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216)

57화

“야, 야.”

“네가 참아. 너도 야, 드라마 좀 그만 봐. 어휴.”

실실 웃는 녀석과 주먹을 날리려 덤비는 녀석 사이에 끼어든 남은 녀석들이 급하게 중재에 나섰다. 결국 뜻대로 하지 못한 쪽은 날리지 못한 주먹을 여전히 꽉 쥔 채 성이 난 얼굴로 씩씩거렸다.

“멍청아, 좋아하니까 그런 거잖아. 그건 질투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장점은 나만 안다는 뭐, 그런…….”

“네 말은 그럼 애쉬가 코이를 좋아한다는 얘기야?”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뒤이어 여기저기서 놀란 비명이 쏟아졌다.

“뭐라고?”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둘 다 베타고 남자잖아.”

“맞아, 거기다 애쉬는 얼마 전까지 앨이랑 사귀었다고, 학교 퀸이랑!”

그것만큼 확실한 반증은 없었다. 모두가 그 말에 수긍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냐. 코이가 귀엽긴 한데 앨이랑 헤어지고 사귈 정도는 아니지, 거기다 같은 남자고.”

“그럼 대체 뭐지?”

서로가 얼굴을 마주 봤지만 나오는 답이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으나 거기에 동의할 수 없는 그들은 즉시 반론을 내놓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질문에 또다시 같은 답이 나오자 포기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했으며, 또 되돌아간 질문에 또 같은 답을 내놓자 이번엔 강하게 부정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자 결국 그들은 지쳐 포기해 버렸다.

“저녁이나 먹자. 진짜 죽을 거 같아.”

누군가의 말에 나머지도 동조했다.

“애쉬가 코이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야.”

“아니, 그래도 그건 좀.”

“일단 좀 먹자.”

“맞아.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해. 난 치즈 버거.”

“야, 가서 정해. 그린 벨에서 보자.”

그들은 결국 그린 벨로 가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고 각자 차로 향했다. 처음 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결론이었다.

*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애슐리의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일 따위는 이미 깨끗이 사라졌다. 떠오르는 건 오직 코이뿐이었다.

코이는 어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았을까?

밤새워 고민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밤새워 애슐리를 생각한 것이나 다름없다. 코이가 자신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웠다고 생각하자 사랑스러움으로 입 안에 단맛이 넘쳐났다.

코이, 코이, 코이.

애슐리는 자신의 차에 기대어 서서 코이가 오길 기다리며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혹시 테스트가 오래 걸리는 건가?

상관없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애슐리는 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치어리딩 팀이 연습을 하는 강당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제 곧 코이가 상기된 얼굴로 저쪽에서부터 달려오겠지.

상상은 계속되었다.

테스트에 통과했다고 먼저 말을 할 거야. 난 축하한다고 하면서 그를 껴안아야지. 팔 안에 쏙 들어오는 코이는 얼마나 작고 사랑스러울까.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가슴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우선 차에 타라고 해야지. 혹시 모르니까 차 문을 잠그는 것도 잊으면 안 돼. 물론 코이는 눈치채지 못하겠지. 집으로 가는 내내 코이는 테스트에 대해 열심히 말할 거야. 얼마나 긴장했는지,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하지만 또 어떻게 만회했는지 참새처럼 떠들어 대겠지. 그럼 나는 이따금 놀라고 이따금 감탄하면서 맞장구를 칠 거야. 머릿속으로는 온통 너를 잡아먹고 싶다는 생각밖에 못 하면서.

코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홈커밍 파티에서 고백하기로 했던 계획을 즉석에서 수정했다.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애슐리는 연신 웃는 얼굴로 상상을 이어 갔다.

네가 얘기를 마칠 때쯤이면 내 인내심도 바닥나겠지. 그때쯤이면 차도 집에 도착하지 않을까. 그럼 나는 너를 정자로 데려갈 거야. 같이 식사를 하자고 안심시키고, 준비해 둔 요리를 꺼내고, 으슥한 밤이 되면 정원의 가로등이 켜지겠지. 그럼 나는 가로등 밑에서 너에게 물어볼 거야. 내가 한 질문의 답은 생각해 봤느냐고.

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겠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시선을 피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귀는 바쁘게 움직여. 넌 그걸 감출 생각도 못 해. 난 네게 충분히 시간을 줄 거야. 아니, 못 참고 네 손을 잡을지도 몰라. 그리고 말하겠지.

난 너를 좋아한다고.

친구로서가 아닌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고 난 네게 푹 빠져 있다고. 하루 종일 너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고.

그럼 너는 얼마나 당황할까.

하지만 이번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애슐리는 답을 얻을 때까지 그에게 좋아한다고 속삭일 것이고, 그러면 결국 코이도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널 좋아해, 라고.

“하아.”

떨리는 한숨이 저절로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던 애슐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심장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가 없었고, 그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어서 빨리 와, 코이.

다시 아까 보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 전화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애슐리는 미소 띤 얼굴로 메시지를 확인했다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애쉬, 미안. 오늘은 연습할 수 없게 됐어.]

그는 차에 기대어 있던 몸을 세우고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가며 천천히 메시지를 읽었다.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먼저 가, 미안. -코이.]

한창 달콤한 상상에 빠져 있던 애슐리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점차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당혹감이 찾아왔다.

“이게 뭐야……?”

*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코이는 잠시 동안 자신이 쓴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 보려 해도 자꾸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눈앞이 흐려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최대한 간단히 써서 보낸 내용조차 다시 읽지 못하고 그는 휴대 전화를 꺼 버렸다. 애슐리가 다시 전화를 거는지 어쩌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까지 생각하기에는 이미 머릿속이 다른 것으로 꽉 차 버렸다.

불쌍해서였구나.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코이는 다리를 접어 끌어안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끄윽, 끄윽 소리 내어 울었다. 정신없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빠져나왔지만 그만 실수를 해 옆길로 새고 말았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으나 결국 자전거는 비탈길을 굴러 지면에 처박혀 버렸다. 그만 자전거와 함께 나동그라진 코이는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자전거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둘러보는 와중에 눈물이 터져 버려서, 그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잘 생각해 봐. 내가 오늘 너한테 뭘 해 줬고 왜 해줬을지.〉

애슐리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코이는 흐느끼며 그 말을 곱씹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 그런 거였구나.

끄으, 또다시 흐느낌이 올라와 그는 입술을 깨물어 거친 흐느낌을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동정이었어.

이제 확실히 알겠다. 자신이 어마어마한 착각을 했다는 걸. 애슐리가 그를 좋아할 리가 없는데, 어떻게 감히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었을까.

〈네 안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어.〉

그래, 알아. 전부 알고 있어.

그게 정답이었는데, 왜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던 걸까.

“좋아해…….”

코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아련하게 흩어졌다. 그제야 그는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던 진심을 간신히 받아들였다.

좋아한다. 애슐리 밀러를. 코너 나일즈 따위가.

어떻게 나 같은 게.

애쉬는 내가 불쌍해서 상대해 줬던 것뿐인데.

“으으으, 흐으으으…….”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졌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눈물이 내 안에 있는 걸까, 신기할 정도로. 아무리 울어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격한 흐느낌에 숨결이 넘어갈 것처럼 껄떡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코이는 헐떡거리는 숨을 간신히 몰아쉬며 고개를 젖혔다.

말하지 않길 잘했다.

그는 자신이 무리의 얘기를 엿듣게 된 것에 감사했다. 하마터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뻔하지 않았던가.

혹시 너, 날 좋아하는 거니?

라고.

만약에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애슐리는 얼마나 기가 막혀 했을까?

또다시 눈물이 나와 코이는 두 팔로 눈을 가렸지만 짓눌린 눈두덩에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저 동정했을 뿐인데,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감히.

코이의 머릿속에 애슐리가 그를 경멸하는 얼굴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래서 너 같은 애들은 상대해 주면 안 된다며 한심해했겠지.

“흐으으으…….”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그는 다시금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그 시각, 애슐리는 전원을 꺼 버린 코이의 전화에 답답해하며 그의 자취를 찾아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미 코이가 항상 자전거를 세워 놓는 곳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 고물 자전거를 타고 아무리 열심히 가 봐야 멀리 못 갔을 거라 판단한 그는 급히 자신의 카이엔을 몰고 도로로 나왔지만 코이와 닮은 뒷모습조차 찾을 수 없었다. 초조함에 욕설을 뱉으며 그는 코이를 찾아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코이가 흐느끼며 울고 있을 때, 차에 탄 애슐리는 그가 웅크려 있는 비탈 아래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쳤다. 그리고 애슐리는 금세 멀어져, 한참 만에 코이가 엉망이 된 몰골로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올라왔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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