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코이?”
애슐리가 즉시 반응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얼굴이 빨갛잖아.”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애슐리가 코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바람에 안 그래도 시야에 꽉 차 있던 그의 얼굴이 급기야 코이의 정신을 완전히 빼놓은 것이다.
“코이, 괜찮아? 병원에 갈래?”
숨까지 거칠어진 코이의 반응에 애슐리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 뺨에 닿는 순간 코이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안 돼! 애쉬가 날 만지기까지 하면 난 죽을 거야, 정말로 죽어 버릴 거라고!
위기감이 온몸을 덮치고, 머릿속에 요란한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차창에 바짝 몸을 붙인 채 자신을 바라보는 코이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고 애슐리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역시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
“뭐? 아, 아냐.”
곧바로 차의 시동을 거는 애슐리의 모습에 코이가 뒤늦게 소리쳤다.
“난 괜찮아, 아프지 않아!”
“무슨 소리야, 얼굴이 새빨간데. 열이 오르고 있는 거라고.”
“정말이야, 괜찮다니까! 그, 그냥 바람만 좀 쐬면 돼, 정말이야!”
난 보험도 없어!
코이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현실의 위기감 때문인지 상기되었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코이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불안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듯.
하아.
결국 애슐리가 한숨을 내쉬고 한발 물러났다.
“알았어, 일단 나가자.”
차를 출발시키는 그의 옆얼굴을 조마조마해하며 바라보던 코이가 저기,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창문 좀 열어도 될까? 더워서…….”
일부러 창문 버튼을 눌렀지만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다. 문과 마찬가지로 열리지 않는 창을 가리킨 코이에게 애슐리는 흘긋 시선을 향하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센터의 버튼을 눌렀다.
에어컨이 켜지고, 금세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왔다.
*
차의 문이 열린 건 애슐리가 사는 저택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차고 앞에 주차를 시킨 뒤 애슐리가 운전석 쪽 문을 열자 잠겨 있던 조수석의 문도 동시에 열렸다. 코이는 눈치를 보다 애슐리가 먼저 차에서 내린 뒤에 따라 내렸다.
더 이상 코이가 달아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애슐리는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코이는 주눅이 들어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애슐리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스낵바에 코이를 앉힌 후였다.
“테스트는 어떻게 됐어? 합격했어?”
콜라와 컵을 놓아주며 꺼낸 말에 코이는 깜짝 놀랐다.
“앨한테 듣지 않았어?”
결과를 모르고 있었다고? 그럼 왜 날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코이는 어리둥절했지만 그의 반응에 이번엔 애슐리가 놀랐다.
“앨이라고? 왜?”
미간을 찌푸린 그를 보고 코이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저기, 그게.”
애슐리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뭐지? 저 표정은? 코이는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저, 난 둘이 화해한 줄 알고…….”
“아냐, 코이. 네가 잘못 생각했어.”
애슐리는 정색을 하고 그의 말을 부정했다.
“우린 완전히 끝났어. 다시 시작할 일은 없을 거야.”
“어…….”
나란히 걸어오는 둘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별의별 생각을 다 했는데 지금 보니 전부 다 코이의 망상이었다. 애슐리는 정말로 코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코이는 뒤늦은 부끄러움에 서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랬구나, 하고 작게 중얼거리자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응시했다. 할 말 있으면 다 하라는 듯이. 코이는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왜 그렇게 된 거야?”
애슐리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코이는 그가 대답을 회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이번에도 틀렸고, 애슐리는 입을 열었다.
“내가.”
그는 변함없이 코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거든.”
뭐?
뜻밖의 말에 코이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에 애슐리가 다시 말했다.
“내가 다른 누구를 좋아하게 됐다고.”
“어…….”
코이는 당황해 눈만 깜박거렸다. 애슐리의 음성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벌써 그는 마음속으로 모든 정리를 끝낸 것 같았다. 더는 할 말이 없어 코이는 그냥 그렇구나, 라고만 중얼거렸다.
“어, 저기, 그럼 이제 새 여자 친구가 생기는 거야?”
겨우 할 말을 떠올려 묻자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글쎄, 어떨까.”
“응? 왜?”
알 수 없는 말에 코이는 또다시 묻고 말았다. 애슐리는 대답 대신 빤히 코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어.”
“왜?”
코이는 조바심이 나 그를 재촉했다. 하지만 애슐리는 대답 대신 얼음을 넣은 컵에 음료를 따랐다. 코이는 그가 음료를 마시는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컵을 내려놓은 뒤 애슐리는 입을 열었다.
“고백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야.”
“어?”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코이가 눈을 깜박거렸다.
“여자 친구는 계속 있었잖아?”
그런데 고백은 안 해 봤다니 무슨 얘길까. 이해하지 못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대답했다.
“그랬지. 그런데 누굴 사귈 때 좋아한다거나 뭐 그런 식으로 말하고 사귀는 건 아니잖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지.”
그렇구나…….
처음 안 사실에 코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껏 누구도 사귀어 본 적 없는 자신이 이런 상담을 해도 좋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곧 고민을 접어 버렸다. 친구의 일이잖아, 최선을 다해야지.
코이는 적극적으로 물었다.
“그럼 지금껏 했던 것처럼 하면 되잖아? 자연스럽게.”
“좀 달라.”
“어떻게?”
애슐리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코이를 바라보았다.
“걔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니까.”
애슐리의 말에 코이는 즉각 반응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좋아하겠지, 아니, 좋아하지!”
평소보다 높아진 음성으로 코이가 말을 이었다.
“널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당연히 기뻐할 거야, 너한테 좋아한다는 소릴 듣는다면!”
열렬한 반응에 애슐리가 민망한 듯 피식 웃었다.
“설마.”
“그렇다니까!”
코이는 진심을 다해 소리쳤다.
“네가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하면 나라도 바로 그러자고 할걸!”
가만히 코이를 바라보던 애슐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
냅다 소리치고 나자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벌써 쏟아진 물이었다. 코이가 멈칫하고 굳어 버리자 애슐리가 테이블에 팔을 얹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럴까?”
코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은청색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그만 넋을 잃었다.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단정한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오직 자신에게 고정된 두 눈과 부드럽게 미소 짓는 입술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코이.”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속삭였다.
“좋아해.”
……어?
코이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귓가에서 폭죽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아니,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도 모른다. 요란하게 울려 대는 굉음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애슐리의 낮은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애쉬가 날.
좋아해.
“……으앗!”
코이는 그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코이!”
애슐리가 급하게 손을 뻗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콰당, 소리와 함께 의자가 나동그라졌다. 코이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한동안 그대로 굳어 있었다.
“괜찮아?”
애슐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조금씩 코이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애슐리가 그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바닥에 머리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창백하게 굳어진 애슐리의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코이는 응, 하고 대답했다.
“괜찮아. ……고마워.”
“……그래.”
그제야 안심한 듯 애슐리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곧이어 그가 붙잡고 있던 코이의 팔을 고쳐 쥐고 불시에 끌어당겼다.
“아!”
얼떨결에 끌려 올라간 코이가 덥석 그의 품에 안겨 버렸다. 생각도 못 한 상황에 눈을 크게 뜨는데, 애슐리가 코이를 끌어안고 말했다.
“걱정하게 하지 마.”
쿵.
갑자기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뒤이어 미친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눈앞이 멍해지고 머릿속이 텅 비었다. 떠오르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애쉬한테 들키면 어쩌지.
설렘과 두려움이 뒤엉켰을 때, 갑자기 애슐리가 그를 떼어 놓았다. 순간 비틀거렸지만 곧 균형을 잡았다. 애슐리는 코이가 똑바로 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손을 놓았다. 코이의 시야에 그가 평소처럼 미소 짓는 얼굴이 들어왔다.
“테스트는 통과한 거지? 오늘 훈련은 쉬고 대신 축하 파티 할까? 아마 케이크가 있을 거야.”
“케이크?”
애슐리의 말을 반복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가 당연히 통과할 거라고 생각해서 만들어 두라고 메모를 남겨 놨거든.”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코이는 반응을 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케이크라고? 나를 위해서? 생일도 아닌데?
그는 생일에도 케이크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런 적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난데없이 케이크라니.
고작 별것도 아닌 테스트를 통과했을 뿐인데.
냉장고의 문을 연 애슐리가 초콜릿 케이크를 꺼냈다. 코이는 그가 테이블 위에 케이크를 내려놓는 걸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곧 포크와 접시를 놓아 준 그는 넘어진 의자를 다시 세운 뒤 코이를 앉혔다. 코이는 그가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을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축하해, 코이.”
애슐리가 그의 앞에 케이크를 밀어 주며 말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을 마주하자 코이는 목이 꽉 메는 것 같았다.
“고마, 워.”
간신히 쥐어짠 음성에 애슐리는 그저 웃었을 뿐이다. 포크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코이는 조심스레 케이크를 덜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때?”
애슐리가 물었다.
“맛있어.”
코이는 대답했다. 애슐리가 다시 웃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대고 케이크는 너무 달아서, 코이는 하마터면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