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216)

56화

빌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애쉬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 우리도 같이 몰려다니는 것뿐이지만, 뭐. 코이 하나 더 낀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코이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숨을 억눌러 참고 그 자리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숨어 있는데,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맞아, 별로 말도 없고 있는 듯 없는 듯 하니까.”

“사실 우리가 코이 같은 애랑 같이 다니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하지.”

이어지는 말들은 하나같이 코이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하지만 알 리 없는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애쉬도 의외지 않아? 불쌍하다고 같이 다녀 주다니.”

“뭐, 좋은 녀석이니까 동정심이 생겼나 보지.”

“애쉬가 좋은 녀석이긴 한데 선은 분명하게 긋잖아.”

“코이가 그만큼 불쌍했나 보지, 선을 넘을 만큼. 사실이기도 하고.”

동정심. 불쌍해서.

선을 넘을 만큼.

코이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을 때였다. 갑자기 다른 음성이 끼어들었다.

“뭐가?”

애쉬.

코이는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모여 있던 녀석들도 당황한 듯 분위기가 달라졌다. 조마조마해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코이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애슐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코이는 불안함과 약간의 기대가 섞인 기분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애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건지도 몰라.

코이는 생각했다. 그냥 한 소리라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얘기였는데 이해를 잘못한 걸 수도 있잖아. 그래, 그럴 거야. 나도 말귀를 잘못 알아들을 때가 많으니까. 그런 실수는 누구나 하잖아. 그래.

코이는 간절한 마음으로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제발, 애쉬.

이어서 애슐리가 물었다.

“말해 봐, 모여서 무슨 얘길 하는 건데?”

애슐리는 모여 있던 무리를 바라보며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주춤거리는 녀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이 자식들이, 분명히 코이 이름을 말하는 걸 들었는데.

망설이던 무리 중에서 빌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네가 요즘 왜 이렇게 코이랑 붙어 다니나, 그 얘기 중이었어.”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자 재빨리 다른 녀석이 나섰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전에 애쉬가 말했잖아. 불쌍하니까 잘해 주라고.”

“맞아, 그래서 우리도 코이를 껴 준 거잖아. 안 그래?”

이 자식들이.

금세 고자질을 하는 녀석들을 기가 막힌다는 듯 한번 흘긴 빌이 다시 애슐리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그를 본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한 건 사실이긴 해.”

……뭐?

코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행여나 친구들이 오해를 한 건 아닐까 조금은 기대를 했었는데.

정말이었다고?

코이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애슐리가.

인정했어.

그렇게 말한 게 맞다고.

하얗게 질린 채 굳어 버린 코이의 귓가에 애슐리의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코이가 불쌍해서 잘해 주자고 얘기했던 건 맞는데…….”

애슐리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지만 코이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만약에 이 이상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도 애슐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면 도저히 그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코이는 다급하게 자리를 떠나 버렸다. 머릿속에는 무리가 떠들던 말들이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맴돌았다.

불쌍해서. 동정심 때문에.

눈물이 넘쳐흘렀다.

*

애슐리는 썩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건 예전 얘기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

“응? 정말?”

“무슨 얘기야?”

놀라는 반응에 애슐리는 다시금 풀어서 얘기했다.

“그러니까, 코이는 좋은 애라고. 그래서 친해진 거야. 얘기 나누는 것도 재밌고.”

친구 놈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애슐리의 진심을 의심하듯 쭈뼛거리며 그들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어…… 그래?”

“몰랐네, 네가 코이 같은 애랑 통하다니…….”

썩 달갑지 않아 하는 반응에 애슐리는 정색을 하고 당부했다.

“사실이야. 그러니까 너희도 이제 그 얘긴 하지 마.”

마지막 말에도 모두는 머뭇거리며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린 찰나, 갑자기 빌이 물었다.

“그것뿐이야? 코이가 좋은 애라서?”

“달리 무슨 이유가 또 있겠어?”

되물었던 애슐리가 덧붙였다.

“항상 날 볼 때마다 웃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긴 하지.”

그 말을 하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모두는 깜짝 놀랐다. 애슐리는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계속했다.

“웃으면서 귀를 움직일 땐 항상 얼굴이 빨개져. 코이 머리가 여기까지밖에 안 오는 거 알고 있어? 코이 머리숱이 많아서 위에서 보면 꼭 글로스터 카나리아 같다고. 거기다 항상 어딘가 뻗쳐 있어. 오늘은 이쪽이 뻗쳐 있던데, 얘기를 해 주려다가도 풀이 죽을 것 같아서 그냥 둬. 너희 본 적 없어? 정말로? 한 번도?”

말을 하는 동안 어느새 애슐리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를 안 지 오래되었지만 그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이라, 모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해하는 반응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빌이었다.

“아아, 알겠다. 귀여워서 좋아했던 거구나.”

갑자기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여워?”

돌연한 반응에 빌은 멈칫하고 말을 받았다.

“어…… 귀엽지 않아? 그, 되게 작은 동물들 있잖아. 꼭 그거 같던데. 뭐지, 햄스터라거나 줄무늬 다람쥐라거나.”

“맞아, 너도 그랬잖아, 글로스터 카나리아 같다고.”

다른 녀석이 재빨리 동조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솔직히 코이가 좋은 애가 아니었다면 절대 같이 안 다니지.”

다른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애쉬가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코이가 별로였으면 우리도 적당히 대해 주고 무시했을 거야.”

“사실 이 정도로 친해진 건 코이가 착해서니까.”

“귀엽기도 하고.”

“맞아, 맞아.” 하고 커다란 사내 녀석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귀 움직이는 거 대박이지? 나 TV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처음 봤다.”

“맞아. 그것도 그렇고 작아서 더 그런가, 귀여워.”

그들은 본인들의 덩치가 과하게 크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또래에 비해 조금 발육이 잘된 거라면 몰라도. 이어서 다른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작은 녀석들은 많은데 코이는 달라, 그렇지?”

“뭔진 몰라도 내 동생은 하나도 안 귀여운데 코이는 귀여운 걸 보면 다르긴 다른 거 같아.”

“네 동생은 너만큼 크잖아. 당연히 코이가 훨씬 귀엽지.”

“귀여워.”

“맞아, 귀여워.”

한결 편해진 분위기로 말을 주고받는 녀석들을 보면서 애슐리의 심기는 점점 더 불편해졌다.

저 자식들이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애슐리는 미간을 모으고 팔짱을 꼈다.

물론 코이는 귀엽지. 그만큼 귀여운 애는 없어. 세상에 귀여운 것들을 전부 다 모아 놔도 코이만큼 귀엽지 않을걸.

당연한 얘기였으나 애슐리의 심사가 꼬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런데 왜 너희들이 코이가 귀엽다고 떠들어 대는 거냐고.

“야, 야.”

먼저 분위기를 눈치챈 빌이 슬쩍 다른 녀석들에게 주의를 줬다. 그때까지 신나서 코이 에 대해 수다를 떨던 녀석들은 뒤늦게 불길한 공기를 읽고 입을 다물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등 뒤에서 느껴졌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 녀석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가 기겁을 했다.

애슐리가 팔짱을 끼고 서서 그들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지?

아무도 몰랐으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황급히 화제를 바꿔 말을 꺼냈다.

“야, 배고프지 않냐?”

“그럼, 물론이지. 그린 벨에 갈까?”

“그래, 일단 먹자. 죽을 거 같아. 애쉬, 너는?”

일부러 물은 말에 애슐리는 그제야 팔짱을 꼈던 팔을 풀고 평소처럼 표정을 되돌려 말했다.

“난 약속이 있어.”

“아, 그렇구나. 이런 시간에…… 여자 친구도 없는데, 약속은 있구나.”

쓸데없는 말을 덧붙인 친구를 팔꿈치로 세게 친 빌이 황급히 웃어보였다.

“그래, 애쉬. 그럼 내일 보자.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 우리도 어서 가자, 와, 진짜 배고파서 죽을 것 같다. 그렇지?”

뒤를 돌아보며 일부러 호들갑을 떨자 다른 녀석들도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애슐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

“잘 가, 애쉬.”

“내일 보자.”

애슐리도 손을 흔든 뒤 돌아서서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남은 무리는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다시 머리를 맞대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뭐야?”

“몰라, 저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어.”

“맞아, 저 정도로 화내는 건 저번에 경기할 때 상대방 녀석이 파울 한 건데 심판이 애쉬한테 경고 준 거 이후로 처음 봤어.”

“애쉬가 코이를 싫어하나?”

누군가 한 말에 곧바로 다른 녀석이 부정했다.

“아냐, 애쉬가 방금 그랬잖아. 코이랑 친해졌다고.”

“파티에도 안 불렀잖아.”

“아냐, 파티엔 애쉬도 없었어. 혹시 둘이 어디 갔었던 거 아냐?”

“설마, 아니 진찌야?”

“그건 잘 몰라도, 봐, 아까 애쉬는 분명히 코이를 감싸 줬잖아. 싫어하는 건 아냐, 절대.”

“그럼 대체 뭐지?”

분분한 의견 속에서 빌이 의문점을 정리했다.

“우리한테는 코이랑 사이가 좋아졌다고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코이에 대해서 좋은 얘기를 실컷 하더니 우리가 그걸 따라 하니까 싫어했단 말이야. 대체 왜 그랬을까?”

심각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는데, 한 녀석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나 저거 뭔지 알아.”

“뭐?”

“뭔데?”

다급하게 묻는 음성에 그는 비장한 얼굴로 답했다.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저래.”

“뭐야?”

“어디서 개소리야.”

여기저기서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진짜라니까. 자기 입으로 엄마가 얼마나 예쁘고 착하고 현명한지를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대 놓고 우리가 거기에 맞춰서 칭찬 몇 마디 하면 바로 돌변한다고. 너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면서. 아니, 우린 자식이라고.”

마지막엔 분통을 터뜨리는 그에게 다른 녀석이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설마 네 아빠는 너네가 자기 자식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야, 이 씨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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