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뒤따라 애슐리의 말이 떠올랐다. 코이는 감았던 눈을 뜨고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았다. 애슐리의 말이 귓가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잘 생각해 봐. 내가 오늘 너한테 뭘 해 줬고 왜 해 줬을지.〉
그는 홈커밍 파티 티켓에 대한 답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코이가 눈치가 없어도 그걸 이 정도로 갚는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의미가 있다.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머릿속에는 하나하나 새록새록 기억이 되살아났다. 평소와 달랐던 애슐리, 왠지 그는 특별히 더 다정하지 않았던가?
부자니까.
코이는 문득 생각했다. 애쉬는 나와 다르게 부자니까 답례를 하는 것도 그 정도는 당연한 걸지도 몰라. 애쉬도 그랬잖아, 부자는 세금도 많이 내고 나 같은 가난한 애랑은 최선의 한계가 다른 거라고. 애쉬는 애쉬의 수준에서 나한테 보답한 건지도 몰라.
아냐.
즉시 그의 안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슐리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지금까지 한 번도 돈으로 잘난 체하거나 친구들에게 과하게 선심을 쓴 적은 없었어.
옷을 사 주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 입고 온 옷도 차도 평소와 달랐어.
꼭 데이트 같지 않아……?
〈네 안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어.〉
“으악!”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던 코이는 그대로 침대 위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대체. 그럴 리가 없잖아.
곧바로 부정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누군가를 사귀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코이라도 데이트가 어떤 것인지는 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답례라고 해도 오늘 한 건 너무 과하잖아.
그때,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난 그 녀석들을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한 번도 그렇게 가슴이 뛰고 부끄럽고 그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어.〉
……어?
〈오히려 기분 나쁘지, 그 시커먼 고릴라 같은 놈들한테 내가 그런다고 생각하면.〉
어어?
코이는 당황해 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자꾸만 머릿속은 위험한 상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말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지금 왜 갑자기 그 일이 떠오르지?
애쉬는 좋은 애지만 이렇게 아무한테나 넘치는 호의를 베풀진 않아.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그렇다는 건.
그렇다는…… 건…….
서서히 뇌가 정지한다 싶더니 얼마 뒤 심장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코이는 앉아 있던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가 그만 침대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악!”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졌던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아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서,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절대, 절대, 절대 없겠지만.
혹시, 정말 혹시…….
하지만 애슐리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분명히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는데. 다른 누굴 좋아하게 돼서 앨과 헤어졌다고.
……그럼.
그럼, 그 얘기는.
〈그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코이.〉
애쉬가 날 조, 조, 좋아…….
머릿속에서조차 차마 끝까지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는 급하게 시트를 뒤집어써 버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면 앞뒤가 맞았다. 난데없이 홈커밍 파티에 같이 가자고 한 것도 이상했는데.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말이 되잖아.
“정말인가 봐! 으아!”
심장이 무섭게 뛰어 대고 얼굴이 폭발하기라도 할 것처럼 열이 올랐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칠 것 같이 불안한가 싶으면서도 설레기도 하고 부끄러워졌다가도 가슴 벅차게 뿌듯해지고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마침 그때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코이는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여느 때처럼 잔뜩 취해서 돌아온 아버지가 또 술을 꺼내 마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그것조차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보다 몇 배는 더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웅크린 채 꼬박 밤을 새워 버렸다.
*
주말이 지나 학교에 가자 아이들은 온통 애슐리의 집에서 있었던 파티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코이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을 지나 항상 같은 곳에 자전거를 세워 둔 뒤 사물함으로 향했다.
“어, 코이!”
제일 먼저 코이를 발견한 빌이 팔을 흔들며 알은체를 했다. 뒤따라 모여 있던 녀석들이 고개를 돌리고, 그중 애슐리와 눈이 마주쳤다.
빌에게 덩달아 인사를 하려고 했던 코이는 순간적으로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어제 밤새워 떠올렸던 망상이 일시에 되살아났다. 그러자 곧바로 머릿속이 텅 비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못 본 체 달아나고 싶은데 이미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이 전부 다 그를 보고 있었다. 코이는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애슐리의 시선을 비껴가면서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처음 그를 알은체 했던 빌이 한 차례 코이를 훑어보더니 휙,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은 좀 많이 달라 보이는데? 야, 안 그래? 좀 멋있어 보이지 않아?”
“어, 정말 그러네.”
뒤따라 다른 녀석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오늘 코이는 큰맘 먹고 애슐리가 사 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왔다. 신발까지 새 것이었다.
코이는 쑥스러움에 시선을 피하며 어, 어 하고 대충 대답을 했다. 그러다 슬그머니 눈을 들자 또다시 애슐리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는데, 애슐리가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순간 멍해진 코이에게 그가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잘 어울려.”
“어, ……으, 으응.”
코이는 고작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부끄러워 도저히 그 자리에 서있는 게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달아나 버렸다.
다급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에 모여 있던 무리들은 곧 관심을 잃고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갔다. 그들 사이에서 애슐리는 여전히 허둥지둥 달려가는 코이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 채였다.
오늘 자신이 사 준 옷을 입고 온 코이는 너무나 귀여웠다. 보는 순간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퍼붓고 싶었을 정도로. 그나마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코이와 애슐리 사이에 거대한 고릴라가 다섯이나 장애물이 되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전부 다 사 줄 걸 그랬어.
코이가 부담스러워해서 피팅한 옷 중 몇 벌만 사 줬는데 이제 와서 후회가 됐다. 괜찮아, 애슐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자신이 사 준 옷을 입은 코이를 침대에 눕히고 한 겹씩 벗기는 상상을 하며, 애슐리는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하아, 하아.”
숨이 턱까지 닿도록 달려갔던 코이는 건물 벽 뒤에 몸을 숨기고서야 비로소 달리던 것을 멈췄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슐리를 본 순간부터 이미 심장은 혼자 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떠올리자 더 참을 수 없었다. 코이는 으으, 고통스러운 신음마저 흘리며 억지로 머리를 쥐어짰다.
설마 애쉬가 날 좋아하는 걸까?
밤새워 했던 고민이 또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애슐리는 분명히 말했다. 답은 코이 안에 있고 이미 그도 알고 있다고.
나한테 답은 이것밖에 없어, 애쉬.
코이는 떨리는 숨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상의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대형 사고를 쳐 놓고 게시판에 또다시 글을 남긴다는 건 머저리 천치나 하는 짓이다. 이번에는 운 좋게 넘어갔지만 다음엔 결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코이는 평생 다시는 인터넷에 글을 남기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 물어보자.
코이는 어렵게 결심을 했다.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혼자 아무리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는 애슐리만 아는 것이다.
코이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
점심시간이 되어 코이는 여느 때처럼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애슐리가 먼저 다른 녀석들과 함께 줄을 서 있었다.
“코이!”
손을 들어 알은체를 하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는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른 때라면 같이 손을 흔들고 반갑게 그를 향해 달려갔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괜히 못 본 척 딴청을 피우며 슬금슬금 걸어가 빌의 뒤로 몸을 숨긴 코이는 그제야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그냥 내버려 둘 애슐리가 아니었다.
“으앗!”
갑자기 팔이 잡혀 끌려가는 바람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자연스럽게 그를 품에 안은 애슐리가 머리 위에서 웃었다.
“거기서 뭐 해?”
“어, 어어, 그, 그냥.”
코이는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변명을 했다.
“그, 그늘이 시원해서.”
“어?”
“그래?”
“야, 빌. 너 살쪘냐?”
“아니거든! 이 새끼들이 진짜.”
평소처럼 막말 섞인 농담이 오고갔으나 코이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거라곤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을 울려 대는 맥박소리뿐이었다.
애슐리.
코이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정말로, 날 좋아해?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