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코이의 두 눈이 점차 크게 떠졌다. 그런 그를 보며 애슐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 맞아. 이제 이해하겠지? 이대로라면 널 오메가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 지금 당장 나가.”
“애쉬…….”
“나가라고!”
애슐리가 다시금 고함을 질렀다. 또다시 머릿속이 멍해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언제까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그는 장담하지 못했다. 만약에 또 이성을 잃어버린다면 이번에는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나는, 나는.
정말로 코이를…….
갑자기 코이가 무릎을 세워 애슐리를 끌어안았다. 애슐리는 놀라 숨을 멈췄다. 머리 위에서 코이가 속삭였다.
“괜찮아.”
그는 애슐리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채 말을 이었다.
“괜찮아, 애쉬. 난 괜찮을 거야. 왜냐면 난, 나는…….”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난 냄새를 맡지 못해.”
“……어?”
스스로 듣기에도 얼빠진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박이는 애슐리에게, 코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냄새 같은 거 못 맡아. 네 페로몬 향기, 난 전혀 맡지 못하니까…….”
코이는 조심스럽게 팔을 풀고 몸을 숙여 애슐리와 시선을 맞췄다. 드디어 그와 마주 본 코이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애슐리는 자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그의 손이 뺨을 쓰다듬는 걸 그냥 내버려 뒀다. 그저 코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애슐리에게 코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네 옆에 있을게.”
어렵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애슐리는 여전히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 난 다시 이성을 잃을 거야.”
억지로 숨을 눌러 참으며 최대한 냉정하게 내뱉었지만 코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괜찮아.”
“널 강간할지도 몰라.”
“괜찮아.”
코이가 다시 말했다.
“네 옆에 있고 싶어.”
“하…….”
결국 애슐리는 지쳐 버렸다. 그는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가지 않는 거야…….”
더는 이성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코이를 상처 입히고 싶지도 않았다. 진퇴양난에 빠져든 기분마저 느껴졌을 때, 코이가 입을 열었다.
“내가 가면, 넌 혼자잖아.”
애슐리가 움직임을 멈췄다. 얼굴을 덮었던 손을 서서히 내린 그가 코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코이는 해설피 웃어 보이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같이 있자, 애쉬.”
애슐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머릿속은 몽롱하고 입 안은 끝없이 타들어 갔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갈증 속에 그가 느껴지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작은 몸이 전해 주는 체온만이 애슐리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코이의 몸을 조심스레 안았다. 마치 그것에 응답하듯 코이 역시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 순간 코끝이 찡하게 달아오르고, 애슐리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그는 느릿느릿 코이를 마주 안았다. 입을 벌렸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그는 마침내 털어놓았다.
“좋아해, 코이.”
가득 차올랐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애슐리는 눈을 감고 더욱 힘주어 코이를 끌어안았다.
아, 마침내.
그는 생각했다. 드디어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게 되었구나.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작은 존재가 그에겐 세상의 전부였다. 절대로, 결코 놓치지 않겠다. 애슐리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코이, 널 좋아해.
좋아해, 너를.
그러니까.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원히 날 놓지 말아 줘.
*
창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애슐리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깜박 잠이 들었던 코이는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코이?”
황급히 그의 손을 잡은 코이가 대답했다.
“나 여기 있어, 애쉬.”
애슐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잠에 빠져들었다. 코이는 그가 다시 깊은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 뒤 다시 침대에 머리를 누였다.
난폭했던 것은 첫날뿐이었다. 이후 발현 기간 내내 애슐리는 종종 의식을 잃었으며, 그때마다 넋두리를 늘어놓듯 시시때때로 코이를 찾았다. 그러면 코이는 즉시 그에게 응, 하고 대답하며 손을 잡아 주었다.
코이는 그가 잠든 사이에 열심히 집 안을 뒤져 구급약을 찾아와 팔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학교에서 배웠던 간단한 응급 의학이 이럴 때 도움이 되다니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한 번씩 음료와 먹을 것을 가지러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 외에는 줄곧 애슐리의 곁을 지켰다.
자신이 학교에 가지 않고 있다는 것, 집에도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으나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에겐 어느 것보다 애슐리가 소중했다.
평화롭다…….
코이는 애슐리와 함께 침대에 누워 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창밖에서는 이따금씩 새소리가 들리고, 화창한 햇살이 가득히 방 안에 흘러넘쳤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정신을 오히려 맑게 하면서도 한없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코이는 애슐리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생각했다.
이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됐으면 좋겠다, 라고.
술에 취한 아버지도 없고, 고생스러운 아르바이트도, 밤을 새워 과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 불현듯 의식을 깨지 않고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던 애슐리는 열 시간 가까이 경과된 다음에야 비로소 눈을 떴다.
의식을 잃기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머리가 맑았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던 애슐리는 생소한 감각에 잠시 동안 어리둥절해했다. 머릿속은 물론이고 몸도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렇게 들뜬 느낌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기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애슐리는 저절로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마침 기척을 눈치챈 듯 코이 또한 잠에서 깼다. 아직 졸린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마주 보는 코이의 얼굴에 애슐리는 웃으며 속삭였다.
“코이.”
“애…….”
애쉬, 괜찮아? 하고 물을 틈도 없었다. 애슐리는 곧바로 코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두 팔 안에 완전히 갇혀 버린 채 코이는 눈만 깜박거렸다. 어렴풋이 이번에 깬 애슐리는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발현이 끝났나?
코이가 그것을 물어보려고 막 입을 열었을 때, 애슐리가 갑자기 그의 뺨과 코와 입술에 몇 번이고 키스를 퍼부었다. 다시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코이는 얼떨떨해하며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애슐리는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가슴 가득한 코이에 대한 애정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이보다 더 확실한 서로에 대한 확신은 없을 거라고, 애슐리는 굳게 믿었다.
*
각자 샤워를 마친 뒤 둘은 식당으로 향했다. 애슐리는 냉장고를 전부 다 비울 기세로 음식을 먹어 치웠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코이는 최대한 노력했지만 햄버거 하나와 샐러드를 반 접시 정도 비운 게 전부였다.
코이의 등교와 집 문제는 애슐리가 해결했다. 사실 그는 전화 한 통화를 건 게 전부였고, 이미 애슐리가 발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비서는 그에 대해 미리 손을 써 둔 상태였다. 다만 코이가 함께 있었을 거라는 점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코이의 출석과 내신, 부친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추가되었다.
- 친구분은 괜찮습니까? 발현 기간 내내 같이 있었다니…….
의심스러운 비서의 물음에 애슐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괜찮아, 오메가로 발현하지도 않았고.”
-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비서가 덧붙였다.
- 혹시 친구분이 휘말려서 오메가로 발현하기라도 했다면 밀러 씨가 썩 반가워하진 않으셨을 테니까요.
애슐리는 이번에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굳이 코이가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도 몰랐지만 코이에 관한 얘기를 굳이 다른 사람이 알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알고 있는 건 애슐리 하나로 충분하니까.
“아, 애쉬.”
정원으로 나가자 먼저 풀장에서 수영을 하고 있던 코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엉망이 되어 버린 셔츠를 버리고 대신 애슐리가 준 티셔츠와 수영 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티셔츠는 너무 커서 입으나 마나였지만 수영 팬츠는 초등학교 때 입던 걸 어떻게 찾아낸 터라 그럭저럭 사이즈가 잘 맞았다.
“재밌었어?”
뒤따라 물에 들어간 애슐리가 선뜻 그를 따라잡고 물었다. 당연한 듯이 허리를 끌어안은 애슐리에게 끌려간 코이는 그의 팔에 손을 걸치고 입을 열었다.
“으, 으응. 저기…… 전화는, 잘됐어?”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 애슐리는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래. 학교도 집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코를 문질러 에스키모 키스를 한 그가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네 남자 친구의 능력이 대단하지?”
“어? 어…….”
코이는 당황해 대답을 머뭇거렸으나 애슐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그는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거지 같은 발현이 끝나자 천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행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면 발현 따위 열 번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속에서 코이의 허리를 잡아 높이 들어 올렸던 애슐리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으아,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던 코이는 황급히 그의 어깨에 손을 댔다. 애슐리는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아해, 코이.”
코이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애슐리는 그에게서 같은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잔뜩 기대에 차 그를 바라보았다. 어서 말해, 코이. 어서.
나도 좋아한다고 해.
“나…….”
어렵게 코이의 입이 열렸다. 애슐리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를 바로 귓가에서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그의 입만 바라보았다.
“난, …….”
코이가 뭔가 말했다. 처음 애슐리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바라만 보던 애슐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뭐라고? 지금, 잘 못 들었는데.”
코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잔뜩 흔들리는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너 안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