고 몇 번을 중얼거렸던 코이가 마침내 대답했다.
“샤, 샤워해야 하니까, 남자 친구는, 방해하면 안 돼.”
“아…….”
애슐리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말이 통한 걸까? 코이가 반색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자 애슐리가 싱긋 웃었다. 그제야 긴장을 풀고 마주 웃은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그럼 같이 씻자.”
“어?”
코이는 어리둥절해져 눈을 깜박였다. 그러려고 온 거 아닌가?
“남자 친구니까, 그렇지?”
애슐리가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물었다. 아까는 속았지만 이번엔 틀림없다. 같이 샤워실에 들어가자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한 코이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그래.”
여전히 애슐리의 손을 잡은 채로 그는 대답했다.
“같이 씻어.”
“그래.”
애슐리 또한 대답하더니 고개를 숙여 코이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코이도 입술을 내밀어 타이밍 좋게 반응했다. 다시 고개를 든 애슐리가 미소를 짓고, 코이도 마주 웃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애슐리가 그의 엉덩이를 꽉 쥐고, 코이는 다시금 자지러져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애쉬!”
코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바짝 털을 곤두세우자 그제야 애슐리는 손을 뗐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엉덩이를 쓰다듬고 물러나는 못된 손에 코이는 다급하게 빈 엉덩이를 붙잡아 사수했다. 잠깐 방심했다가 몇 번을 당했는지 모른다. 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경계하는 코이를 내려다보며 애슐리는 생각했다.
앞이 비었어, 코이.
귀여운 가슴이나 그 아래도 얼마든지 노릴 수 있었지만 그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코이는 지금까지 배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져 나갈 게 분명했다. 대신 애슐리는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제 장난 안 칠게, 코이. 정말 씻으러 가자.”
미소를 지으며 내민 손을 코이는 흘긋거리기만 할 뿐 잡으려 하지 않았다.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남자 친구를 못 믿어?”
‘남자 친구’는 얼마나 마법의 단어인가. 애슐리가 서운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 단어를 입에 올리자 코이에게서 이내 경계심이 사그라들었다.
“믿어…….”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인 코이가 아직 자신에게 내밀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때까지 엉덩이를 지키고 있던 두 손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오더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애슐리는 참지 못하고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코이를 품에 안았다.
“귀여워, 코이.”
“어, 응.”
뭔지도 모르고 코이는 대답했다. 애슐리는 진심으로 그를 먹어 버리고 싶어졌다. 머릿속이 저릿저릿 울려 오는 것을 참고 대신 그는 코이의 어깨를 안은 채 샤워실로 향했다.
“아.”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코이가 갑자기 멈칫했다. 애슐리가 그를 내려다보자 코이는 당황해 얼굴을 들고 말했다.
“내 가방, 옷이랑 다 들어 있는데…… 치어리딩 팀 탈의실에 있어.”
“그래?”
애슐리는 선뜻 문제를 해결했다.
“내가 다녀올게, 문 앞에 있어?”
“어? 어…… 응, 아마도?”
아이들이 치우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흐리멍덩하게 대답에 애슐리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먼저 씻고 있어, 저기 샴푸랑 비누.”
샤워실 문을 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 애슐리가 곧 코이를 놓고 로커룸에서 나갔다.
혼자 남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코이는 왠지 무서워져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잘됐어.
코이는 생각하며 조심스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애슐리가 보는 앞에서 옷을 벗는다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애쉬가 날 배려해 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 애슐리의 마음 씀이 고마워졌다.
그만큼 경험이 많은 걸 수도…….
막 속바지를 벗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애슐리는 여자 친구를 몇 명이나 사귀었을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없었던 날을 꼽는 게 더 빠를 것이다. 키스도 아주 능숙한 것 같았고, 매사에 허둥거리는 코이와는 달리 애슐리는 너무나 여유로웠다.
그렇다는 건…….
거기까지 떠올렸던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의 과거에 연연하는 건 남자답지 못해.
코이는 제법 대범하게 그것을 무시하고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중요한 건 지금이고, 지금은 코이가 그의 남자 친구니까.
남자 친구.
정말 신기한 단어였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녹아내린다. 애쉬도 그럴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코이는 벗은 옷을 평의자 위에 잘 개어 둔 뒤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실 안은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각각의 공간이 상당히 컸다.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의 덩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코이는 자신이 살고 있는 모터홈의 샤워 시설보다 몇 배는 크고 좋은 내부에 감탄했다.
하긴 아이스하키 팀은 학교의 상징 그 자체니까.
당연히 여러 가지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로커룸의 시설도 상당히 좋았다. 생전 안을 구경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들어와 샤워까지 하다니, 정말 기분이 좋은 쪽으로 이상했다.
코이는 조심조심 발끝을 들고 샤워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그중 하나를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을 나누는 것은 양옆에 쳐진 칸막이 뿐이었다. 코이는 겨우 얼굴의 절반이 나올 뿐이지만 대부분 190센티미터가 넘는 아이스하키팀 녀석들에겐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을 것이다.
뭐든 다 높고 거대해 마치 거인국에 온 소인 같은 기분을 느끼며 코이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먼저 찬물이 나와 급히 몸을 피하고 온수를 틀려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코이, 다녀왔어.”
“아, 응.”
일부러 큰 소리로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린 애슐리는 곧 조용해졌다. 아마 옷을 벗고 들어올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코이는 벽에 달라붙어 열심히 온수를 틀려고 했지만 수도꼭지가 돌아가지 않았다.
고장인가?
다른 칸으로 옮겨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데 샤워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애슐리가 들어온 것이다. 코이는 당황해 일단 몸을 움츠렸다. 도저히 그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닐 용기는 나지 않았다.
애쉬가 다른 칸에 들어가고 나면 이동하자.
그렇게 결심했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