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쿵쿵쿵쿵, 방송에서 나오는 요란한 드럼 소리에 이어 쏟아지는 함성에 정신이 멍했다. 코이는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중석에서는 요란한 함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섞여 나왔다. 너무 창피해서 아예 머릿속을 비우고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에만 집중했는데, 어떻게 해내긴 한 모양이었다.
줄을 지어 관중석에 인사를 한 뒤 재빨리 코이가 먼저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모두의 배려로 제일 마지막에 등장해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날 수 있도록 배치가 된 것이다. 덕분에 코이는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어서 달아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허겁지겁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간신히 숨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
무심코 소리를 낸 코이는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애슐리가 처음 보는 험악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코이는 당황해 눈만 깜박였다. 아무리 둔한 그라도 알 수 있었다. 애슐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이게 뭐야?”
“……어?”
당황해 얼빠진 소리만 겨우 내뱉었는데, 뒤에서 갑자기 에리얼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뭐냐니, 보면 몰라? 치어리딩 단복이잖아.”
그 말에 애슐리가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에리얼이 찌푸린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치어리딩 팀 아이들에게 모두 수고했다, 귀엽다, 새 단복 잘 어울린다 등등 말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애슐리는 여전히 코이를 붙잡은 채 이번엔 그녀를 향해 거칠게 내뱉었다.
“단복이 뭐 이따위야, 뭐 이런 걸 골라!”
“뭐야?”
에리얼 역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따위라니, 어디서 개소리야?”
“보면 몰라? 어떻게 골라도 이런 걸 고르냐고!”
“그럼 너도 회의할 때 있었어야지, 과제한다고 내뺀 게 누군데!”
“뭐야?”
“너야말로 뭐야!”
둘이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나머지 아이들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애쉬 왜 저래?”
부부장이 불안해하며 물은 말에 빌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나도. 아까 너네 나가는 거 보면서는 별 얘기 없더니 갑자기 막 화를 내더라고.”
역시나 작은 소리로 속삭였던 빌은 어쩔 수 없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 저기…… 있잖아.”
애슐리와 에리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무서운 네 개의 눈동자에 빌은 움칠 놀랐으나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난 뭐가 문젠지 모르겠는데…… 그, 유니폼도 우리 모두 같이 고른 거고.”
“그렇지?” 하고 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들을 지켜보던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같이 골랐어.”
“그때 그린 벨에서, 그렇지?”
“응, 난 모두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나도.”
“나도, 모두 다 귀여워. 잘 어울리고.”
맞아, 맞아 하면서 동의하는 모습에 에리얼은 양쪽 허리에 손을 대고 턱을 치켜올렸다.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 너뿐이라는 듯이. 애슐리는 화가 치밀었으나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만의 주장을 계속하기란 쉽지 않았다. 급하게 할 말을 찾는 애슐리에게 에리얼이 따져 물었다.
“대체 왜 그러는데? 이 유니폼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냐고! 말을 해 봐, 이유를 말해야 들어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모두의 시선이 애슐리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말해야 했다. 어째서 이 유니폼이 문제인지.
“너무…….”
간신히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너무 짧잖아! 다리가 다 나왔다고!”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관중석에서 들리는 소음만이 그들 사이를 아련히 맴돌았다. 한참 만에 에리얼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너 뭐 잘못 먹었니?”
애슐리가 순간 멈칫하자 에리얼이 연달아 화를 내며 말했다.
“이건 유니폼이야! 다리가 나오는 게 뭐가 어때서? 그걸 그런 성적인 눈으로 보다니 너 변태야?”
“너 말 조심해.”
“너야말로 말조심해! 어디서 유니폼을 가지고 다리가 어쩌니저쩌니 평가질이야?”
에리얼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빌을 비롯한 나머지 녀석들도 조심스레 동조했다.
“저기, 앨의 말이 맞아. 애쉬, 이건 네가 좀 선을 넘었어.”
“그래, 그냥 유니폼이잖아. 이게 뭐가 문제라고.”
“치마가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닌데 뭐. 이 정도는 모두 입는다고.”
“야, 너 왜 우리 아빠 같은 소릴 하냐…….”
애슐리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다. 애슐리 또한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다. 치어리더를 사귀기도 했지만 한 번도 유니폼이 어떻다 다리가 어떻다 이런 말을 하다니,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사실 아까 치어리딩 팀이 링크로 나갈 때까지도 그냥 남의 일처럼 보고 있던 애슐리였다.
하지만 그건 눈앞에 코이의 맨다리가 훤히 드러나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더그아웃에 같이 있는 녀석들은 물론이고 관중석에 있는 모두, 그러니까 이 경기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저 다리를 본다고 생각하자 미칠 것 같았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애초에 치어리딩 팀에서 코이를 받아들인 이유는 ‘여장한 남자’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면 코이가 저 응원복을 입을 거라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잖아.
아니, 당연히 치마를 입게 되리란 건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귀여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거기다 저 다리는 대체 뭔가. 코이가 저렇게 눈부신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니.
코이가 저 다리에 검은 스타킹을 신고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자 그야말로 쓰러질 것 같았다. 감금은 너무 약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코이의 부모님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어떻게 저렇게 귀엽고 야한 녀석을 그런 고물 자전거에 태워서 밖에 내보낼 수가 있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칙하게도 코이는 머리에 핀까지 꽂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하필 체리였다. 이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애슐리는 코이를 손가락으로 직접 가리키며 화를 냈다.
“저 핀은 뭐야? 왜 굳이 체리냐고!”
물론 에리얼도 지지 않았다.
“체리가 어때서! 귀엽기만 한데!”
문제가 뭔지 몰라? 코이한테 체리라니, 너무 야하잖아!
하지만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은 여전히 애슐리뿐이었다. 누가 봐도 억지를 부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지켜보던 치어리딩 팀 아이들이 소곤거리며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뭐야? 왜 싸우지?”
“그런 거 아냐? 내 여자 남에게 보여 주기 싫은 그런.”
“독점욕? 질투? 뭐 그런 거?”
누군가의 말에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런 거면 진짜 깬다, 애쉬. 그렇게 안 봤는데.”
곧 동조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 저렇게 꽉 막힌 앤 줄 몰랐어.”
“우리 아빠도 나한테 저런 소리 안 하는데 어떻게 저래?”
“혹시 앨이 그래서 애쉬를 찼던 걸까?”
마지막 말에 갑자기 그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는데, 한 명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우리가 실수한 거 아닐까?”
그들은 지금까지 애슐리와 에리얼을 다시 엮어 주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해 왔다. 그것이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 속삭였다.
“저런 애한테 앨을 넘기다니 그건 곤란하지 않아?”
“곤란한 정도겠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인 거지!”
“맞아, 안 되겠어. 애쉬는 탈락이야.”
“어떡하지, 앨이 너무 수준이 높아서 어울리는 남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어쩔 수 없잖아. 앨의 의사가 더 중요하니까.”
소곤거리며 심각하게 말을 주고받는 여자아이들의 모습에 코이는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다시 애슐리와 에리얼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꼴불견이라 괜히 둘이 싸우고 있어. 코이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감싸 주는 에리얼에게 고맙고 화를 내는 애슐리한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언쟁이 오고가는 가운데 2피리어드를 알리는 호른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야 돼, 애쉬.”
그때까지 보고 있던 빌이 끼어들었다. 애슐리는 한 차례 코이를 내려다봤다가 낮은 소리로 욕설을 뱉어 내더니 그를 놓아주었다. 코이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곧 그는 헬맷을 쓰고 링크로 나갔다. 나머지 녀석들도 우르르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빌이 에리얼과 코이를 번갈아 보고 말했다.
“미안, 오늘 애쉬가 좀 예민한가 봐.”
“됐어, 나가기나 해.”
에리얼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코이는 자신에게로 향한 빌의 시선에 작은 소리로 괜찮아, 하고 말했다.
양 팀의 선수들이 링크 중심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심판이 퍽을 허공에 던지고, 페이스오프(Face-off, 아이스하키 경기를 시작하거나 재개할 때 양 팀 센터가 마주 서서 심판이 떨어뜨리는 퍽을 스틱으로 빼앗는 동작)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