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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216)

72화

어쩌다 이렇게 됐지?

코이는 콜라를 홀짝거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아이스하키 녀석들이 시끄러운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치어리딩 팀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두 가지 소음이 합쳐지니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서 코이가 잠자코 콜라만 마셔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연습이 끝난 뒤 아이스하키 녀석들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먹어 댔다. 애슐리가 먹는 것에 놀라긴 했지만 다른 녀석들도 못지않았다. 테이블 가득히 차려진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다시 세팅된 음식들까지 곧바로 해치우는 모습을 보며 코이는 ‘하긴, 그래야 저 몸을 유지하겠지.’ 하고 납득했다.

배가 고파 속이 쓰려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코이는 어서 식사가 끝나고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이런 속도라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애슐리와 에리얼이었다. 바로 옆에서 하는 말도 잘 안 들리는데 이런 소음 속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엿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어딘지 심각한 표정인 것으로 보아 중요한 얘기가 오간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난 오래는 못 기다려.〉

불현듯 애슐리의 말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애슐리가 몸을 기울이고, 에리얼이 뭔가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코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내 자매들이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귓속말치곤 제법 큰 소리로 에리얼이 말했다. 그래 봤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애슐리뿐이었지만.

“대체 네 ‘자매들’은 왜 그러는 거야?”

양손의 검지와 중지를 V 자로 펴서 까딱이며 묻는 말에 에리얼은 조금 기분이 상했으나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나마 네가 내 수준에 근접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아아주 영광이네.”

애슐리가 비꼬아 말하자 에리얼은 테이블 아래로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쳤다. 빠르게 지르고 물러나는 잽에 애슐리는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웅크렸다. 시큰거리는 옆구리를 쥔 채 그가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네가 날 찼다고 소문 낸 것도 네 자매들이야?”

에리얼은 흥,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몰라, 난 헤어졌다고만 말했을 뿐이야.”

애슐리는 어이가 없어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런데 멋대로 그런 소문이 난 거라고?”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애들한테는 내가 차인다는 건 네가 빈털터리랑 결혼해서 애를 줄줄이 낳을 거라는 말만큼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걸.”

“왜 그렇게 생각해?”

이번에는 그냥 농담으로 받아 넘길 수 없었다. 실제로 애슐리는 그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빈털터리는 베타인 데다 남자라 아이를 낳을 수 없겠지만.

에리얼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며 지적했다.

“네 아버지가 절대 허락 안 할 테니까?”

잊고 있던 존재에 애슐리가 입을 다물자 에리얼은 기가 막힌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날 그렇게 경멸하는 눈으로 보는 남자는 네 아버지가 처음이었어.”

에리얼은 스스로도 멋지지만 집안도 화목하고 어디 하나 특별할 게 없는 중산층 가정이었다. 애슐리는 그래서 그녀가 좋았으나 반대로 아버지는 그 이유 때문에 그녀를 전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다만 애슐리가 멋대로 하게끔 내버려 둔 것은 그가 아직 미성년인 데다가 에리얼과 그 정도로 심각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딱 한 번 아버지가 학교에 교장을 만나러 왔을 때 그는 애슐리가 에리얼과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그때 아버지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자 에리얼의 반응이 너무나도 공감이 갔다. 애슐리는 그녀가 느꼈을 불쾌감을 미뤄 짐작하며 그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미안, 내가 사과할게.”

그때도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었지만 이번에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거지 같은 아버지를 둬서 미안해.”

“부모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따끔하게 지적한 에리얼이 곧 덧붙였다.

“뭐, 내가 너의 집 사정을 그 정도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네 말이 맞아. 부모한테 그런 말 하는 건 좋지 않지.”

에리얼의 말에 수긍한 애슐리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거지 같아.”

에리얼 또한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역시 다른 쪽 뺨도 때릴 걸 그랬어.”

애슐리가 소리를 내어 웃으며 한 손을 내밀고 상체를 뒤로 뺐다.

“참아 줘, 정말 아팠다고.”

“당연히 그래야지,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그래도 애슐리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에리얼은 미소를 지으며 샐러드 위에 소스를 뿌렸다. 큼직한 양상추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은 에리얼을 보고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한테 자전거 줬다면서?”

“그런데?”

이번엔 시리얼을 뿌려 샐러드에 골고루 섞으며 에리얼이 대답했다. 코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넌 예전에 코이를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우리와는 다르다느니 하면서.”

애슐리의 의문에 에리얼은 선뜻 답을 내놓았다.

“물론 그랬지. 지금도 싫어, 자존감 낮고 눈치 보고 우울한 애들.”

칼로리가 없는 탄산음료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애슐리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어쩌겠어? 우리 팀에 들어왔잖아. 같이하기로 한 이상 그 앤 내 자매라고. 뭐, 정확히 말하면 할라피뇨지만 어쨌든 같은 팀이라는 건 변함없어.”

그녀가 자신이 맡은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애슐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좋아했던 에리얼의 장점 중 하나였으니까. 거기다 치어리딩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진심이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팀의 구세주나 다를 바 없는 임시 부원이 그녀에게 꽤나 소중할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에리얼은 언제나 솔직했고 가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신랄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코이에 대한 평가도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애슐리로서는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하나 말해 둘 게 있어. 코이에 대해서, 네가 한 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앞에 둘은 맞는데 마지막은 틀렸어. 코이는 우울하지 않아, 소심할 뿐이지.”

반박이나 꺼림칙해하는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에리얼은 뜻밖에도 담백했다. 빻은 땅콩을 소스로 적신 양상추 위에 올리며 그녀는 말했다.

“그래, 생각보다 밝더라. 좀 귀엽기도 하고.”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여워?”

응, 하고 양상추를 포크에 올려놓은 에리얼이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걔 꼭 너네 집에 자주 오던 그 솜 꼬리 토끼 닮지 않았니?”

애슐리의 저택 정원에는 야생동물들이 가끔 나타났는데, 그중 주로 보이는 동물이 토끼였다. 특히 밤에 몇 마리씩 나타나 한가롭게 정원의 풀을 뜯어먹다가 인기척을 느끼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일쑤인 그것들을 떠올리자 그럴듯했다.

하지만 에리얼이 그 말을 했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다 솜 꼬리 토끼라니, 너무 귀여운 비유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애슐리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거기다 에리얼은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언제나 좋아.”

“좋다고?”

이 말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애슐리가 날카롭게 되물었지만 에리얼은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까 코이도 괜찮아. 우리 부로서도 임시이긴 하지만 성실한 부원이 들어와서 잘됐고.”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에리얼은 샐러드를 먹는 데 전념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보았던 애슐리 또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괜찮을 것이다. 코이는 에리얼의 타입이 결코 아니니까.

……아니겠지?

그의 시선은 당연히 코이에게로 향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저절로 그렇게 됐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아선지 코이는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빨대로 콜라를 마시며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치 털을 세운 고슴도치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까이에 있었다면 코이의 볼을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코이의 달콤한 볼 대신 맛없는 프렌차이즈 다이너 레스토랑의 햄버거를 입에 물었을 때, 갑자기 옆자리에 앉은 치어리딩 팀 여자애가 코이의 뺨에 키스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애슐리는 햄버거를 입에 문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미안.”

바닥에 떨어진 립스틱을 주우려다 그만 코이의 뺨에 얼굴을 스친 팀원이 사과했다. 코이는 괜찮아, 하고 말하곤 웃어 보였다. 금세 몸을 숙인 그녀를 따라 허리를 숙이며 코이가 물었다.

“뭐 떨어뜨렸어?”

“응, 샤넬. ……어디 갔지? 안 보이네.”

샤넬이 뭐지? 코이는 눈을 깜박이다 일단 덩달아 테이블 아래로 꾸물꾸물 웅크렸다. 뭐라도 보이면 얘기를 해 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누군가 테이블을 쾅, 두드렸다.

아래에 있던 코이와 옆자리의 팀원은 진동에 화들짝 놀라 굳어졌다.

뭐, 뭐지?

당황한 코이는 다시 테이블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애슐리가 자리에 일어나서 험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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