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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76/216)

76화

학교에서도 애슐리는 예전처럼 코이에게 달라붙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다른 무리들과 함께 그에게 말을 걸고 식사도 같이했지만 코이는 예전과는 다른 거리감을 느꼈다.

“저, 저기.”

점심시간이 되어 함께 식사를 하는데, 다른 녀석들과 웃고 떠들던 애슐리에게 코이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애슐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루 중에 그나마 애슐리와 대화를 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점심시간뿐이었다. 등·하굣길은 아예 만나질 못했고 수업시간에도 애슐리는 예전처럼 코이와 함께 이동하지 않았으니까.

간신히 잡은 기회에 코이는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쥐어짜 낸 화제를 겨우 입에 담았다.

“우리, 치어리딩 유니폼 있잖아. 이번에 단체로 새로 맞추게 돼서…… 어제 사이즈를 쟀어.”

“아, 그랬구나. 잘 어울려.”

애슐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다른 녀석들과의 대화에 섞여들었다. 코이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꾸물꾸물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넌 보지도 않았잖아…….

애슐리는 웃고 떠드는 척하며 흘긋 코이의 표정을 살폈다. 잔뜩 풀이 죽어 샌드위치를 깨작거리는 모습이 마치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코이가 나 때문에 시무룩해졌어.

스스로도 정말 성격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희열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다. 자신도 결국 아버지의 피를 받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짜증이 치밀기도 했지만 그런 코이를 보면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풀이 죽은 그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고 사랑스러웠지만 필사적으로 무시했다. 앞으로 그에겐 더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시합이 끝나고 나면 그동안 참았던 모든 감정을 코이에게 쏟아 낼 생각에 그는 잔뜩 벼르고 있었다.

괜찮아, 난 꼭 코이를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

그날부터 코이의 귀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예전처럼 기뻐하며 자신을 향해 웃고 귀를 움직이는 코이를 보고 싶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결판을 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빌의 시답잖은 농담에 맞장구를 치는 애슐리를, 코이는 상처 입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제 애쉬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구나…….

당연하다. 이제 에리얼과 다시 사귀게 될 테니 코이와의 일은 오히려 묻어 버리고 싶은 과거가 될 게 분명했다.

이렇게 될 걸 알고서 거절했던 거잖아. 괜히 아쉬워하지 마, 바보같이.

코끝이 찡해져 킁, 소리를 내어 훌쩍거렸을 때였다. 빌이 갑자기 코이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코이? 혹시 감기야?”

“어? 어…….”

불쑥 날아든 질문에 코이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옆자리에 앉은 빌을 올려다보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해 그나마 코이는 위로를 받은 기분이 되었다. 아이스하키 팀의 녀석들은 커다란 덩치 때문에 고릴라라는 비웃음 섞인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더없이 다정하고 착한 고릴라들이었다. 빌의 말에 잔뜩 웃으며 떠들어 대고 있던 다른 녀석들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일제히 코이를 바라보았다.

“아파? 어디가?”

“어, 그러고 보니 얼굴이 빨갛네.”

“나 해열진통제 있어. 줄까?”

“열나는 거 아냐?”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관심에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냐. 정말 괜찮아. 별거 아냐.”

차마 애슐리 쪽은 보지도 못하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냥 좀, 비염이 생겼나 봐.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어…… 그런 거면 다행이고.”

하나씩 관심을 거둬 가는 가운데 한 녀석이 덧붙였다.

“필요하면 얘기해, 약 줄 테니까.”

“야, 그냥 보건실에 가는 게 낫지 않겠냐?”

다른 녀석이 끼어들어 물었다. 뒤이어 남은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네.”

“맞아, 보건실이 있었지.”

“생전 가 봤어야 말이지. 그게 어디 있는지도 몰라 나는.”

“A동에 있을걸?”

“B동 아냐?”

“C동이야, 내가 일아.”

“D동일 텐데, 내가 봤어.”

“C동이라니까.”

“B동이라고.”

그들의 관심은 곧바로 보건실이 어디에 있는가로 옮겨져 갔다. 고릴라라는 별명답게 착하지만 단순한 애들다운 진행이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모두 틀렸다.

F동인데…….

끝까지 나오지 않는 정답에 코이는 가르쳐 줄까, 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재들은 갈 일도 없을 텐데 뭐.

그러는 사이 점심시간이 끝나고,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교실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보건실이 어디인지는 결판을 내지 못했다.

모두가 흩어진 뒤, 코이는 애슐리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뒤따라 걸어갔다. 전에는 코이의 걸음에 맞춰 나란히 걸어가거나 코이에게 치대며 걷던 애슐리였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차라리 애슐리가 자신의 등에 업혀 갈 때가 나았다. 코이는 가슴 가득 허전함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고 걸었다.

익숙해져야 돼.

코이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앞으로 이런 생활이 계속될 거야. 그동안의 일은 꿈이었다고 생각하자. 괜찮아, 예전엔 항상 그렇게 지냈었잖아.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괜찮아.

교실로 들어가기 전 애슐리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코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걸까. 애슐리는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그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왜 그걸 못 해서 저러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상관없어.

애슐리는 선뜻 빈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애슐리는 자신을 억눌러 타일렀다.

곧 코이를 내 걸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마침내 홈커밍 경기 전날이 훌쩍 다가왔다.

*

“버팔로!”

에리얼의 구호에 맞춰 모두가 함께 소리쳤다. 그리고 한 번 더 안무를 맞춰 본 뒤 마침내 연습이 끝났다. 오늘은 시합 전날이라 아이스하키 팀은 간단히 체력 훈련만 했고, 대신 빈 아이스링크를 치어리딩 팀이 사용했다. 지금까지 시간을 쪼개서 쓰느라 이래저래 쫓기기 일쑤였는데, 모처럼 오늘은 편안하게 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마지막 동작을 끝낸 코이가 녹초가 되어 돌아서는데, 뒤에서 에리얼이 불렀다.

“코이.”

“어?”

무심코 돌아보자 그녀는 능숙하게 스케이트를 타서 그의 앞에 멈췄다.

“넌 좀 남아. 의상이 맞는지 확인해 보게.”

“의상? 아.”

뒤늦게 깨달은 코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에리얼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옆을 스쳐 가더니 어서 오라고 손짓까지 했다.

“오, 옷을 주면 집에 가서 입어 볼게.”

급히 링크에서 나온 코이가 말하자 먼저 복도를 걸어가던 에리얼이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무슨 말이야, 지금 확인해 보고 이상이 있으면 바로 수선을 하든가 교환을 하든가 해야 할 거 아냐. 시합이 코앞이라고.”

“그, 그건 그런데.”

코이가 뭔가 더 말하기 전에 에리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딱 10분만 기다려. 우리가 먼저 옷 다 갈아입고 나와 있을 테니까 넌 우리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다 되면 불러. 우리가 들어가서 봐 줄 테니까.”

“여, 여자 탈의실에서 옷을 입으라고?”

당황해 크게 소리치고 만 코이에게 에리얼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 탈의실은 멀잖아.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다고. 빨리 갈아입고 대충 보고 끝내자, 알겠지? 수선실에서 기다려 준다고는 했지만 오래 시간을 끌 수는 없잖아.”

거기까지 말한 에리얼이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코이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꼼짝 말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며 다시금 강조한 에리얼이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코이는 자신이 그녀를 따라 여자 탈의실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쉰 그는 어쩔 수 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에리얼의 말이 맞다. 시합은 벌써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의상을 확인하려면 오늘밖에 없긴 하지. 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문득 들린 발소리에 코이는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복도 저쪽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코이는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 지금까지 줄곧 그와 말이라도 한 번 더 나누고 싶어서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데 이렇게 난데없이 기회가 찾아오다니.

어떡하지.

코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가오는 아이스하키 팀 주장을 보기만 했다.

시합 전 마지막 연습을 앞두고 몸 곳곳에 패딩을 붙인 그는 커다란 덩치에 걸맞게 조금은 으스대는 것 같은 과장된 몸짓으로 걸어왔다. 물론 애슐리는 평소에는 전혀 그렇게 걷지 않는다. 오히려 체격과 달리 날렵하다는 인상마저 느꼈는데 경기에 맞춰 유니폼을 갖춰 입으니 워낙 큰 몸이 더 거대해졌다.

코이는 벽에 찰싹 달라붙어 눈동자만 굴리며 그를 기다렸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대로 숨을 죽이고 있으면 애쉬는 내가 있는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의 존재감이란 항상 구석에 있는 작은 먼지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최근 애슐리의 행동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휴대 전화를 보며 걸어오던 애슐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그때까지 그를 지켜보고 있던 코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코이의 존재는 구석의 희미한 먼지에서 벽에 달라붙어 서 있는 얼뜨기 동급생이 되어 버렸다.

“어.”

애슐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 게 그에겐 아주 당연히 몸에 밴 것이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하지만 코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코이의 반응에도 애슐리는 별다른 변화 없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어…….”

코이는 바짝 마른 입을 간신히 움직여 대답했다.

“좀, 기다리고 있어서.”

문법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다음이었다. 당황해 눈을 깜박이는데, 애슐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구?”

“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애슐리가 갑자기 몸을 기울였다. 미처 물러나지도 못한 코이에게 그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혹시, 나야?”

그야말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애슐리의 숨결을 느낀 것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요 며칠 애슐리는 코이를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았던가. 아니,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했지만 코이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단둘이 복도에 서 있을 때 이런 행동을 하다니.

코이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어 댔다.

좋아해.

머릿속에 단 하나만이 가득히 떠돌았다.

좋아해, 애쉬.

“나…….”

마치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을 때였다. 갑자기 여자 탈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에리얼이 나타났다. 동시에 애슐리와 코이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향하고, 에리얼이 걸음을 멈춘 채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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