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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70/216)

70화

“다, 단합?”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진 환호성 속에 코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리저리 흩어져 나갈 준비를 하는 부원들을 뒤로한 채 에리얼은 찡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문제 있니?”

“아니, 저기…… 그게.”

코이는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오늘은 정말 돈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주말에만 하는 바람에 수입이 턱없이 줄었고, 그나마도 연습 때문에 빠질 때가 많았다. 이러다 보면 조만간 잘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라 한 푼이 아쉬웠다.

그런데 그린 벨이라니.

하다못해 싸구려 패스트푸드점이라면 그나마 나을 텐데 그린 벨은 지금 허용치 밖이었다. 어쩔 수 없지만 빠진다고 해야 할까?

사실 마음으론 함께 가고 싶었다. 이제 겨우 애들과 어느 정도 말문도 트이고 분위기도 맞추게 됐는데, 이럴 때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슐리와 그의 친구들처럼 자신도 그런 무리를 가지고 싶었지만 현실이 따라 주지 않았다. 거기다 응원복까지 사야 한다. 지금은 정말 쥐어짜도 나오는 돈이 없었다.

가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데, 머리를 묶었던 끈을 푼 에리얼이 풍성한 머리칼을 풀어 헤치며 말했다.

“오늘은 가는 게 좋을걸? 모두 함께 우정을 나누는 자리니까.”

때마침 부주장이 에리얼의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안 가면 후회할 거야. 거기서 새로운 응원복 디자인을 고를 거거든.”

그 말에 코이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나는…… 응원복이 바뀌어도 치마를 입는 거야?”

“오, 물론이지.”

디즈니 만화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과장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대답한 부주장이 마저 짐을 싸기 위해 돌아섰다. 역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코이는 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현실을 떠올렸다. 콜라를 마실 돈도 없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날을 기약하자.

“저기…….”

“혹시 치마가 싫어서 빠지려는 거야?”

에리얼이 찌푸린 얼굴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 코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냐. 그래서는 아니고, 저기, 나도 가고 싶긴 한데…….”

“그럼 가. 우리한테 넌 남자가 아니니까. 물론 여자도 아니니 알 수 없는 그 무엇이긴 하지.”

할라피뇨보다는 나아진 걸까. 코이는 잠시 생각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니, 물론 나도 너희가 날 남자로 생각 안 한다는 건 잘 알아. 물론 그래, 여자도 아니지. 그런데 저기…….”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끝을 흐리는데, 에리얼이 말했다.

“네 고철 덩어리 팔았어.”

“어?”

갑작스러운 얘기에 눈을 깜박이자 에리얼이 말을 이었다.

“네 그 고물 자전거, 팔았다고. 우리 아빠가.”

“팔아? 그걸?”

코이는 당황해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기만 했다. 에리얼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고철도 돈이 된다니 굉장하지?”

“어…… 저기, 그래, 그렇긴 한데…….”

갑자기 무슨 얘기지?

그 자전거가 팔렸다는 사실도 놀랍고 갑자기 얘기를 꺼내는 것도 의아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코이를 보며 에리얼이 말했다.

“어찌나 고물인지 12달러 밖에 못 받았더라. 자, 여기 있어.”

“어?”

갑자기 에리얼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코이는 뜻밖의 상황에 머리가 그대로 비어 버렸다. 에리얼은 어서 받으라는 듯 재차 손을 흔들었지만 코이는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다.

“이걸 왜, 나한테 줘?”

“네 고물을 판 돈이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코이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넌 나한테 네 자전거를 줬잖아.”

그 말을 들은 에리얼이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좀 가져가. 넌 왜 이렇게 말이 많니?”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아, 진짜.”

에리얼은 짜증을 내며 코이의 셔츠에 냅다 돈을 꽂아 버렸다. 땀에 젖어 있던 셔츠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지폐가 몸에 찰싹 달라붙고, 미처 그걸 어찌할 틈도 없이 에리얼이 돌아서서 먼저 가 버렸다.

“아무도 빠지지 말고 와! 중요한 회의를 할 거니까!”

에리얼이 소리치더니 순식간에 자신의 차를 향해 사라져 버렸다. 코이는 땀에 젖은 지폐를 간신히 몸에서 꺼내어 손에 쥐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만 보았다.

*

그린 벨에는 모두가 먼저 도착해 코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코이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자신의 차를 타거나 카풀을 해서 먼저 학교를 떠났다. 사실 그것은 그들 나름의 배려였다. 코이는 어차피 임시 부원이니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의미였지만 물론 고지식한 코이로서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코이, 여기야!”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그를 제일 먼저 발견한 부원이 소리치며 팔을 흔들었다. 그들은 벌써 메뉴판을 들고 주문할 요리를 고르고 있었다. 코이는 어색한 몸짓으로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치어리딩 팀은 어느 학교에서나 아주 인기다. 물론 그 팀원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지금도 그린 벨에 있는 10대들은 흘긋거리며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훔쳐보는 중이었는데, 거기에 코이가 끼자 다들 이상한 표정이 됐다. 코이는 부끄러워 황급히 가장 구석의 자리에 기어들어 갔다.

“우린 다 골랐어. 넌 뭐 먹을래?”

부주장이 메뉴북을 주며 물었다. 물론 코이가 고를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코, 콜라로. 얼음은 빼고.”

“그리고 또?”

“그거면 됐어.”

코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에리얼이 돈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응원복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쪼들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리얼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자신도 이런 자리에 한 번쯤은 끼고 싶었다. 비록 여자애들의 모임에 곁다리로 낀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렇게 안 먹으니까 근육이 안 붙지.”

에리얼이 코이에게 핀잔을 줬으나 코이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곧 주문이 끝나고, 여자애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라거나 화장품이라거나 좋아하는 팝스타 얘기까지, 시시콜콜한 것들뿐이었지만 코이는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구석에 앉아 상기된 얼굴로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문득 실내의 공기가 달라진 듯했다. 코이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 떠들썩한 말소리와 함께 버팔로 고등학교의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이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어?”

“어!”

그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발견했다. 치어리딩 팀과 눈이 마주친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우르르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우와, 너네도 여기 있어?”

“뭐 해? 여기서 무슨 일인데?”

“멍청아, 당연히 저녁 먹으러 온 거지. 식당에 무슨 일로 오겠어? 그러는 너희들은?”

“이 덩치만 큰 고릴라들이 또 가게를 거덜 내러 온 거지 뭐.”

핀잔을 주면서도 치어리딩 팀 아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들은 사이가 좋았다.

애쉬는 오지 않은 건가……?

오늘 애슐리는 팀에 합류가 가능한지 결과를 들을 거라고 했다. 혹시 결과만 듣고 먼저 간 걸까? 코이가 열심히 무리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누군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물었다.

“애쉬는 왜 없어? 오늘도 훈련 빠진 거야?”

“아, 자리가 없어서 좀 멀리 주차했어. 곧 올 거야.”

돌아온 대답에 코이는 내심 그렇구나, 하고 안도하는 한편 궁금해졌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좋은 대답이 나왔으니까 함께 온 거겠지? 내심 두근거리는데, 아이스하키 팀이 불쑥 그들과 테이블을 합할 것을 제안했다.

“야, 저기로 옮길래? 여긴 좁잖아.”

빌이 먼저 꺼낸 얘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각자 자신이 마시던 물컵을 들고 일어나자 아이스하키 팀 사내 녀석들은 먼저 가 여자아이들이 앉을 의자를 빼고 기다렸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에리얼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코이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 저기, 앨.”

에리얼이 고개를 돌리자 코이는 머쓱해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저기, 아까 말 못 했는데…… 고마워. 자전거도 줬는데 또…….”

“괜찮아. 그리고 그 얘긴 이제 그만할래? 난 내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뿐이야. 네가 불쾌하지 않았다면 됐어.”

“불쾌하다니, 왜? 그럴 리가 없잖아.”

코이가 놀라 묻자 에리얼은 흘긋 그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지나치게 선을 넘은 것도 사실이니까. 뭐 아니면 다행이고.”

그렇게 말하고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향하는 에리얼의 뺨이 다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뜻밖에도 쑥스러워한다는 사실에 코이는 깜짝 놀랐다. 이런 과한 호의를 받은 것도 놀라운데 에리얼이 저렇게 부끄러워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코이는 그녀에 대한 감사와 호의로 가슴이 온통 차고 넘치는 듯했다.

“앨…….”

다시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따라가려던 순간, 또다시 종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애슐리였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 한 차례 실내를 둘러보더니 제일 먼저 코이를 발견했다. 환한 미소를 지었던 그가 이내 멈칫했다. 애슐리의 눈은 코이와 지나치게 가까운 에리얼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코이에게로 움직였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애슐리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처럼 느껴졌을 때, 문득 치어리딩 여자애들이 뭔가를 소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둘로 나뉘어 애슐리와 에리얼에게 몰려들었다.

“자, 어서 앉아.”

“뭐 하고 있어, 빨리 시작하자.”

재잘거리며 둘을 끌고 간 그들이 나란히 에리얼과 애슐리를 옆자리에 앉힌 뒤, 재빨리 그 양 옆을 치어리딩 팀과 아이스하키 팀으로 번갈아 채워 넣었다. 그때까지 멀거니 지켜만 보던 코이는 결국 애슐리에게서 가장 먼 자리를 배정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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