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경기가 시작됐지만 코이는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에리얼이 불쾌해하는 얼굴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부주장이 뒤를 쫓으면서 다른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 굳이 머릿수를 보태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코이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아이들과 함께 더그아웃에 남았다.
애슐리가 경기를 뛰는 장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자꾸만 신경은 에리얼과 부주장이 사라진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그것은 같은 치어리딩 팀의 여자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쉬, 정말 실망이야.”
소곤거리며 여자애들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게. 오늘 경기 끝나고 둘이 같이 홈커밍 파티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도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잖아.”
“질척거리는 거지, 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단호한 여자애들의 반응에 코이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애쉬는 오늘 앨한테 다시 사귀자고 말하려고 할 텐데…….
또다시 에리얼에게 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초조해졌다. 애쉬는 얼마나 실망할까.
나 때문에.
코이는 자괴감에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역시 이대로는 안 되겠다. 눈에 띄지 않게 어디 들어가 있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관중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골을 넣은 건가, 생각했지만 완전히 틀렸다.
“어머, 싸움 났어!”
치어리딩 팀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코이는 그만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애슐리가 상대 팀 선수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
경기가 시작됐지만 애슐리는 전혀 집중을 못했다. 방금 전 상황이 아직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눈앞에는 열심히 다리를 들고 안무를 추던 코이의 모습이 선한데 집중이 될 리가 없다. 스스로도 엄청난 추태를 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코이가 저 화사한 다리를 전교생 앞에 드러내 놓고 춤을 췄는데.
상당히 왜곡된 기억이었지만 그는 현실을 따질 여건이 되지 않았다. 분노로 눈에 보이는 게 없다는 말을 애슐리는 실감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몇 번의 작은 실수를 했고, 그것은 곧 어마어마한 실점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실책이 연속되자 점차 다른 녀석들도 눈치를 챘다. 퍽을 쫓아 달리면서도 불안한 시선을 교환하는 일이 잦아지고, 1피리어드 때와는 전혀 다른 애슐리의 움직임에 다른 녀석들 또한 동요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빌이 급히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애쉬?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음성이었지만 애슐리는 그의 쪽을 보지도 않고 내뱉었다.
“아무 일 없어, 경기나 해.”
빌은 더 말을 못 하고 뒤로 물러났다.
정신 차려,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지금은 경기 중이야.
스스로도 빌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 도무지 주체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퍽을 쫓아 스틱을 휘둘렀던 애슐리는 그러나 그만 빈틈을 내주고 말았다. 상대팀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질주해 그대로 골을 밀어 넣었다.
관중석에서 함성과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애슐리는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다음 공격을 위해 돌아서는데, 방금 전 골을 넣은 상대팀 녀석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는 히죽거리며 애슐리를 조롱했다.
“야, 패스 좋더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저 새끼가…….”
뒤따라 방향을 바꾸던 빌이 그 말을 듣고 화를 내려던 찰나, 갑자기 애슐리가 스틱을 내던지고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관중석에서 격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다렸다! 드디어!”
“싸워, 싸워! 더 패 버려!”
“버팔로, 버팔로 이겨라!”
“밀리지 마, 턱을 노리라고!”
미친 듯이 주먹을 날리며 난타가 오고가는 상황에 관중은 어느 때보다 흥분했다. 골이 그렇게 많이 오고 갔는데 이렇게 큰 함성이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아이스하키의 묘미이기도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코이는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어떡해! 정말 큰일 나겠어!
경기를 하면서 주먹질이 오가는 건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애슐리나 빌, 그 외 다른 녀석들 또한 수시로 다른 팀 녀석들과 몸을 날리며 싸움을 해 댔다.
하지만 지금 코이에게 중요한 건 오직 애슐리뿐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주먹다짐을 아무리 해 봤자 좀 놀라긴 해도 이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 녀석이 애슐리를 공격할 때마다 그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당장 뛰어나가 돕고 싶었지만 자신이 짐이 될 뿐이라는 걸 코이는 너무 잘 알았다. 따라서 그저 더그아웃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물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코이뿐이었다. 심드렁해하며 애슐리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늘어놓던 치어리딩 팀 아이들도 이 순간에는 팔을 휘두르며 격하게 싸움을 응원하고 있었다.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는데, 상대방 녀석이 팔을 뻗었다.
애쉬가 얻어맞겠어!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 환호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뭔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에 살그머니 눈을 떠 보니 상대방 녀석이 코를 움켜쥐고 웅크려 있었다.
“멋진 한 방이었어!”
치어리딩 팀의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그제야 코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상대방 녀석이 코피를 쏟고 난 다음에야 심판은 그들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애슐리는 패널티로 5분간 시합에서 뛸 수 없게 되었다.
“2피리어드의 남은 시간이 5분이라고.”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어쩔 수 없다. 애슐리는 바닥에 내던졌던 스틱과 장갑을 주워 들고 느릿느릿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팀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애슐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치어리딩 팀 아이들은 물론이고 모두가 그의 눈치를 살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내버려 두고 애슐리는 곧바로 더그아웃을 빠져나가 버렸다.
코이는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서 망설였다. 어떻게 하지? 따라가야 할까?
이대로라면 경기에서 분명히 질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그래도 애쉬는 앨에게 고백할까?
코이는 답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어두운 유혹이 스멀스멀 머리를 들고 있었다.
만약에 경기에서 진다면.
애쉬는 앨하고 다시 사귀지 못할지도 몰라…….
심장이 무섭도록 뛰어 댔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괴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애슐리와 에리얼이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실제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너무나도 무서워졌다.
애쉬가 앨하고 사귀지 않게 되면…….
조심스러운 악의가 마음속에서 솟아 나왔다. 입 안이 바짝 말라 더욱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는 참지 못하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사이좋게 웃고 떠들던 둘의 모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만약에, 그게 불가능하게 된다면.
애쉬는 크게 실망하겠지.
코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들의 환성이 마치 환청처럼 느껴졌다. 그는 물속을 걷는 것처럼 무거운 다리를 느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애슐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던 모든 것이 지워져 갔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둔하게 울려 퍼졌다.
애슐리는 복도의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관중의 환호성은 물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코이는 느린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분명 발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애슐리는 상체를 구부려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코이는 그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섰다. 입을 열었지만 소리를 내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애쉬.”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애슐리의 어깨가 움칠하는가 싶더니 잠시 뒤 천천히 그가 얼굴을 들었다.
애슐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참담해 보였다. 지금 그가 얼마나 좌절하고 있을지를 생각하자 코이는 다시 마음이 아파졌다.
“……왜?”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는 그제야 자신이 그저 멍하니 애슐리를 보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
각오를 하고 왔지만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용기를 끌어모아 간신히 소리를 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경기…… 이길 거야, 분명히.”
스스로가 듣기에도 한심할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코이가 입을 다물자 애슐리는 피식 웃었다. 그의 자조적인 웃음에 코이는 그나마 있던 용기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둘 사이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 말이 있었지만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코이는 결국 입을 떼지 못하고 대신 치마를 들쳐 속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물건을 꺼내 내밀었다.
“……뭐야? 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