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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61/216)

61화

처음 느끼는 현기증에 애슐리는 그만 주춤했다. 애슐리에게 붙잡혀 있던 코이도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라 손을 내밀었다.

“애, 애쉬, 괜찮아?”

코이가 당황하며 그에게 물었다. 애슐리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건 입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져 손가락 하나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뭐지? 이건.

의문을 가졌을 때, 눈 안쪽이 찌르는 것처럼 아파 왔다. 애슐리는 신음을 삼키며 두 눈을 감쌌다.

“애쉬!”

코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애슐리는 한 손을 눈 위에 덮은 채 남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괜, 찮아.”

“애쉬.”

“미안, 코이. ……다음에, 계속 얘기하자.”

애슐리는 어렵게 말을 끝낸 뒤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코이는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늦게 그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빌이 그를 발견하고, 뒤따라 친구들이 애슐리를 에워쌌다.

“애쉬,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뭔데?”

“애쉬, 정신 차려!”

순식간에 애슐리를 둘러싸고 가 버리는 그들의 틈에 코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코이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채로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

“뭐? 조퇴?”

수업 이동 시간에 잠깐 마주친 빌에게 애슐리의 상태를 물은 코이는 뜻밖의 답변에 놀라 방금 들은 말을 되묻고 말았다. 빌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래, 갑자기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서. 이상해, 아침에 막 등교했을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거기까지 말한 그는 아니다, 하고 말을 고쳤다.

“안색이 안 좋긴 했어. 평소랑 다른 거 같아서 어제 무슨 일 있었냐고 했더니 별일 없었다고 했거든? 그런데 갑자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넌 뭐 아는 거 없어?”

“아, 아니…….”

코이는 당황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 나도.”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애슐리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긴 했지만 그는 그대로 친구들과 함께 가 버렸고, 코이는 뒤에 남겨졌으니까.

“너도 원인은 모른단 말이지?”

빌의 물음에 코이는 응,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아,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가 버렸다. 혼자 남은 코이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수업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 수업도 역시 애슐리와 같이 듣는 시간인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코이는 걱정이 되어 도무지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수업이 끝난 뒤 치어리딩 팀에서 체력 연습을 하는 동안에도 코이는 자꾸만 애슐리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빌을 비롯한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도 그 뒤의 상황은 알지 못했고, 애슐리 또한 전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휴대 전화도 받지 않아.

연습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 봤던 코이는 음성 메시지로 넘어가 버리는 휴대 전화를 잠자코 내려다봤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이성적으로는 맞았다. 자신은 애슐리에게 그냥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타인일 뿐이다. 괜히 나서 봤자 좋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코이의 머릿속에 자꾸만 혼자 앓고 있던 애슐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열에 들떠 수프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전거를 돌려 애슐리의 집으로 향했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

애슐리가 살고 있는 대저택은 불이 켜진 곳 하나 없이 캄캄했다.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시커멓게 웅크린 저택의 모습은 흡사 커다란 괴물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코이는 지금껏 몰랐던 저택의 어둠에 내심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용기를 내어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지금껏 애슐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침묵에 그의 두려움은 한층 더 커졌다. 그럼에도 물러나 달아나지 않은 것은, 이 어둠과 침묵이 애슐리에게는 일상이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도 혼자 이 저택 안에 있는 거겠지.

애슐리가 했던 말에 따르면 이 시간에는 고용인이 없다. 이렇게나 커다란 저택에 오롯이 애슐리 혼자뿐이다.

코이는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럽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는 크림수프와 버섯수프, 감기약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다. 야채수프는 당연히 뺐다.

좀 더 맛있는 것을 사 오고 싶었지만 그가 가진 돈으로는 고작 이 정도가 한계였다. 부디 애슐리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코이는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애슐리의 방까지 향하는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

하아, 하아.

거친 숨결에 한층 더 현기증이 심해졌다. 애슐리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조퇴를 하고 집으로 왔지만 간신히 침대 위에 누운 뒤로는 계속 이 상태였다.

누워 있는데도 어지러워서 자꾸만 구역질이 나왔다. 그는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숨만 몰아쉬었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지금껏 아무리 독한 감기를 앓았어도 이렇게 열이 오른 건 처음이었다. 거기다 이상하게 주변에서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그는 이 향기가 왜인지 낯익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분명히 맡았던 향기다. 분명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누구였지, 이건? 몽롱한 머릿속으로 그는 떠올렸다.

‘누구’라고……?

“아윽…….”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눈이 찌르듯 아파 왔다. 애슐리는 두 눈을 손으로 감싸고 신음을 흘렸다. 몸이 온통 타오르는 것 같다. 열기가 올라 미치겠는데 또 한편으로는 전신에 나른함이 퍼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다.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 열기를 어디론가 쏟아 내 버리고 싶다고.

코이.

애슐리는 헐떡거리는 숨결 사이로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코이, 코이, 코이. 눈은 계속해서 아프고 온몸이 저릴 정도로 뜨거운데 그의 이름만은 계속해서 입 안을 맴돌았다. 널 안고 싶어, 키스하고 싶어.

아, 널 안고 네 안에 전부 다 쏟아부을 수 있다면.

깊은 한숨과 함께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나 강렬한 욕망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만약 눈앞에 코이가 있다면 이번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옷을 벗기고, 피부를 핥고, 빨아들이고, 온몸에 자국을 새길 것이다. 코이가 울음을 터뜨려도, 두려움에 떨어도, 이러지 말라고 빌어도 들어주지 않겠다. 너를, 너를, 너를. 애슐리는 반복적으로 떠올렸다. 머릿속에는 이미 그 단 한 가지만이 가득했다.

너를 내 오메가로 만들 거야.

“애쉬…….”

불현듯 귀에 익은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애슐리는 숨을 헐떡이며 침대 위에 누운 채 눈을 깜박였다.

지금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아직 자신이 망상 속을 헤매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잠시 뒤 또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애쉬, 나야. 코이.”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달은 순간, 애슐리의 머릿속은 완전히 비어 버렸다.

“애쉬…….”

코이는 머뭇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내부가 다 그렇듯이 이 방에도 역시 불은 켜 있지 않았다. 오직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밤의 은은한 빛만이 존재하는 방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코이는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기,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준비했던 말을 꺼냈던 코이는 우물쭈물하며 다시 물었다.

“저, 많이 아파? 또 감기야? 혹시 몰라서 수프랑 약을 좀 사 왔는데…….”

코이는 입을 다물고 애슐리의 반응을 기다렸다. 여전히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애슐리는 지금껏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한테 화가 난 건지도 몰라.

코이는 마음이 아파졌으나 여기까지 와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한 발자국을 더 들여놓았다.

“애쉬, 저기…… 가까이 가도 될까?”

조심스레 허락을 구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답은 듣지 못했다. 코이는 천천히 한 발자국씩 침대로 향해 걸어갔다.

혹시 잠들어 있는 건지도 몰라. 코이는 생각했다. 전에도 애슐리는 열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수프를 끓여 오니까 그제야 눈을 떴었다.

정말 많이 아픈가 봐.

측은한 마음과 함께 가슴이 아파 오는 걸 느끼며 코이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는 불룩한 덩어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애슐리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게 분명했다.

코이는 살짝만 이불을 들춰 보고 애슐리의 얼굴을 확인한 뒤 수프를 끓여 오든 뭘 하든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는…… 우선 그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다.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애쉬…….”

속삭이듯 말하며 조심스레 시트의 끝을 잡았을 때였다. 갑자기 그 안에서 팔이 튀어나왔고, 불시에 코이는 끌어당겨져 침대에 쓰러졌다.

“……아!”

놀라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매트리스에 처박혔다. 코이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위에는 애슐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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