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216)

53화

*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애쉬.”

코이는 길가에 서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트렁크에서 그가 산 몇 벌의 옷이 담긴 쇼핑백을 꺼내 주며 애슐리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

“응, 괜찮아. 바로 저기라니까. 가까워.”

코이는 황급히 덧붙였다.

“차가 들어가기엔 좁은 길이야.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아.”

그럼 같이 걸어서 바래다주면 되지만 코이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사코 거절하는 말에 애슐리는 더 이상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난 코이의 남자 친구가 아냐.

애슐리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아직 그는 친구일 뿐이다. 아직은. 그래서 일단 코이의 뜻대로 해 주었다.

“……그래.”

휴우.

무심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코이는 묵직한 쇼핑백을 두 손으로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라 주변은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시간은 꿈처럼 흘러갔다. 코이는 몇 번을 들락거리면서 그때마다 옷을 갈아입었다. 애슐리는 코이가 나올 때마다 셔츠 깃이 구겨졌다거나 바지 허리춤이 비틀어졌다거나 하며 목과 허리를 쓰다듬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더니, 급기야 나중엔 그가 갈아입는 걸 도와주겠다고 피팅룸에 들어오려 했다.

하지만 코이는 그것만은 마지막까지 거절했다. 피팅룸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참으로 볼품없었다. 그런 알몸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는 건 절대 싫었다. 설령 그 상대가 애슐리라고 할지라도. 아니, 애슐리라서 더욱 사양하고 싶었다. 누가 봐도 멋있는 몸을 가진 애슐리가 자신의 볼품없는 몸을 보면 얼마나 한심해할까. 이미 알고는 있겠지만 굳이 실물로 확인시켜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쇼핑을 마친 뒤 애슐리는 코이에게 홈커밍 파티용 슈트와 넥타이·시계에다 평소에 입을 옷가지까지, 여러 벌을 사 주었다. 코이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얼렁뚱땅 애슐리의 말에 넘어가 정신을 차려 보니 식당으로 가는 차 안이었다.

애슐리가 쇼핑 후 그를 데려간 곳은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나중에 검색해 보니 3개월 치 예약이 미리 다 차 버리는 엄청나게 유명하고 인기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상황은 여전했다. 영어로 쓰여 있는데 재료고 뭐고 도무지 무슨 요리인지 감이 오지 않는 이름들이 쓰여 있는 메뉴판을 그저 뚫어져라 보기만 하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사려 깊게 물었다.

〈내가 주문해도 될까?〉

물론 코이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음식을 즐기는 방법은 맛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 체질상 맛에 민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동안 음식이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해 왔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코이가 거기서 거기인 음식만 먹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또는 이런 게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음식과 물건은 코이를 온통 들뜨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디저트류였다. 사실 맛을 예민하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껏 대부분 비슷하게만 여겨졌다. 사실 그는 구두 밑창을 씹는 거나 질긴 스테이크를 씹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마카롱은 달랐다. 씹는 질감이 달랐고, 녹는 감각이 달랐으며, 무엇보다도 단맛이 느껴졌다. 그것도 평소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코이는 처음으로 ‘맛있다.’라는 말의 뜻을 실감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초콜릿도, 치즈케이크도 맛있었다. 코이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차가운 케이크의 부드러움에 흠뻑 빠져 버렸다. 애슐리가 주문한 코스 요리는 전부 다 먹지 못했지만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는 모두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애슐리는 직원을 불러 코이에게 디저트를 하나 더 줄 수 있는지 물었고, 덕분에 코이는 따뜻한 커피와 함께 디저트를 두 접시나 비웠다.

〈앞으로는 디저트류를 신경 쓰라고 할게.〉

빈 접시를 앞에 두고 행복해하는 코이를 보고 애슐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디저트를 거의 먹지 않기 때문에 코이는 애슐리의 집에서 이런 유의 단 음식을 먹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굳이 그런 수고를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코이는 황급히 거절했다.

〈아냐, 오늘 충분히 먹었어. 괜찮아.〉

〈나야말로 괜찮아.〉

애슐리가 말했다.

〈내가 너한테 해 주고 싶은 거니까.〉

테이블 너머에서 그렇게 말하고 미소 짓는 애슐리의 얼굴을 코이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또다시 가슴이 간질거리고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해졌다. 넓은 식당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의 시야에는 오직 애슐리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눈도, 귀도, 모든 감각이 그를 향해서만 열려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코이는 계속해서 의문을 가졌으나 집에 다다라서도 답을 찾지 못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애쉬.”

코이는 애슐리를 올려다보며 감사의 말을 했다. 그와 마주 선 애슐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코이.”

“응.”

즉시 대답하자 애슐리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즐거웠어?”

“응, 물론, 아주 많이.”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손을 뻗었다.

어.

커다란 손이 뺨에 닿았다. 밤공기는 차가운데 애슐리의 손이 닿은 피부만 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애슐리는 그런 코이를 보고 물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어?”

“……어?”

생각지 못한 질문에 코이는 눈을 깜박거렸다. 애슐리는 여전히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코이, 잘 생각해 봐. 내가 오늘 너한테 뭘 해 줬고 왜 해 줬을지.”

“…….”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피부 위를 덧그리듯 간지럽혔던 손이 부드럽게 뺨을 감싸 쥐었다. 코이는 떨리는 숨을 간신히 몰아쉬며 속삭이듯 소리를 냈다.

“……내가?”

“그래.”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에는 이미 답이 나와 있어.”

키스하고 싶은 것을 억눌러 참고 대신 애슐리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코이에게 안녕, 하고 인사한 뒤 그는 돌아섰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며 흘긋 룸미러로 뒤를 보자 아직 애슐리가 있는 쪽을 지켜보는 코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애슐리는 다시 차에서 내려 그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은 자신을 외면하고 대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고백하자.

텅 빈 거리를 필요 이상의 속도를 내어 달려가며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을 홈커밍 파티 때로 정했다. 코이를 마중 가서 함께 파티에 가야지. 춤도 추고, 맛없는 펀치볼도 마실 것이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되면 그때는 코이를 학교 뒤의 가로수 길로 데려가야지. 거기서 말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너라고.

지금까지 다른 여자 친구와의 관계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시작됐고 자연스럽게 끝났다. 먼저 사귀자는 말도 없었고, 좋아한다는 말은 서로 하면서도 이렇게 가슴이 타는 것처럼 그립고 심장이 뛰는 경험은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는 코이에게 고백할 것이고, 나와 사귀어 달라고 간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코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열심히 귀를 파닥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그리고 내게 말할까.

나도 좋아해, 라고.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애슐리는 입 밖으로 그만 앓는 것 같은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코이, 어서 깨달아 줘.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코이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애슐리는 뜨거운 한숨과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빨리 널 안고 키스하게 해 줘.

*

서둘러 집에 왔을 때는 다행히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코이는 불 꺼진 모터홈에 조심조심 들어가 안의 전구를 켰다. 어둑한 실내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우선 가져온 짐을 숨길 곳을 찾았다. 모터홈은 좁아 터져서 물건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낮은 침대 프레임 아래에 놓아둔 낡고 찢어진 옷상자를 꺼내고 대신 쇼핑백을 집어넣었다. 그 앞을 다시 옷상자로 가려 놓으니 그것은 수상할 정도로 밖으로 불쑥 튀어나와 버렸지만 괜찮다.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제대로 집 안을 살피지 않았다. 짐이 줄거나 늘거나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코이는 대충 정리를 끝낸 뒤 후, 한숨을 내쉬고 급히 몸을 씻었다. 입고 온 옷을 정성스레 접어 다른 옷들과 함께 꽁꽁 숨겨 둔 그는 평소 입고 자는 오래된 셔츠와 구멍 난 트레이닝복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고요가 찾아오고 나자 오늘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가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방금 전까지 꿈을 꿨던 건지도 몰라.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침대 밖으로 몸을 내민 자신의 옷상자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은 그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코이는 벅찬 가슴을 다독이느라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옆으로 돌아누웠다. 가슴이 콩닥거리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날이 다 있을까.

입 안에 아직도 디저트의 차갑고 달콤한 감각이 남아 있는 듯했다. 눈을 감고 기억을 되살렸던 그는 곧 자연스럽게 의문을 떠올렸다.

오늘 애슐리가 나한테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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