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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216)

51화

애슐리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아주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듯이.

“안전벨트를 제대로 매야지.”

그때까지도 코이는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어, 어어?”

애슐리가 싱긋 웃었다.

“사고가 나면 큰일이니까.”

“어…….”

코이는 멀뚱멀뚱 애슐리가 그에게서 몸을 떼고 자세를 바로 하는 걸 지켜보았다.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애슐리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코이는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곧이어 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놀라 자신도 모르게 두 뺨을 찰싹찰싹 연달아 때렸다.

“코이? 왜 그래?”

당황한 애슐리가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 코이의 손을 붙잡았다.

“뭔데? 왜 그러는 거야?”

“어…… 어, 어.”

코이는 얼얼한 뺨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저기, 그냥, 저기.”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 그는 간신히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냐. ……미안.”

그랬는데도 애슐리는 잠시 동안 코이의 손을 잡고 흘긋거리며 얼굴을 살폈다. 진지하게 상태를 확인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보아 코이를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어서 상황을 바꿔야 돼.

코이는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려 화제를 떠올렸다. 그때, 기적처럼 가게의 손님이 떠올랐다. 그렇지.

“저기, 이 차 이름이 뭐야?”

제발 애슐리가 넘어와 주기만 바라며 코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다행히 애슐리는 주저하지 않고 걸려 주었다.

“애스턴 마틴.”

그는 이제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이런 날 밴을 타긴 그렇지.”

다행이다.

코이는 내심 안도하며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물었다.

“아버지 오셨어?”

“아니, 차고에 있던 거야.”

이번에도 무심히 돌아온 대답에 코이는 잠깐 그의 집을 떠올렸다. 항상 닫혀 있던 거대한 차고의 문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 안에 이것 말고도 다른 차가 더 있겠지.

“차가 많아?”

몇 대나 있는 걸까? 이젠 호기심이 생겨 물어보자 애슐리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에 보여 줄게.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같이 타고 드라이브하자.”

“정말?”

“그래.”

선뜻 대답한 애슐리가 차선을 바꾸며 물었다.

“좋아하는 차 있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코이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어…… 재규어?”

사실 그가 아는 비싼 차 이름은 그것뿐이었다. 동물 이름이 아니었다면 그나마도 외우지 못했을 것이다. 내심 가슴을 콩닥거리는데,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애슐리가 그렇구나, 하고 말했다. 후,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 애슐리가 또 물었다.

“모델은?”

“어…….”

이번에야말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뭘 알아야 임기응변이라도 발휘할 텐데 쥐뿔도 모르니 할 말이 없는 건 당연했다. 코이는 빈약한 지식을 쥐어짜 간신히 대답했다.

“그냥, 클래식 카…….”

작게 기어들어 가는 음성에 애슐리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다음엔 그걸 가지고 올게.”

응, 하고 안도감에 고개를 끄덕였던 코이는 뒤늦게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재규어도 있어?”

“거기 글로브 박스 안에 있는 물 좀 줄래?”

갑자기 애슐리가 코이의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코이는 그의 손이 가리킨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황급히 글로브 박스를 열어 생수를 꺼냈다. 그대로 애슐리에게 건네주려던 코이가 멈칫하고 물었다.

“뚜껑 열어 줄까?”

“고마워.”

애슐리의 대답에 코이는 기뻐하며 페트병의 뚜껑을 땄다. 자, 하고 건네주자 애슐리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병째로 벌컥거리며 물을 마셨다.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며 컵홀더에 반쯤 남은 생수병을 내려놓는 그를 보던 코이는 차가 프리웨이(* 한국에서의 고속 도로의 일종)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멀리 가는 거야?”

기껏해야 옆 동네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던 코이는 깜짝 놀랐다. 애슐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시간? 1시간 반?”

“그렇게나?”

그 정도 거리라면 도심으로 가는 것이다. 대체 어딜 가려는 걸까. 코이는 내심 불안했지만 애슐리를 믿고 자신을 다독거렸다.

애쉬가 나한테 나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슬쩍 휴대 전화를 꺼내 자신이 있는 위치를 확인한 코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라 이 방향으로 가면 뭐가 나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답을 찾지 못해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코이의 심각한 모습에, 애슐리는 자꾸만 허물어지는 입가를 억지로 내리눌렀으나 쉽지 않았다.

코이, 넌 정말 너무 귀여워.

하루 종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이의 온몸을 깨물고 핥는 상상을 하자 저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핸들을 붙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그는 일부러 음악을 틀었다.

[네 XX를 내 XX에 넣어 흠뻑 젖은 XX를 빨아.]

하필이면 처음 나온 음악이 온갖 성행위를 나열한 천박한 가사로 유명한 인기곡이었다. 애슐리는 곧바로 버튼을 눌러 꺼 버렸다.

차 안에는 삽시간에 고요가 찾아왔다. 코이도 애슐리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흘긋 코이 쪽을 본 애슐리는 그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걸 확인하고 급히 헛기침을 했다.

“코이, 배 고프지 않아?”

“어? 어어?”

코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애슐리는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조금만 참아. 먼저 여길 들렀다가 식사를 하러 가자. 간단한 간식 정도는 여기서도 먹을 수 있을 거야.”

“어…… 그래.”

코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어 댔다. 몹쓸 노래 때문에 잠시나마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을까.

다시 떠올려도 부끄럽고 얼굴이 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애쉬가 내게 키스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애쉬가 알면 기가 막혀서 화를 낼지도 몰라.

그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애꿎은 휴대 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제발 이 심장 소리를 애쉬가 듣지 못하게 해주세요.

*

우와아…….

프리웨이를 빠져나와 일반 도로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장소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깨끗하고 화려한 거리에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 수시로 오고 갔고, 줄지어 서 있는 가게는 하나같이 깔끔하면서도 화려한 디자인이 가득했다. 하다못해 무수한 사람들이 밟고 가는 길바닥마저도 반짝거리며 윤이 났다. 코이는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애슐리가 차를 세운 것은 그중 한 가게의 앞이었다. 어째선지 다른 가게와 달린 진열창에 차양이 내려져 있는 모습에 의아해하는데, 먼저 차에서 내린 애슐리가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자신이 그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코이는 허겁지겁 차에서 내려섰다.

“고, 고마워.”

“천만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애슐리가 코이의 등을 감싸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들어가자.”

“어? 어, 어.”

코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을 커다란 경호원이 지키고 서 있었는데, 그들을 보자마자 그는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애슐리와 코이를 번갈아 보며 미소까지 지었다.

코이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애슐리에게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애슐리에게 뭔가 살 게 있는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밀러 씨. 어서 오세요.”

밀러 씨?

코이는 매장 안에 들어가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세련된 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작 고등학생한테 ‘씨’를 붙여 부르다니.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여성을 마주하는 애슐리의 태도였다.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가볍게 악수를 나눈 애슐리는 곧 고개를 돌려 코너를 가리켰다.

“이쪽은 제 친구 코너 나일즈입니다. 코이, 가까이 와.”

당황해 눈만 깜박이고 있는데, 코이에게 시선을 향한 그녀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일즈 씨. 전 조애나 몬다비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들 나이의 애들에게 ‘씨’라는 호칭을 붙이는 사람은 학생들 사이에서 고리타분한 노인네라고 비웃음을 당하는 역사 선생밖에 없었다. 물론 코이는 그를 신사라고 생각했고, 그가 자신을 부르는 ‘나일즈 씨’라는 호칭이 무척 좋았지만 이렇게 밖에서 그런 호칭을 듣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멀뚱멀뚱 서 있는데,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조애나가 먼저 몸을 돌려 그들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미리 연락해 주셔서 제품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다음엔 저녁 식사를 하러 가신다죠? 아, 그 레스토랑은 아주 유명하죠. 역시 좋은 곳을 선택하셨군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럼 보시는 동안 간단한 음료와 다과를 준비해 드릴까요?”

막힘없이 줄줄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 가는 그녀의 솜씨에 코이는 또 한 번 감탄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마다 모두 번쩍거리고 화려하기만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는 직원들조차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멋있고 세련된 사람들뿐이었다.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던 코이는 조애나가 가리킨 소파를 보고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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