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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216)

55화

평소처럼 모여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코이의 신경은 온통 애슐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다른 녀석들과 농담을 하고 웃고 떠들었지만 코이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가슴이 뛰고 신경이 쓰여서 도무지 뭘 할 수가 없었다. 마른 건초처럼 딱딱하고 질긴 햄버거를 다시 입에 넣는데, 빌의 음성이 귀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게시판에 애쉬 좋아한다고 남겼던 녀석, 결국 못 찾았지?”

헉.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킨 코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다른 녀석들이 말을 이었다.

“뭐 어디 사는 찌질이겠지. 우리 학교 애가 아닐 수도 있잖아, 애쉬는 워낙 유명하니까.”

“그건 그렇지.”

동의했던 녀석이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 녀석 분명히 오메가인 거겠지? 안 그러면 이상하잖아.”

“꿀꺽.”

이번엔 소리 내어 음료를 삼켜 버렸다. 하지만 신경 쓰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동성끼리 그러는 건 알파나 오메가니까 그러는 것일 테고, 베타는 그럴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돌아본 그에게 갑자기 애슐리가 이의를 제기했다.

“누구를 좋아하는 게 꼭 섹스를 원해서만은 아니잖아.”

그 말에 코이는 뚫어져라 애슐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슐리는 여전히 친구들을 보고 있었으나 코이는 왠지 그 말이 자신에게 한 것처럼 여겨졌다.

“어, 물론 그건 그런데.”

다른 녀석이 끼어들었다.

“그럼 애쉬 넌 누굴 좋아하면 섹스 안 해도 돼? 키스도 안 할 거야?”

“에에이, 퍽이나.”

“우우우, 애슐리 밀러어. 거짓마아알.”

엄지를 아래로 내려 야유를 하는 친구들의 반응에 애슐리는 피식 웃었다. 코이는 햄버거의 방향을 바꾸는 애슐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것을 입에 물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지. 지금도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는데.”

마지막 말을 마치며 갑자기 애슐리가 코이를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매와 어딘지 모르게 집요한 시선에 코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데, 모여 있던 녀석들이 앞을 다투어 고함을 질렀다.

“뭐?”

“뭐야?”

“지금 뭐라고?”

식당 안의 시선들이 그들에게 쏟아졌지만 모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애쉬를 닦달하기에 바빴다. 그것은 코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다르게 돌아갔다. 햄버거를 들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분명 배가 고픈데 가슴이 벅차 뭘 입에 넣고 싶지가 않았다. 코이는 반도 먹지 않은 햄버거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며 도통 입으로 가져가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녀석들은 애슐리에게 이것저것 물어 대기에 바빴다.

“뭐야, 너 새로 누구 사귀었어?”

“누군데? 언제? 언제부터?”

“와, 그런데 너 우리한텐 얘길 안 했어?”

“우리 학교 아냐? 네가 누구랑 같이 다니는 거 못 봤는데.”

“그렇지, 넌 요즘 코이랑만 다니고 있었잖아.”

그 순간 처음으로 모두의 시선이 코이에게 집중되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코이가 화들짝 놀라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아, 아니.”

“야, 너네 이번에 세인트 폴 고등학교 선수 리스트 봤어? 주장 바뀌었던데?”

갑작스럽게 빌이 화제를 바꿨다. 곧이어 대화는 그쪽으로 옮겨 갔고, 코이는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일 날 뻔했네.

다시금 슬쩍 애슐리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평범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자신에게 향했던 열렬한 시선이 떠올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애쉬는 항상 내게만 그런 눈을 하고 있었던 걸까.

“코이.”

식사가 끝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애슐리가 갑자기 코이에게 말을 걸었다. 방심하고 있던 코이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위기를 극복했다.

“어, 어어.”

황급히 몸을 바로 하고 고개를 들자 그를 붙잡으려 손을 내밀었던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혹시 지난번 일을 얘기하려고 하는 걸까? 이런 데서?

주변에는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소음이 스치고 있었다. 내심 조마조마해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오늘 두 번째 테스트가 있지? 끝나고 결과 알려 줘.”

“어? 어…….”

코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다. 오늘은 치어리딩 팀에서 두 번째 입부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애슐리가 한 말은 극히 평범했으나 코이는 오늘따라 다르게 들렸다.

〈끝나고 결과 알려 줘.〉

이 말은 혹시.

끝난 뒤에 내 마음을 알려 달라는 얘기일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올려다보자 애슐리가 다정하게 덧붙였다.

“열심히 해.”

코이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입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럴게.”

말하자, 오늘.

코이는 결심했다. 애쉬에게 물어보자. 날 좋아하느냐고. 만약에 내가 틀렸다고 해도 애쉬는 날 비웃거나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나는.

가슴이 떨려 코이는 더 이상은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

탁, 하고 박자에 맞춰 발을 멈추자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코이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보고 있는 여자애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중 가장 중심에 서 있는 여자애는 팀의 주장인 에리얼이었다.

평소처럼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미간을 모은 채 코이의 안무를 지켜보았다. 한 손으로는 다른 팔 위로 팔짱을 끼고, 남은 손으로는 입술을 문지르며 말이 없는 그녀를 코이는 내심 불안해하며 마주 보았다.

“흐음.”

한참 만에 에리얼이 운을 뗐다.

“나쁘지 않아. 아니, 확실히 좋아졌어.”

코이의 얼굴이 대번 밝아졌다. 에리얼은 여전히 엄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해. 이 정도로 우리 팀에 들어오다니 절대 안 될 말이야. 알겠지만 우린 버팔로 고등학교 치어리딩 팀이란 말이야.”

“으, 으응.”

다시 긴장한 코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얼은 자신의 뒤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말했다.

“우리도 여기까지 오는 데 엄청나게 노력했어. 너도 그런 각오를 하지 않으면 곤란해.”

“다, 당연하지. 열심히 할게, 아니, 최선을 다할게.”

코이는 이번에도 황급히 대답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나 애가 탔다.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가 손을 기도하듯 맞잡았을 때였다.

“코너 나일즈, 2차 테스트는 통과했어.”

“……!”

“하지만.”

코이가 기뻐 소리를 지를 뻔했을 때, 에리얼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네 몸 상태는 아주 심각해. 마른 건 좋지만 볼품없이 마른 건 곤란하다고. 넌 그 고릴라들이랑 같이 어울려 다닌 게 몇 달인데 아직까지 침팬지조차도 못 됐니?”

찡그린 얼굴로 팔짱을 낀 에리얼은 냉정하게 덧붙였다.

“본격적으로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체력관리를 엄격하게 해야 할 거야. 우린 절대 봐주지 않으니까 각오하라고.”

“응, 그럴게!”

“좋아.”

에리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널 우리 임시 부원으로 받아들일게. 축하해, 코너 나일즈. 앞으로 3개월 정도겠지만 열심히 따라와 줘.”

마지막 말을 한 에리얼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와 함께 주변에서 박수를 치며 코이에게 축하의 말을 했다. 코이는 바라던 결과에 기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만 벌리고 두 눈을 깜박이던 코이는 어렵게 더듬거리며 아이들에게 번갈아 인사를 했다.

“고, 고마워, 고마워. 나, 정말 열심히 할게. 고마워…….”

한참 인사를 나누고 난 뒤 코이는 처음으로 그들의 기초 체력 훈련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것은 에리얼의 말대로 지금까지보다 몇 배는 더 혹독한 것이었다.

*

하아아.

코이는 지친 걸음으로 휘청휘청 운동장을 걸어갔다. 항상 예쁘게 웃으며 바람처럼 가볍게 움직이던 여자애들이 뒤에서는 이렇게 가혹하고도 엄격한 훈련을 거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긴 그러니까 그런 동작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거겠지.

새삼스레 그들의 대단함을 깨달은 그는 곧 가슴을 폈다. 자신도 임시이긴 하지만 그 무리에 끼게 된 이상 폐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론 그건 자신 있었다. 코이가 가진 유일한 한 가지는 그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애쉬에게 이걸 얘기해 주고.

애슐리를 떠올리자 불현듯 발이 가벼워졌다. 물론 애슐리는 아주 기뻐해 줄 것이다. 자신의 기쁜 일을 함께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라는 걸 코이는 처음 알았다. 지금껏 쌓였던 피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몸이 가벼워져 그는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며 바쁜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 훈련이 끝났겠지.

다른 때라면 애슐리의 차에 가서 그를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조바심이 나서 그럴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코이는 곧바로 아이스링크로 향했다.

“어.”

오늘따라 훈련이 평소보다 일찍 끝났는지 저 멀리 항상 다니는 무리들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코이는 그들을 알은체하려다 괜한 장난기가 발동해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걸어갔다.

항상 자신을 놀라게 하는 애슐리를 이번에 자신이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큰 아이들 뒤로 숨으면 코이의 모습 따위는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슬그머니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코이는 무리 중에 애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 기쁨이 사라지고 마음이 텅 비어 버렸다. 애슐리는 어디 있냐고 물으려 입을 열었을 때, 그중 한 명이 말했다.

“요즘 애쉬가 많이 이상해지지 않았어?”

다른 녀석들이 동조하며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예전처럼 우리랑 놀지도 않잖아.”

“파티도 정작 자기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지?”

“앨이랑 헤어진 것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고.”

여기저기서 동의하는데, 곧이어 누군가 물었다.

“코이랑 친해지면서부터 그렇게 된 거 같지 않아?”

갑자기 나온 자신의 이름에 코이는 화들짝 놀라 급히 근처에 있는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등 뒤로 녀석들이 떠드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러고 보면 애쉬가 요즘 코이랑 유독 같이 붙어 다니지?”

“야, 그러고 보니까 아까 진짜 심장이 서늘해졌었다.”

“정말 코이는 아니겠지?”

곧이어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쏟아졌다. 코이는 얼굴이 새빨개져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어떡해, 다들 알고 있나 봐!

“설마, 그 녀석이 애쉬를? 감히?”

누군가 한 소리에 빌이 말했다.

“맞아, 애쉬는 코이가 불쌍해서 무리에 껴 주는 것뿐이잖아.”

……어?

코이의 두근거리던 심장이 갑자기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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