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뭐 해?”
마침 자신의 스테이크를 애슐리의 접시로 이동시키려는 코이를 발견한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는 멈칫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저기, 나한텐 좀 많아서.”
“그거밖에 안 먹는다고?”
애슐리가 코이의 접시로 시선을 움직였다. 훅 줄어 버린 고기를 덩달아 내려다봤던 코이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응, 난 원래 많이 안 먹어.”
“……그래?”
애슐리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새 코이는 재빨리 들고 있던 고기를 옮겼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나니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흐뭇하게 웃는데, 애슐리의 혼잣말이 들렸다.
“그렇게 적게 먹으니까 콩알만 하지.”
만약에 저 말을 한 게 애슐리가 아니었다면 코이는 이렇게 큰 콩알 봤느냐, 네가 바보처럼 너무 큰 거 아니냐, 모든 인류가 다 너같이 먹어치웠으면 진작 지구는 멸망했을 거다, 풀도 많이 먹고 고기도 많이 먹고 도대체 남아나는 게 있겠냐 등등 한껏 소리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애슐리라는 사실은 그의 모든 투지를 꺾어 버렸다. 오히려 애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해 버린 코이에게 애슐리가 물었다.
“음료 뭐 마실래?”
“어? 어, 콜라.”
얼떨결에 대답하자 냉장고 문을 열고 선 그가 다시 물었다.
“망고, 애플, 라임, 제로, 오리지널, 어떤 걸로?”
“마, 망고!”
그 말을 들은 애슐리는 망고 콜라 두 개와 유리컵 두 개를 꺼내더니 코이의 앞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고마워.”
이번에도 인사를 했지만 애슐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돌아서서 냉장고 얼음 메이커 버튼을 눌러 컵에 얼음을 담았다. 보란 듯이 자리에 앉아 얼음을 가득 담은 자신의 컵에 콜라를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는 애슐리의 모습에 코이는 눈을 깜박였다.
“저…….”
“넌 얼음 안 먹지?”
막 말을 꺼내려던 코이는 그보다 먼저 물은 애슐리의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 어.”
그는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고 묵묵히 콜라를 마셨다. 남은 음식이 그게 다라고 했지만 먹다 보니 상당히 많았다. 코이는 모자란 고기 대신 매쉬드 포테이토와 샐러드로 모자란 배를 채웠다.
제법 양을 채운 코이는 포크를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마침 애슐리도 식사를 마쳤는지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있었다.
“양 괜찮아? 모자라지 않아?”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항상 그렇게 많이 먹는 건 아냐. 지금은 이 정도면 됐어.”
먼저 자리에 일어난 그는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벌써? 코이는 놀라면서도 서둘러 뒤따라 접시를 치웠다. 순식간에 자리를 정리한 애슐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자, 이제 연습하러 갈까?”
방금 전 배부르게 먹었던 음식이 갑자기 위에 걸리는 것 같았다. 코이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
애슐리가 말한 아이스링크는 지하 2층에 있었다. 지하 1층엔 뭐가 있냐는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간단히 “와인.”이라고만 대답했다.
……추워.
지하 2층에 다다라 닫혀 있는 문을 연 순간 냉기가 훅 달려들었다. 코이는 잔뜩 몸을 움츠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애슐리가 그를 돌아보고 말했다.
“괜찮아? 겉옷이라도 줄까?”
“그, 그래도 돼?”
금세 이를 떨며 말하는 코이를 보고 애슐리는 선뜻 한쪽에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장 중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몇 가지 옷과 스케이트화가 들어 있었는데, 그중 얇은 점퍼를 꺼낸 애슐리가 그것을 코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으니까 주는 건데 이 온도에 적응하는 게 좋아. 치어리딩 팀에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응, 그럴게.”
코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금 당장은 추위를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애슐리에게서 받은 점퍼도 이 한기를 막아 줄 만큼 두꺼운 것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서둘러 팔을 꿰어 입는 것을 지켜보던 애슐리가 물었다.
“신발 사이즈가 몇이야?”
“어? 어, 7.5.”
“뭐?”
스케이트화를 찾다 말고 그가 고개를 돌렸다. 코이는 무안해졌지만 좀 더 큰 소리로 대답했다.
“7.5라고. 7.5!”
“허…….”
애슐리는 알 수 없는 탄성을 내뱉더니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뿐이지만 텅 빈 아이스링크의 적막 속에서 코이는 너무나 뚜렷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와, 내가 4학년 때 8이었는데…….”
코이는 부끄러움에 그만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어졌다.
*
스케이트화는 아주 보관이 잘되어 있었다. 애슐리의 말로는 몸이 엄청 빨리 자라서 한 번도 안 신고 그냥 넣어 둔 신발이나 옷들도 많다고 했다. 물론 코이로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쪽이 나아? 아니면 이쪽?”
애슐리가 묻는 말에 코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발 치수로 따지면 오른쪽이 잘 맞는데 왼쪽이 더 고정이 잘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 애슐리가 대신 결정을 내려 주었다.
“그럼 왼쪽으로 하자. 스케이트화는 빈틈이 없는 쪽이 더 좋을 거야.”
헐렁하면 부상을 입기 쉬우니까, 하고 그는 덧붙였다. 코이는 군말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앉아 봐, 묶어 줄게.”
애슐리는 코이를 벤치에 앉히더니 주저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어 그의 앞에 몸을 숙였다. 당황한 코이가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내가 할게.”
“다음에 해.”
애슐리가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이번엔 내가 해 줄게.”
애슐리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코이는 그의 이런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편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애쉬는 좋은 애니까 모두에게 친절한 것뿐이야.
우연히 친해졌다고 해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착각이다. 애슐리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다. 누구든 그와 가까워지려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러니 코이와 같은 상황은 누구든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만 갖자.
코이는 스스로를 다독인 후 시선을 내렸다. 곧 애슐리의 가마가 보였다. 그의 가마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상하고 신기했다. 자신이 이렇게 그를 내려다볼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거기다 애쉬가 내 앞에 무릎을 꿇다니.
코이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았다. 길고 얇은 실을 능숙하게 꼬아 매듭을 만드는 섬세한 손가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뼈마디가 긴 데다 우아한 손가락은 물론 네모진 손톱마저도 예뻤다.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코이가 무심코 물었다.
“애쉬, 악기 다룰 줄 아는 거 있어?”
“음…… 플루트?”
별생각 없이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코이는 두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플루트? 정말?”
“그래.”
한쪽 끈을 전부 맨 애슐리가 허리를 펴고 코이의 반대편 다리를 잡았다. 종아리 쪽을 살며시 쥐고 자신에게 잡아당긴 그는 다시 상체를 숙여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끈을 손가락에 감았다.
“악기 시험도 그걸로 쳤는데.”
“그래? 뭘로?”
“센티멘탈.”
“센티멘탈?”
자신이 한 말을 반복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대답했다.
“그래, 클로드 볼링의.”
코이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사실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대신 그는 열심히 머릿속으로 그것을 외워 뒀다. 혼자가 되면 꼭 그 음악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코이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애슐리는 끈을 매던 것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찾아 빠르게 뭔가를 두드렸다.
“자, 이거.”
“아.”
코이가 앉아 있는 벤치의 옆자리에 자신의 휴대 전화를 내려놓은 그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음악이 흘러나왔다.
조용한 재즈 음악이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처음 듣는 아름다운 선율에 코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곡을 애쉬가…….
플루트 연주를 귀담아들으며 과연 애쉬는 이 곡을 어떻게 연주했을까 상상해 봤다. 끈을 매는 저 긴 손가락으로 한 음 한 음을 짚어 갔을까. 지금처럼 저렇게 눈을 내리깔고, 긴 속눈썹을 이따금 달싹거리면서.
음이 끊어질 때마다 숨을 들이마셨겠지. 입술을 열고, 숨결을 들이켜고, 천천히 한 음마다 내쉬면서.
아.
코이는 생각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문득 아련한 슬픔과 함께 가슴이 내려앉았을 때였다. 끈을 전부 묶은 애슐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 애슐리를 보고 있던 코이는 별안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애슐리의 눈가가 기울어지고, 입술이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