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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81/216)

81화

애슐리가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코이는 잠자코 그것을 내밀고 기다렸다. 애슐리는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손안에 들어온 것을 펴 보니 작게 접은 2달러짜리 지폐였다. 항상 코이가 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얼마나 오래된 건지 꼬깃꼬깃한 지폐는 닳은 흔적이 역력한 데다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애슐리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코이에게 돌려주었다.

“나도 2달러는 있어.”

코이가 몇 년이고 소중히 들고 다녔을 게 분명한 행운의 지폐를 고작 홈커밍 경기에 이기라고 넘겨주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이는 그것을 돌려받는 대신 두 손을 등 뒤로 감춰 버리고 말했다.

“이 2달러는 없을걸?”

그의 입가가 정말로 힘겹게 끌려 올라갔다. 애슐리는 코이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 노력이 그의 엉망이었던 기분을 조금은 나아지게 해, 애슐리 또한 피식 웃고 말았다. 마음이 가벼워진 코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애슐리가 다시 지폐를 내밀며 말했다.

“괜찮아, 이건 너한테 소중한 거잖아.”

코이는 그의 다정한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고 웃으며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밀어냈다.

“난 이미 소원을 이뤘어.”

“소원?”

응, 하고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널 만났잖아.”

애슐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코이는 웃음을 잃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너한테 주는 게 맞아, 내 소원을 이뤄 준 건 너니까.”

애슐리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이번에는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으나 코이로서는 이유를 알 리 없었고 아무래도 좋았다. 애슐리가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꼭 이겨서, 원하는 걸 이루길 바라.”

코이는 한껏 웃어 보였다. 애슐리는 묵묵히 그를 보기만 했다. 잠시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할 말은 넘쳐났지만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둘 다 다른 이유로 가슴이 벅차올라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먼저 코이가 입을 열었다.

“나 먼저 갈게.”

그리고 그는 돌아서서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곧 2 피리어드가 끝난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도 이제 끝이다.

역시나 더그아웃에는 에리얼을 포함해 모두가 모여 있었다. 먼저 그를 발견한 부부장이 말을 걸었다.

“어서 와, 코이. 딱 맞춰서 왔네? 찾으러 가야 하나 했더니.”

코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응, 하고 대답했다. 에리얼이 그를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코이 또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선지 가슴이 후련했다. 2 피리어드가 끝났음을 알리는 호른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들은 타이밍에 맞춰 빙상으로 나갔다.

*

“아, 애쉬.”

“애쉬, 좀 어때? 괜찮아?”

더그아웃에서 치어리딩 팀의 안무를 보고 있던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은 뒤늦게 나타난 애슐리를 보고 반갑게 말을 건넸다. 다른 때처럼 어수선한 녀석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애슐리는 조금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괜찮아, 미안해.”

“어, 다행이다.”

“그래, 그럼 됐어.”

“아직 3피리어드가 남았는데 뭐!”

팀 녀석들이 번갈아 말하며 애슐리의 등과 팔을 두드려 댔다. 애슐리는 그들과 하나씩 어깨를 안기도 하고 등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자리를 이동했다.

빙상 위에는 아직 치어리딩 팀의 응원 무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물론 애슐리는 단번에 코이를 찾아냈다. 하키스틱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꼭 이겨서, 원하는 걸 이루길 바라.〉

물론이지, 코이.

하마터면 시시한 질투에 눈이 멀어서 모든 걸 망칠 뻔했다. 정신 차려,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자신의 뺨을 세게 한 대 친 그는 장갑을 끼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

드디어 응원 무대가 끝난 뒤 코이는 아까처럼 서둘러 더그아웃으로 달려 들어왔다. 숨은 차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았다. 첫 무대와는 달리 어느 정도 침착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두 번째라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애슐리가 경기에서 이기기를 바랐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도 준 것이고, 전혀 후회하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애쉬도 앨도 모두 내 소중한 친구니까 괜찮아.

코이는 생각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애쉬는 제일 먼저 앨에게 달려오겠지.

예상대로 3피리어드가 시작되자 애슐리의 움직임은 바로 전 경기와는 딴판으로 변했다. 1피리어드 때보다 더 날렵하고 매서운 경기력에 사람들은 즉시 달아올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치어리딩 팀 또한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버팔로를 외쳐 댔다.

코이는 그들 틈에 섞여 가슴을 졸이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때마침 퍽을 사이에 두고 애슐리가 상대팀 수비 두 명에게 발이 묶여 버렸다.

빠져나와, 애쉬!

잔뜩 긴장해 마음속으로 외치는데, 그가 몸을 돌려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 녀석을 세게 밀쳤다. 잠깐 방심했던 녀석이 주춤하며 물러나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애쉬가 그대로 퍽을 날렸다.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빌이 그것을 받아 다시 패스하고,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네트가 크게 출렁이며 퍽이 골대 안에 꽂히고, 또다시 점수가 올라갔다. 연속으로 세 번이나 득점에 성공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아올랐다.

“이기겠는데? 우리가 이기겠어!”

치어리딩 팀의 여자애가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자 덩달아 다른 애들도 소리쳤다.

“당연히 이기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응원을 했는데!”

“맞아, 우리 팀은 무적이라고!”

“버팔로, 버팔로!”

“와아아아!”

에리얼까지 소리를 지르며 격하게 팔을 휘둘러 댔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2피리어드에서 상대팀이 꽤나 따라온 터라 점수는 아슬아슬했다. 물론 그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으아아!”

아까 애슐리와 주먹다짐을 했던 녀석이 고함을 지르며 퍽을 쫓아 달려갔다. 곧바로 애슐리가 따라붙고, 일대일의 상황이 됐다. 그는 일부러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애슐리를 향해 이죽거렸다.

“솜방망이 새끼. 그게 때린 거냐?”

아까에 비하면 장난 같지도 않은 도발이었다. 애슐리는 피식 웃었다.

“그 솜방망이에 맞고 코피 쏟은 건 누구더라.”

“네가 운이 좋았던 거지.”

“맞아, 운이 좋으니까 너 같은 약골하고 붙었던 거겠지?”

“뭐라고? 이 새…….”

막 욕설을 뱉으려던 녀석의 앞에서 재빨리 애슐리가 퍽을 가로챘다. 순간 당황한 그를 뒤로하고 애슐리가 달려가며 소리쳤다.

“거기다 멍청하기까지 하고!”

“야, 이 씨발 새끼야!”

약이 바짝 오른 녀석이 곧바로 뒤를 쫓아왔다. 앞에도 수비가 가로막았지만 애쉬는 재빨리 방향을 틀어 옆으로 빠졌다.

“빌!”

“받았어!”

즉시 날린 퍽을 받아 낸 빌이 이어서 달려갔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공격이다. 만약 이 골을 넣지 못한다면 연장전으로 넘어간다. 그럴 경우는 무조건 먼저 골을 넣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애슐리는 그런 위험 부담을 안는 게 불안해서 싫다기보다는 단지 시합이 길어진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무조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이잇……!”

다른 팀의 녀석이 그를 막으려 온몸을 날렸지만 미처 그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대로 펜스까지 밀려가 부딪치고 말았다.

눈앞에 골키퍼가 보였다. 지난 시즌에 최고의 골키퍼라는 극찬을 받았던 녀석이었다. 오늘 버팔로의 골을 꽤나 많이 막아 내기도 했다.

그는 전신을 긴장시키고 눈으로 퍽을 좇았다. 그가 지키는 골대는 한 치의 틈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빌 또한 기세에 눌렸는지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그때 다른 팀 녀석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퍽을 가로채려는 순간, 애슐리가 끼어들었다.

“어!”

“으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퍽이 바닥에 미끄러지고,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고정되었다. 뒤이어 골키퍼가 몸을 날려 퍽을 막아 냈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탄성이 여기저기서 쏟아진 순간, 곧바로 애슐리가 스틱을 휘둘렀다.

딱, 요란한 소리가 들린 듯했다. 골키퍼가 놀라 팔을 뻗었다. 검고 납작한 물체가 허공을 유영하는 모습이 유독 모두의 시야에 맺혀 들었다. 3초. 2초.

“우와아아아아!”

네트가 출렁인 다음 순간 호른이 울리고 경기가 끝났다. 관중들은 모두가 일어나고 ‘성조기여 영원하라(Stars and Stripes Forever)’가 흘러나왔다.

“이야아! 애쉬!”

“이겼다, 이겼어!”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얼싸안고 난리가 나는 모습을 치어리딩 팀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지켜보았다. 그들 속에서 코이는 에리얼의 뒷모습을 보았다가 다시 애슐리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안녕, 애쉬.

정말 좋아했어.

문득 코끝이 찡해져 작게 훌쩍거렸을 때였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을 때, 애슐리가 빙상을 가로질러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에리얼에게 고백을 하려는 거구나.

코이는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유난히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며 코이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곧 애슐리는 에리얼에게 고백하고 다시 사귀자고 청하겠지. 키스를 할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축하한다고 말해야지.

나름의 각오를 하고 그는 기다렸다. 애슐리는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몰려 있는 더그아웃을 무시하고 그대로 한 손을 펜스에 짚고 몸을 날려 뛰어넘어 버렸다.

어?

그가 달려오는 방향이 이상했다. 에리얼은 저쪽에 있는데?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순식간에 눈앞까지 달려온 애슐리가 갑자기 코이를 덥석 끌어안았다.

어? 어어?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 애슐리가 그를 안았던 팔을 풀더니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입술을 겹쳤다.

당황한 것은 코이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보고 있는데, 세게 입술을 눌렀다 뗀 애슐리가 코이를 내려다봤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는 말했다.

“좋아해, 코이. 나랑 사귀자.”

코이는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슐리에게는 다른 건 아무 상관 없었다. 코이의 대답만이 중요할 뿐.

더그아웃의 상황을 알 리 없는 관중석의 소음과 음악이 계속해서 주변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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