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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77/216)

77화

“뭐 하고 있는 거야, 둘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앨의 음성이 뾰족해졌다. 애슐리는 코이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어쩔 수 없이 일으키며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별거 아냐.”

코이는 멀어진 애슐리의 체온에 아쉬움을 느끼며 조심스레 에리얼의 눈치를 살폈다. 팔짱을 끼고 애슐리를 바라보는 찌푸린 얼굴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중 어느 게 진짜인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확실한 건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때마침 에리얼의 시선이 코이에게로 향했다. 넌 거기서 뭐 하고 있느냐는 듯이. 코이는 망설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애슐리는 순간적으로 그를 붙잡을 뻔한 것을 간신히 억눌러 참고 자신에게서 앨에게로 시선을 옮겨 가는 코이의 모습을 지켜만 봤다.

가까이 오는 코이를 흘긋 보더니 애슐리에게 시선을 맞춘 에리얼이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올렸다.

“뭐야? 볼일 있어?”

“아니…….”

애슐리는 가는 눈으로 코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별안간 특유의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새 남자 친구인 건 아니지?”

“뭐래, 미쳤니?”

에리얼은 진심으로 불쾌하다는 듯 즉시 부정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이렇게 정색을 할 것까지야……. 코이는 내심 생각하며 눈치를 봤다. 에리얼이 계속해서 말했다.

“말했잖아, 코이는 소중한 부원이라고. 왜? 볼일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

“뭐야? 왜 그래?”

“앨, 무슨 일 있어?”

곧이어 탈의실 안에서 다른 부원들이 하나 둘씩 걸어 나왔다. 애슐리는 그녀의 뒤에 선 치어리딩 부원들을 보더니 곧 손을 저었다.

“별거 아냐. 그럼 난 연습하러.”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한 그는 선뜻 돌아서서 가 버렸다. 애슐리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부원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혹시 앨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냐?”

그 말에 여기저기서 술렁이며 반응이 이어졌다.

“어머,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다시 해 보고 싶다든가?”

“앨 나오길 기다리면서 여기서 막 초조해하고 그런 거야? 애쉬 귀여워!”

이어지는 환성에 에리얼은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했으나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이 또한 그들의 의견에 동조했다.

애쉬는 시합에서 이긴 다음 앨에게 얘기한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앨도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에리얼이 코이를 보더니 이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해, 코이? 어서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다시 나와. 잘 맞는지 우리가 봐줄 테니까.”

“옷은 거울 옆에 걸려 있어!”

곧이어 부부장이 한 마디 거들더니 코이를 떠밀었다. 얼떨결에 여자 탈의실에 들어와 버린 코이의 뒤에서 문이 닫히고, 그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게 됐다.

혼자 남은 코이가 고개를 돌리니 부부장의 말대로 커다란 거울 옆에 유니폼이 걸려 있었다. 당연하지만 허벅지 위로 오는 미니스커트였다.

“으으…….”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기적거리며 태어나 처음으로 치마를 입는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코이, 코이!”

옷을 다 갈아입고도 차마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밖에서 부부장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아직도 멀었어? 30초 셀 테니까 문 열어, 안 그럼 우리가 연다?”

“으, 으앗!”

코이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숨을 삼켰다. 문 너머에서 여자애들이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용기를 그러모아 두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28, 29!”

딱 1초를 남겨두고 벌컥 열린 문에 여자애들은 시선을 집중시켰다. 주먹을 불끈 쥔 채 엉거주춤 서서 눈을 꼭 감고 있던 코이는 숨 막히는 적막감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역시 최악이구나.

차마 거울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아 자신이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미처 알 수 없었던 코이로서는 그렇게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역시 나는 안 하는 게…….”

“됐어!”

간신히 말을 꺼냈을 때, 갑자기 에리얼이 그를 가로막았다.

“이 정도면 충분해. 거기다 넌 줄 제일 끝이잖아. 실수만 하지 않으면 잘 안 보일 테니 괜찮아.”

멋대로 결론을 낸 에리얼이 돌아섰다.

“자, 그럼 모두 이만 돌아가자. 내일은 드디어 시합이야, 모두 푹 쉬라고. 알았지?”

대답처럼 함성을 지르는 부원들을 뒤로하고 에리얼이 탈의실의 문을 열었다.

“자, 어서 갈아입고 나와. 딱 5분 줄 거야.”

“빨리 빨리!”

“어? 어어.”

떠밀리다시피 들어간 탈의실에서 코이는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었다. 달라붙는 속바지가 영 어색했지만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5분은 너무나 짧았다. 급히 벗은 응원복을 정리해 가방에 넣은 뒤 탈의실에서 나오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복도는 조용하기만 했다. 어느새 모두 돌아간 모양이었다. 단 한 명, 에리얼만 빼고.

혼자 벽에 기대서서 휴대 전화를 보고 있던 에리얼은 부랴부랴 뛰어나온 코이를 보더니 곧 허리를 폈다.

“가자.”

“어? 어.”

또 갈 데가 있나? 코이는 어리둥절했지만 서둘러 그녀를 따라 복도를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에리얼은 자신의 차를 세워 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전거 가져와, 빨리.”

“어?”

또다시 얼빠진 소리를 내자 에리얼이 미간을 찌푸렸다.

“늦었으니까 바래다준다고. 빨리 가.”

“어…… 왜?”

코이가 뒤늦게 물었다.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하려는데, 그 전에 에리얼이 입을 열었다.

“잊었어? 내일이 바로 경기라고. 늦게 가면 그만큼 쉬는 시간이 줄어들잖아. 빨리 타, 그리고 오늘은 휴대 전화도 보지 말고 바로 자라고. 알겠어?”

“어서!” 하고 다그치는 바람에 코이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허둥지둥 돌아오자 벌써 에리얼은 시동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꾸물거리는 걸 가장 싫어하는 그녀의 성미를 기억해 내고 코이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연 트렁크에 급히 자전거를 밀어 넣고 잽싸게 조수석으로 달려가 앉고 안전벨트를 매기까지,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스피드로 움직였다.

뒤늦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치를 보자 에리얼은 별말 없이 껌을 씹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다행이다. 코이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고마워, 앨.”

“감사해할 필요 없어. 모두 내일의 경기를 위해서니까.”

에리얼은 항상 그렇듯이 퉁명스레 말했지만 핸들을 움직이는 손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덕분에 코이는 편안하게 집까지 갈 수 있었다.

“휴대 전화 보지 말고 바로 자.”

코이를 내려 준 다음에도 당부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녀 역시 어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준 에리얼의 호의에 코이는 깊이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아파 왔다.

저런 앨이니까 더 애쉬와 잘 어울리는 게 당연해.

코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 느렸다.

*

“으아!”

그야말로 고릴라 같은 괴성을 지르며 빌이 하키 스틱을 휘둘렀다. 정확하게 맞은 퍽이 허공을 가르고, 멋지게 골대를 맞고 날아갔다.

“아으, 씨발!”

두 주먹을 움켜쥐고 억울해하며 욕설을 내뱉는 그에게 다른 녀석들이 웃으면서 야유를 퍼부었다. 애슐리 또한 피식 웃었으나 머릿속에는 다른 것이 가득했다.

아까 그건 뭐였지?

복도에서 있었던 일이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에리얼의 태도는 명확했다. 코이는 그녀의 ‘자매’ 무리 중 하나였고, 그러니 어미 새처럼 보호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거슬리는 건 바로 코이의 태도였다. 애슐리를 뒤로하고 그녀에게로 자리를 옮기던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다.

너무 풀어 줬나.

애슐리는 진지하게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봤다. 이제 얼마 안 남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라고 배려해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자들한테 넘어가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코이는 베타고 평범한 남자애다. 그러니 또래의 여자애들한테 관심을 가지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치어리딩 팀에 들어가질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하루 남았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나.

“어이, 애쉬!”

다른 녀석의 고함소리에 애슐리는 정신을 차리고 퍽을 쫓았다. 얼음 위를 질주하는 그의 뒤를 녀석들이 바짝 뒤쫓았다. 조그만 퍽을 노리며 사방에서 스틱이 교차했다. 애슐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앞의 녀석을 몸으로 밀치며 퍽을 날렸다. 빌이 곧바로 그것을 받아 정확히 스틱을 휘두르고, 이어서 퍽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아쉬워하는 한숨과 환호성이 섞이는 가운데 빌이 애슐리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드디어 내일이네.”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적당히 하이파이브를 해 준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냈다. 애슐리의 방에 갇혀 있는 코이를 떠올리자 입가의 긴장이 저절로 풀어졌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는 덧붙였다.

“하루밖에 안 남았어.”

그 시각, 코이는 집에 도착했다. 집 안은 언제나처럼 조용했고 아무도 없었다. 코이는 종이컵에 담겨 있는 흙을 슬쩍 눌러 보고 물을 조금 준 뒤 서둘러 씻고 침대에 누웠다.

잠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이 들면서 코이는 마지막으로 애슐리와 함께 있는 에리얼을 떠올렸다.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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