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와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함성 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코이는 잔뜩 긴장해 어깨를 움츠렸다. 복도에 서 있는데도 온몸이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그를 제외한 치어리딩 팀 여자아이들은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링크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피리어드가 끝난 뒤 두 번째 피리어드를 시작하기 전 공연을 위한 것이다.
비록 그들 사이에서 ‘할라피뇨’이기도, ‘파프리카’이기도, ‘브로콜리’이기도 한 무엇인 코이였지만 함께 옷을 갈아입는 건 물론 금지였다. 그래서 우선 여자애들 먼저 탈의실을 쓴 뒤 코이가 2차로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코이는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떨리는 숨을 내쉬고 또 내쉬었다.
정말로 이날이 오고야 말았어.
전날 옷을 입어 봤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여자 옷을 입고 치어리딩을 하다니. 거기다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으아아!”
너무나 수치스러워 얼굴은 달아오르고 입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대학이란 뭘까. 내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걸까. 다른 선택지는 정말 없었을까? 정말로, 절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치어리딩 팀 여자애들이 밖으로 나왔다. 머리를 움켜쥔 채로 고개를 든 코이에게 앞장서서 나오고 있던 에리얼이 말했다.
“뭐 해? 어서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빨리, 시간 없어.”
부부장이 옆에서 또 한 마디 거들었다. 코이는 옷이 든 가방을 끌어안고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으나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를 여자애들이 등 뒤에서 밀어 댔다.
“얼른, 바쁘다니까!”
“빨리 해!”
억지로 탈의실에 밀려들어 간 코이의 뒤로 문이 쾅, 닫혔다. 코이는 문을 돌아봤으나 이미 그만두기엔 너무 멀리 왔다.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열어 옷을 꺼낸 그는 스커트를 본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제발 이게 다 꿈이었으면…….
꾸물꾸물 속바지를 입고 그 위로 소매가 없이 깊게 목이 파인 V 자 네크의 셔츠를 입은 뒤 마지막으로 스커트를 손에 들었다.
“으으…….”
입 밖으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코이는 끙끙거리며 치마를 덧입었다. 하지만 차마 거울 속의 자신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는 눈을 꼭 감고 심호흡을 했다.
전날 이미 보여 주긴 했지만 그때는 같은 부의 여자애들이 잠깐 보고 마는 거라 이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실전이다.
그동안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 스커트 한 장에 모든 걸 허사로 만들 순 없잖아.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했으나 그런다고 없는 용기가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기까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뒤 그는 간신히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문득 코이의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갔다.
이 정도로 하면 그냥 내신 점수로 끝날 게 아니라 그냥 대학을 붙여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잔뜩 긴장해서 흔들리는 시야에 에리얼을 포함한 여자애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웃길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냥 지금까지 노력한 걸로 봐주고 넘어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정말? 그런 일은 없어? 좀 봐주면 안 돼?
코이는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떠올리며 숨을 죽인 채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 역시 아무 말 없이 코이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여기저기서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기 시작했다.
“어울려!”
“정말 귀엽다, 코이!”
“어제 본 거보다 더 귀엽잖아, 새 유니폼이 너무 잘 어울려!”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내며 좋아하는 그녀들을 보고 코이는 어리둥절해졌다. 나를 놀리고 있는 건가? 분명히 그런 거겠지? 새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눈치챈 여자애들은 앞을 다투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코이. 잘 어울려, 귀여워!”
“그래, 아무도 네가 여장한 남자애라는 거 모를 거야. 그냥 마르고 좀 키가 큰 여자애라고 생각할걸.”
“맞아, 맞아.”
“괜찮아, 누가 봐도 그냥 비쩍 마른 여자애일 뿐이야!”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자애로 보이는 것도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남자애가 여장한 걸로 보이는 것도 싫었다. 코이는 자신을 열심히 북돋워 주려는 여자애들에게 감사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데, 팔짱을 낀 채 엄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던 에리얼이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움칠했지만 에리얼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이의 한쪽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눈치만 보는데,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손바닥에 침을 발라 좀 더 세게 머리를 눌렀다.
“계속 뻗치네.”
혼자 중얼거렸던 에리얼은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자신의 머리에 꽂고 있던 핀을 빼 코이에게 내밀었다.
“머리 좀 숙여 봐.”
“으, 으응.”
시키는 대로 그녀 쪽으로 고분고분 머리를 수그리자 에리얼은 방금 자신이 침을 묻혔던 자리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핀을 찔러 넣었다.
“봐 봐. 훨씬 낫네.”
고개를 든 코이를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서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생소한 이질감에 무심코 손을 드는데, 에리얼이 그 손을 딱 붙잡았다.
“안 돼, 건드리지 마. 고정해 놓은 거니까.”
“어, 응.”
황급히 손을 내린 코이를 확인한 뒤 에리얼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치어리딩 팀의 아이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모두 각오는 됐지?”
“응!”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리얼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섰다. 그리고 에리얼을 선두로 치어리딩 팀 여자애들은 결연한 태도로 아이스링크를 향해 걸어갔다. 코이만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며 가장 뒤에서 엉거주춤 걸음을 옮겼다.
*
딱,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키 스틱이 퍽을 쳐올렸다. 얕게 날아오른 퍽은 이내 바닥에 길게 슬라이딩됐다. 곧바로 애슐리가 그것을 받아 진영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관중석을 메운 함성이 더욱 커졌다. 곧바로 상대 팀의 수비가 달라붙었다.
애슐리는 블레이드를 요란하게 맞부딪치며 재빨리 주변을 확인했다. 오른쪽에 빌이 있었다. 그는 그대로 그것을 빌에게 패스했다.
마치 달라붙듯이 퍽이 그의 하키 스틱에 딱 부딪쳤다. 그대로 빌이 질주하고, 다시 애슐리에게 퍽을 전달했다. 수비 팀이 따라붙자마자 이번엔 왼쪽으로 퍽을 패스하고, 그대로 녀석이 슛을 날렸다.
“우와아아아아!”
네트가 출렁이자마자 함성이 쏟아졌다. 곧이어 호른 소리와 함께 골 라이트(Goal Light)가 켜지고, 첫 번째 피리어드가 끝났다. 애슐리를 포함한 녀석들이 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너무 쉬운 거 아냐?”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며 빌이 말했다. 다른 녀석들도 웃으며 대답했다.
“뭐 3피리어드까지 갈 거 있나? 2피리어드에서 끝내도 되겠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얼음은 실컷 지치고 가라고 해야지.”
“왜, 식당에서 밥도 먹으라 하지.”
“야,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냐?”
와하하 웃음까지 터뜨리는 녀석들의 말에 애슐리 또한 소리 내어 웃었을 때였다. 마침 공연을 위해 치어리딩 팀 여자애들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빌을 포함한 녀석들은 “와우!” 하고 환호하며 두 팔을 들어 힘차게 흔들어 댔다.
“버팔로! 버팔로!”
아이스하키 팀 고릴라들의 우렁찬 고함 소리에 에리얼을 포함한 여자애들은 웃으며 그들의 옆을 지나쳤다. 녀석들은 휘익, 휘파람까지 불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새 유니폼이야?”
“오, 귀여워.”
“멋있다, 잘 어울리는데.”
부부장이 입술에 가볍게 손가락을 댔다가 떼며 후, 하고 키스를 날리는 시늉을 하자 아이스하키 녀석들이 으어어, 하고 가슴을 쥐고 뒤로 쓰러지는 척을 했다. 정말 죽이 척척 맞았다.
제일 앞에 서서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에리얼에게 애슐리가 말을 건넸다.
“힘내.”
그 말에 에리얼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리더니 엷은 웃음을 지었다. 애슐리 또한 마주 웃었다.
에리얼이 먼저 빙상으로 나가고, 이어서 부부장이, 그 뒤를 줄줄이 여자애들이 따라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슐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코이는 어디쯤에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봤을 때, 제일 마지막으로 쫓기듯 여자애들을 따라 나가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어?
제일 먼저 보인 건 머리에 꽂고 있는 체리 핀이었다. 그다음은 긴 목,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 마른 몸에 이어 턱없이 짧은 스커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애슐리는 보고 말았다. 그 아래로 드러난 길고 화사한 다리를.
“……잠깐, 기다려 코이!”
애슐리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벌써 늦었다. 대열이 갖춰지고, 음악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