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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216)

45화

곧바로 손을 뻗어 다시 코이를 안아 자신의 품 안에 가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그는 일부러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그래서.”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이번엔 왜 달아난 거야? 또 사춘기라서야?”

“아, 아니.”

코이는 고개를 저었으나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필 바로 애슐리와 마주치다니. 그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발각될 줄은.

심장이 계속 두근두근 뛰어 댔다. 슬그머니 훔쳐보니 때마침 애슐리가 바지 주머니에서 손을 빼 팔짱을 꼈다. 그걸 본 순간 코이는 사색이 되어 버렸다.

어떡해, 나한테 화가 났나 봐. 당연하지, 사람을 보자마자 도망가 버리면 누가 좋아하겠어.

잔뜩 기가 죽어 있는데, 그런 코이를 내려다보며 애슐리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끌어안고 싶다.

주머니에 넣었음에도 당장 뻗어 나가려는 손을 막느라 그는 팔짱까지 꼈다. 하지만 이 긴급 조치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빨리 이 상황을 끝내야 했다.

“코이.”

애슐리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자 머리 위에서 깊은 숨소리가 들렸다.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코이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애슐리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히익!”

“어딜.”

자신도 모르게 물러서려는 코이의 양팔을 붙잡아 고정한 애슐리가 웃었다. 코이는 꼼짝도 못 하게 붙들린 채 애슐리의 얼굴을 마주 봤다. 불안해했던 것과 달리 애슐리는 전혀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코이를 향해 평소처럼 웃고 있는 걸 보자 조금씩 불안이 사그라들었다.

괘, 괜찮은 건가……?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는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난 화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다정한 음성은 진심인 듯했다. 여전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코이 역시 얼굴이 풀어졌다. 그리고 긴장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기쁨이 찾아왔다.

애쉬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까딱거리는 귀를 깨닫고 코이는 황급히 그것을 붙잡았다. 곧이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앞으로 절대 귀를 움직이지 말자고 어제 그렇게 다짐해 놓고 또 버릇이 튀어나왔다. 애슐리의 얼굴을 본 순간 반갑고 기뻐서 저절로 귀가 움직여 버린 것이다.

어떡해!

부끄러워 미치겠는데 애슐리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코이는 그만 울상이 되어 버렸으나 애슐리는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워 당장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어졌다.

코이, 어째서 넌 이렇게 귀여운 거야?

애슐리는 두 손으로 귀를 꼭 쥐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코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아해, 코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눈앞에 상대를 두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끌어안고 싶어. 저 귀를 깨물고 싶어. 저 입술에 키스를 하면 얼마나 달콤할까?

애슐리는 탄식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심호흡을 하고 자신을 진정시키는 대신 손을 옮겨 코이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코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애슐리의 머릿속에 위험한 충동이 자리 잡았다.

아, 이대로 코이를 잡아다 내 방에 가둬 버리고 싶다.

“수업 시간에 늦겠어, 코이.”

범죄자가 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애슐리는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코이가 아, 하고 눈을 깜박였다.

“미, 미안.”

허겁지겁 돌아선 그를 큰 보폭으로 단번에 따라잡은 애슐리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어젠 잘 들어갔어? 별일 없었고?”

“어, 응.”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코이는 또다시 가슴이 콩닥거렸다. 애쉬도 그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을 볼까? 혹시 내 글도 봤을까? 아냐, 애쉬같이 잘나가는 애들은 그런 거 안 한다고 들었어. 하긴 친구도 많고 공부도 해야 하고 아이스하키 팀 주장이기까지 한데 그런 거에 들어가서 노닥거릴 틈이 어디 있겠어?

만약에 그걸 봤다면 이렇게 나한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지 않았을 거야.

코이로서는 제법 그럴듯하면서도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린 셈이었다. 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코이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애쉬.”

“응?”

즉시 돌아온 물음에 코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넌 저기, 과제 할 때 어떻게 해? 저기, 인터넷 같은 거, 어디 물어보고 그러는 사이트 있잖아. 그런 데 들어가서 보고 그래?”

이런 걸 유도 신문이라고 하고 있는 걸까.

애슐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으나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니, 난 전문 사이트 아니면 안 들어가.”

“그, 그래?”

코이가 반색을 하더니 또다시 불안스러워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저, 게시판 같은 데 있잖아. 고민 글 올리고 그러는 데. 그런 데도 안 가?”

“안 가.”

애슐리는 주저 없이 말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에 거리낄 게 없었다.

“난 그런 사이트는 안 들어가. 그런 글 읽는 것도 재미없고.”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코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물어보길 정말 잘했다. 이제 완전히 마음 놓을 수 있겠어. 휴, 막혔던 숨을 그제야 내쉬었을 때였다. 문득 새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애슐리의 휘파람 소리였다. 코이는 휘파람을 불며 걷고 있는 애슐리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기분 좋아 보이는데.”

“응? 아니, 별로. 똑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애슐리는 활짝 웃었다. 코이는 어리둥절해하며 그래, 하고 넘어갔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왤까, 애슐리는 항상 웃고 있는데 오늘은 유독 더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생각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코이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겁이 나서 지금껏 댓글을 한 개도 못 보고 있었다. 덕분에 고민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고, 상담할 상대 또한 여전히 없었다. 유일한 친구이자 고민의 당사자 말고는.

만약 애쉬한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코이는 다시 애슐리를 올려다보았다. 말을 건 것도 아닌데 애슐리가 그를 내려다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번에도 웃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코이는 흠칫 놀라 고개를 다시 돌려 버렸다.

못 해, 절대로.

코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생각했다.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그것도 본인한테. 절대로 말도 안 돼.

애슐리가 그 게시물을 못 봤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해야 한다. 하물며 자기 입으로 물어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앞으로도 애쉬가 그 글을 영영 못 보게 해 주세요.

마음속으로 빌고 있는 그의 옆에서 애슐리는 여유 있게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먹어 버리고 싶다.

라고.

*

역시나 학교는 게시물에 대한 이야기로 여기저기 들끓고 있었다. 당연하다. 글의 내용이야 흔하게 볼 수 있는 시답잖은 것이었지만 그 대상이 문제였다. 교내의 슈퍼스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고백 글은 한창 혈기가 넘치는 고교생들에게 놓칠 수 없는 가십이었다.

“야, 너네들 그 글 봤냐? 게시판에 올라온 거, 그거.”

“컥.”

점심시간에 모여 앉자마자 다짜고짜 빌이 꺼낸 말에 먼저 물을 마시던 코이는 그만 크게 사레가 걸려 버리고 말았다.

“코이, 괜찮아?”

애슐리가 의아해하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코이는 기침을 하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

“괘, 괜찮, 그냥 물이, 쿨럭.”

계속해서 기침을 하는 코이를 한동안 바라보던 녀석들이 다시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봤어, 그거 애쉬 맞지?”

“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나도!”

“애쉬지, 뭐. 아예 대놓고 ‘애슐리 밀러’ 떡하니 박아 놨더라 아주.”

“대체 누구야? 애쉬랑 친한 애 중에 누구 생각나는 애 없어?”

코이는 가슴을 졸이며 햄버거의 종이를 벗겼다. 물론 온통 귀 쪽으로 신경이 몰려 배가 고픈 것도 느끼지 못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하려고 했을 때, 별안간 한 녀석이 소리쳤다.

“설마 코이인 건 아니겠지?”

순간 코이는 숨이 멎을 뻔했다. 삽시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갑자기 애슐리가 물었다.

“너희들 내일 우리 집 올래?”

“뭐?”

“내일?”

그들의 화제는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코이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깜박이며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애슐리는 그런 코이를 내버려 둔 채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에게 말했다.

“주말이잖아. 훈련도 없고, 어때?”

“좋지!”

“당연히 좋지, 말이라고!”

“야야, 여자 친구랑 가도 되지? 어?”

여기저기서 신이 나 떠들어 댔다. 애슐리는 여전히 그들을 바라보며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오고 싶은 녀석들 있으면 다 오라고 할까? 어때?”

“어? 그래도 돼?”

“너네 집 게이트 있잖아.”

타당한 의문이었으나 애슐리에겐 별것 아닌 문제였다.

“컨트리 부지 한쪽에 파티를 열 수 있는 공용 공간이 있어. 야외 풀도 있으니까 거길 사용하면 돼. 그쪽 출입구는 출입 절차도 간단하고.”

“아, 좋네, 그럼.”

“그러면 많이 갈 수 있겠다.”

“이걸 어떻게 알리지? 그냥 친구들한테 말해?”

이어서 나온 문제를 애슐리는 이번에도 간단히 처리했다. 미소를 지으며.

“게시판에 올리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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