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216)

49화

“음음음, 음음음음.”

콧노래를 부르며 진열장을 정리하는 코이를 마침 가게 안에 있던 손님이자 가게 주인의 친구인 남자가 수상하게 지켜봤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

“네? 아뇨, 왜요?”

팔짱을 낀 손님이 한 손을 풀어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계속 웃고 있잖아. 노래까지 부르면서.”

“제가요?”

“그래.”

손님은 코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얼굴에 고정했다. 수상하다는 듯이. 하지만 코이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그의 뒷모습을 손님은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10분 남았다.

코이는 흘긋 시계를 훔쳐보고 펄쩍 뛰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는 단 1분도 먼저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었고 오히려 항상 초과 근무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에 가게를 닫는 시간은 10시지만 가게 문을 닫은 뒤 정리하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나면 아무리 빨라도 1시간은 족히 걸렸다.

끝날 시간이 가까워져서 미리 청소나 쓰레기 정리를 하면 그때마다 꼭 문을 닫기 직전에 사람이 와서 가게를 더럽히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했다. 거기다 미리 청소와 정리를 하고 있으면 손님이 들어오기 부담스럽다고, 끝난 뒤에 하라고 잔소리를 듣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을 꽉꽉 채운 뒤에야 마무리를 했다.

요즘은 그나마 스케이트 연습 때문에 평일 아르바이트를 쉬고 있는데, 대신 토요일이면 전날 해 놓지 않은 청소와 쓰레기 정리를 먼저 끝내야 해서 정해진 시간보다 최소 1시간은 일찍 와야 했다.

물론 추가 수당 같은 건 없었지만 코이는 묵묵히 가게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니까.

이제 5분.

곧 애쉬를 만나.

기쁨을 참지 못하고 귀를 쫑긋거렸을 때였다.

“너 대입 시험은 봤니?”

갑자기 손님이 말을 걸었다. 코이는 멈칫했다가 작게 우물거렸다.

“아, 네…… 뭐…….”

“그래? 점수는 얼마나 나왔어?”

“……잘, 못 봤어요.”

대충 얼버무리려 했으나 그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몇 점이냐고.”

“어…….”

코이는 이렇게 밀어붙이는 데는 한없이 약했다. 결국 주눅이 들어 솔직히 털어놓자, 그때까지 매섭게 눈을 부라리고 있던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렇구나, 못 보긴 했네.”

주인의 친구인 그는 코이와 같은 학년인 아들이 있었다. 그는 종종 찾아와 자기 자식과 코이를 비교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곤 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코이를 시종일관 무시했는데, 우연히 코이가 자신의 아들과 같은 학년에다가 성적이 더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태도가 돌변했다.

처음엔 은근슬쩍 그의 점수나 공부하는 법을 알아내려고 하더니 어느 날부터 노골적으로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점수를 물어보는 건 흔한 일이라 만약에 대답을 안 해 주면 해 줄 때까지 들러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자기 아들이 코이보다 점수가 좋았는지 기분이 좋아진 그가 계산대 위에 물건을 올려놨고, 매대를 정리하던 코이가 황급히 그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갑자기 종소리가 들리고, 순간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코이는 어, 하고 그대로 멈춰 버렸다. 계산대 앞에 서있던 손님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머리를 숙여 문을 지나온 그가 허리를 쭉 펴자 그리 크지 않은 가게 안이 꽉 차는 듯했다.

손님은 목을 빼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게 안을 휘 둘러보더니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까지 놀라서 보고 있던 코이가 뒤늦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애쉬?”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가 웃음을 지었다.

“코이.”

손님은 황급히 애쉬와 코이를 번갈아봤다. 코이에게 이런 지인이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이. 그런 그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애쉬는 선뜻 걸음을 옮겨 성큼성큼 코이에게 다가갔다.

“끝날 시간이지? 데리러 왔어.”

“어, 그렇긴 한데…….”

아직 2분이 남아 있었다. 코이의 시선을 따라 벽의 시계를 돌아본 애슐리가 싱긋 웃었다.

“다 됐네. 기다릴게.”

“어, 어.”

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올려다봤다. 저절로 입가가 허물어졌다.

“고마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래.”

선뜻 대답한 애슐리를 뒤로하고 코이는 서둘러 계산대로 향했다. 그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애슐리를 보고 있던 손님이 물었다.

“뭐야, 쟤는? 아는 사람이야?”

“네? 네.”

코이는 무심코 대답했다가 곧이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음 말을 하기 전에 그는 먼저 심호흡을 해야 했다.

“제 친구예요.”

“뭐? 친구?”

손님이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다시 애슐리를 돌아보았다. 애슐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 코이가 정리하던 매대를 보고 있었다. 때마침 그가 고개를 들고,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손님은 화들짝 놀라더니 허겁지겁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괴, 굉장히 크구나. 같은 학년이니?”

“네, 저희 학교 아이스하키 팀 주장이에요.”

“뭐…….”

코이가 비닐봉지에 담은 물건을 내밀었지만 손님은 그걸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높아진 음성으로 외쳤다.

“쟤가 그 애야? 애슐리 밀러? 그, 대입 시험 만점에 전 과목 AP 수업을 듣는다는.”

“네, 맞아요.”

코이는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의 컨트리에 살아요.”

“허…….”

손님은 복잡한 표정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더니 맥없이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계산을 끝낸 코이가 카드를 돌려주자 물건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돌아선 손님이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저기, 얘야.”

조심스러운 말투는 코이에게 말을 걸 때와는 전혀 달랐다. 휴대 전화를 보고 있던 애슐리가 고개를 들자 그는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저 차, 네 거니?”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렸던 애슐리가 대답했다.

“아뇨.”

“그, 그래?”

손님의 표정이 풀어졌을 때였다. 애슐리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아버지 거요.”

손님은 아무 말 없이 애슐리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코이가 당황해하며 둘을 번갈아 보는데, 때마침 애슐리의 휴대 전화에서 알람 소리가 울렸다.

자신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본 애슐리가 반대로 화면을 돌려 손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영업 끝났네요, 아저씨.”

코이가 급히 휴대 전화를 확인하자 정각 6시였다. 손님은 황급히 달아나듯 나가 버리고, 금세 가게 안에는 단둘이 남았다. 애슐리는 선뜻 코이가 서 있는 계산대로 걸어와 물었다.

“이제 끝났지? 어서 가자.”

“어, 어어.”

얼떨결에 대답을 했던 코이는 뒤늦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는 아직 꾀죄죄한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청소야 내일 아침에 와서 하면 되지만 옷은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게 됐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6시 10분에 만나기로 했잖아.”

“그냥.”

애슐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빨리 보고 싶어서.”

그 말에 저절로 코이의 입이 벌어지며 헤헤, 웃고 말았다. 애슐리 또한 마주 웃더니 코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나와.”

“응.”

선뜻 그의 손을 잡으려 했던 코이는 직전에 움칠하고 멈췄다.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고, 그걸 본 코이는 당황해 서둘러 말했다.

“자, 잠깐만. 5분만 기다려 줄래? 유니폼 좀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 저기, 어딘지 몰라도 이걸 입고 가는 건 좀…….”

우물쭈물 시선을 내리자 애슐리 역시 그를 따라 눈길을 향했다. 잔뜩 구겨진 데다 군데군데 오래 된 얼룩이 배어 있는 더러운 유니폼은 입고 있는 사람을 더욱 볼품없어 보이게 했다.

하지만 지금 애슐리 앞에 있는 건 코이였다. 그는 코이가 쓰레기 봉지를 입고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안 입는 게 가장 좋겠지만.

“괜찮은데?”

애슐리의 말에 코이는 기뻤으나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가로막았다. 애쉬는 친구니까 저렇게 말해 주는 거야. 되는대로 믿고 애쉬를 곤란하게 하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몸을 숙였다. 피할 틈 없이 코이의 팔을 붙잡은 그는 그대로 목에 코를 묻었다. 쓰읍, 크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바로 코이의 귓가에서 들렸다.

갑자기 눈앞에 별이 뜨고 심장이 무섭게 뛰어 댔다. 애슐리의 숨결이 피부에 닿자 그곳만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저릿거리고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속삭였다.

“아, 냄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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