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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216)

83화

“애, 앨!”

코이는 뒤늦게 소리쳐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만큼 걸어갔던 에리얼이 뒤를 돌아보자 코이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기, 하나 더…… 물어봐도 돼?”

에리얼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코이는 주저하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옷을 사 주는 건…… 친구가 창피해서 그런 거지?”

에리얼이 얼굴을 찡그렸다.

“창피하면 같이 안 다니지, 옷을 왜 사 줘?”

망설임 없이 나온 물음에 코이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친구니까……?”

흐응, 하고 고개를 갸웃했던 에리얼이 말했다.

“뭐, 티셔츠 하나 정도는 사 줄 수도 있겠지?”

코이는 시선을 떨구고 중얼거렸다.

“좀…… 많이 사 줬는데…….”

“얼마나?”

에리얼이 묻자 코이는 기억을 더듬어 하나씩 나열하기 시작했다.

“저기, 와이셔츠랑, 티셔츠랑, 바지도 사 주고…… 아, 시계도.”

잠자코 듣고 있던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친구로서 한 행동이 아니라 플러팅이잖아.”

코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동성인데 어떻게…….”

“코이, 애쉬가 부자에 매너도 좋은 애지만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돈을 펑펑 쓰진 않아.”

다짜고짜 튀어나온 이름에 코이가 히익, 숨을 삼켰다. 어떻게 알았지? 당황해 눈을 데굴거리는 그를 보며 에리얼은 엄하게 말을 이었다.

“저번에 그린 벨에서 고릴라들한테 한 턱 쐈다고 네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냐. 고릴라들도 언제나 자기들이 먹는 만큼 각자 알아서 낸다고. 그건 정말 특별한 이벤트였던 거야. 하긴 그날은 애쉬가 산다니까 정말 많이 먹긴 하더라.”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던 그녀가 곧 덧붙였다.

“물론 난 애쉬와 사귈 때 한 푼도 내지 않았어. 당연히 그 애가 다 냈지.”

당연히 그렇겠지. 누구든 그러지 않을까? 앨과 함께라면.

주저 없이 수긍하는 코이의 반응에 에리얼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코이가 또 엉뚱한 소리를 해서 속을 긁기 전에 먼저 에리얼이 말했다.

“그건 데이트 비용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아낌없이 쓴 거고.”

코이는 또다시 멍해졌다. 에리얼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그를 다그쳤다.

“코이, 어떻게든 애쉬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이득이 뭐야?”

코이는 말문이 막혀 입을 열 수 없었다. 에리얼이 계속해서 말했다.

“애쉬는 좋은 애야. 자기 비하에 빠져서 널 좋아한다는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고.”

그녀의 말이 너무나 옳았기 때문에 코이로서는 그저 묵묵히 듣는 것 말고는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떨구고 말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에리얼이 최후통첩을 했다.

“자꾸 그러면 네 할라피뇨를 터뜨려서 정말 내 자매로 만들어 주겠어.”

“히익.”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처럼 숨을 삼킨 코이가 얼떨결에 고개를 들자 이미 에리얼은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

느린 걸음으로 링크로 돌아갔을 때, 그토록 시끄러웠던 경기장은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사람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더그아웃으로 들어선 코이는 저 멀리서 천천히 빙판 위를 지치고 있는 애슐리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코이는 펜스를 붙잡고 서서 한동안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는 자신에게 고백을 하던 애슐리와 단호하게 충고하던 에리얼의 얼굴이 번갈아 스쳐 갔다.

대체 애쉬는 왜 날 좋아한다고 하는 걸까.

에리얼의 말이 맞다. 진실을 아는 건 애슐리뿐이다. 코이가 할 일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둔하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턴을 했던 애슐리가 고개를 들었다가 코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자 저절로 뺨이 화끈거리고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코이는 잠자코 그 자리에 선 채 애슐리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혹시 도망가 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었어.”

펜스를 사이에 두고 선 애슐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뻔했어.”

코이 역시 어렵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에리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대로 달아나서는 안 된다고 호통을 치고 결판을 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코이는 언제고 이 상황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우, 심호흡을 했던 코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스하키 팀 애들은 안보이네.”

“먼저 가라고 했어. 난 너를 기다린 거고.”

코이는 내심 그들이 어떤 반응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애슐리가 곧 말을 이었다.

“녀석들은 그게 무슨 쇼인 줄 알더라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건지 그냥 상황을 넘기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하고 보내 버렸어.”

“그랬, 구나.”

중간에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급히 헛기침을 했다. 코이가 입을 다물자 주변은 또다시 고요해졌다. 넓은 경기장 안은 너무나 공허해서 그들의 음성이 저 멀리까지 당혹스러울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코이는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며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애슐리와 시선이 마주쳤고, 또 한 번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애슐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여태껏 그랬듯이, 코이의 대답을.

코이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소리보다 먼저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슴이 답답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입을 열었다.

“……앨이, 너와는 완전히 끝났다고 했어.”

“맞아.”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그들은 모두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마음을 정리한 지 오래였다. 코이를 비롯한 주변인들만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리얼이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에 코이는 저절로 고개가 떨구어졌다.

“……미안, 난 네가…… 앨하고 다시 사귈 줄 알았어.”

어렵게 사과했지만 잠시 동안 애슐리는 반응이 없었다.

“……왜 그런 생각을?”

사이를 두고 흘러나온 말은 정말 어이가 없어 하는 것처럼 들렸다. 코이는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자신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대답했다.

“경기에서 이기면, 앨한테 다시 고백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

그제야 납득한 것 같던 애슐리가 뒤이어 빠른 어조로 덧붙였다.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나한테 이기라고 행운의 지폐를 줬단 말이야?”

어지간히 황당했던지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코이는 급히 사과했다.

“미안해.”

그는 애슐리의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네가 그걸 바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착각이었지, 어마어마한.”

애슐리가 지적했다.

“그래.”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고 코이는 에리얼에게 했듯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애슐리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두 팔을 넓게 벌려 펜스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펜스를 사이에 두고 자신의 팔 안에 갇히다시피 한 코이를 내려다보며 애슐리가 말했다.

“몇 번이고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했고, 이번 시합에서 이기면 결론을 내자고까지 했는데 그걸 앨이라고 착각하다니 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코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비꼬는 것도 아닌, 정말로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코이는 우물쭈물하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게시판에 올렸던 거, 나 맞아.”

“그래.”

‘알고 있어.’ 대신에 애슐리는 그렇게 말했다. 코이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너랑 나는 친구잖아……. 그런데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이상해. 게시판에도 올렸는데, 그냥 묻혀 버렸어.”

당연하지. 내가 묻어 버렸으니까.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코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어서 표정을 알기도 힘들었다. 애슐리는 자신 안의 인내심을 모두 끌어모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코이가 마침내 입을 열 때까지.

“넌 왜 날 좋아해?”

힘없이 흔들리는 음성에 애슐리는 즉시 대답했다.

“넌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니까.”

코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그는 웃으며 가볍게 농담처럼 덧붙였다.

“네 눈엔 내가 아주 대단해 보이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봐. 그런 내가 좋아하는 넌 얼마나 더 대단한 건지.”

코이는 한동안 애슐리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애슐리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아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인내심을 끌어와야 했다. 간신히 코이가 입을 열었다. 언뜻언뜻 그 안의 빨간 속살이 엿보였다.

“그런 감정을 가지면, 안 되는 건데.”

한참 만에 나온 음성은 잔뜩 메어 있었다. 잠깐 시선을 빼앗겼던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안 돼?”

“왜냐면.”

코이가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후, 한숨을 사이에 두고 마침내 그가 고백했다.

“네가 날 동정해서 같이 다닌 거 알고 있는데, 이러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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