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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216)

36화

“어, 어.”

얼떨결에 끌려가면서 코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래도 아직은 껄끄럽긴 하겠지. 그는 내심 생각하며 열심히 애슐리를 쫓아갔다.

“자, 이제 말해 봐.”

애슐리는 코이를 학교 뒤의 외딴 곳으로 끌고 가 단둘이 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기회는 왔지만 코이는 막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 치어리딩 팀에 들어가서 여장을 하게 됐어. 안무도 연습해야 돼. 그런데 스케이트까지 타야 된대. 난 스케이트화조차 없는데 말이지. 왜냐고? 돈이 없으니까!

“코이.”

눈을 질끈 감고 만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말해 봐, 그러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는 코이를 달랬다. 애슐리는 진심으로 코이를 돕고 싶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껏 수없이 많은 껍질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코이는 선뜻 속살을 드러내지 못했다.

“코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인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날 못 믿는 거야?”

“아, 아냐.”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금세 수치심으로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냥, 창피해서 그래.”

“뭐가?”

다시금 질문이 돌아왔다. 코이는 으윽, 하고 목구멍 안쪽에서 깊은 신음 소리를 낸 후에야 비로소 후,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저기…….”

코이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을 애슐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 줬다. 코이는 최대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여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 빼고.

“결원이 생겼다더니 그렇게 해결하려고 하는구나.”

얘기를 다 듣고 난 애슐리가 중얼거렸다. 코이는 내심 긴장했지만 다행히 애슐리 역시 더는 모르는 듯했다. 에리얼과 헤어졌다더니 최신 소식은 모르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으음, 잠시 생각했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고민은 스케이트를 탈 줄 모르고 스케이트화도 없다는 거지?”

“으, 으응.”

“스케이트화는 자기 발에 맞는 걸 구입하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넌 한 시즌만 뛰면 되니까…….”

“응.”

내심 긴장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렇게 하자. 우리 집 지하에 아이스링크가 있어. 연습은 거기서 해.”

“아, 아이스링크? 집 안에?”

깜짝 놀라는 코이를 보고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스케이트화는 내가 어릴 때 신던 게 아마 남아 있을 거야. 네 사이즈가 있는지 한번 보자. 어때?”

“어, 어어.”

코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애슐리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 해결된 거지? 남은 문제가 있어?”

“어…….”

코이는 눈을 깜박거렸다. 없다. 순식간에 그의 고민이 모두 해결되어 버렸다.

“아, 아니, 없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던 코이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정말이야, 없어졌어, 전부 다.”

급기야 그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애슐리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마치 신을 향하듯 열렬해서, 애슐리는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다행이네.”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럼 연습은 어떻게 할래? 운동은 매일 해야 몸에 익을 텐데, 난 이제 연습 때문에 7시에나 끝나. 그 뒤에 같이 내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스케이트 연습을 2시간 정도 하면 대충 11시쯤 끝날 텐데 너무 늦지 않아? 괜찮겠어?”

“괘. 괜찮아.”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아르바이트도 그 시간쯤 끝나는걸.”

사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은 10시였지만 수당을 주는 시간이 그때까지일 뿐이다. 쓰레기를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재고를 파악한 뒤 문을 잠그고 나오면 적어도 1시간에서 많게는 2시간까지 그냥 잡아먹었다. 물론 그것에 대한 수당은 받지 못했다.

“평일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면 돼.”

대신 주말에는 꼬박 가게를 봐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신을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애슐리가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걱정하는 빛이 역력한 그를 보고 코이는 일부러 더 밝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지금은 이게 더 중요하니까.”

“……하긴, 그렇지.”

코이의 말에 공감한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얘기는 끝났네. 어떻게 할까?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

“부탁할게. 연습할 시간이 얼마 없어. 기본 동작도 외워야 하거든.”

하루는 물론이고 한시가 급했다.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 동작들투성이였다.

“치어리딩 팀이 할 일이 많지.”

애슐리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이따가 7시 10분에 보자. 시동을 걸어 놓을 테니까 내 차로 와. 학교 앞 도로에 세워 놨어. 내 차 찾을 수 있겠어?”

“알 수 있을 거야.”

그 시간이면 차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카이엔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애슐리는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못 찾겠으면 전화해.”

당부의 말을 남긴 뒤 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이스하키 팀이 연습을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코이가 치어리딩 팀이라.

뛰다시피 걸어가며 애슐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를 여장시켜서 액땜한다던 말을 정말로 실천할 줄은.

*

수업이 끝난 뒤 조용한 카페테리아에 혼자 앉아 애슐리를 기다리는 동안 코이는 에리얼이 준 기본 동작을 검색했다. 글과 그림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영상을 찾아본 건데, 봐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사람 몸을 왜 이렇게 움직이는 거야.

정말 간단한 옆 돌기조차도 못하는 코이로서는 애초에 이걸 어떻게 어떤 원리로 하는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도 그는 제일 쉬운 구르기마저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걸 정말 할 수 있을까.

한숨을 내쉬며 영상을 보고 또 보는 동안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미리 맞춰 두었던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던 그는 허겁지겁 짐을 챙겨 카페테리아를 나왔다.

애슐리의 차가 있는 곳은 미리 봐 뒀다. 지금 그는 먼저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러 가야했다. 종종 사라지는 자전거가 있었지만 누가 봐도 낡고 오래된 코이의 것을 훔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도 덩그러니 혼자 남아 있는 자신의 자전거를 챙긴 코이는 능숙하게 페달을 밟고 올라탔다.

애슐리의 카이엔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운동장을 지나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바로 그의 차가 보였다. 코이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을 룸미러로 확인한 애슐리가 트렁크를 열었다.

“가서 앉아.”

운전석에서 내려 훤히 열린 트렁크 앞에 선 애슐리가 말했다.

내 자전건데 내가 안 해도 되나?

머뭇거리며 조수석으로 향하던 코이는 그가 낡은 자전거를 한 손으로 훌쩍 들어 올려 차에 싣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 얌전히 조수석에 앉았다.

애슐리는 금세 운전석으로 돌아와 안전벨트를 맸다. 코이가 맨 안전벨트까지 확인한 그는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저녁은 집에서 먹을까 하는데, 괜찮아?”

“어? 좋아, 물론 아주 좋아.”

반색을 하며 대답했던 코이는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속내를 훤히 드러내 버린 것 같아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런 코이의 기분을 눈치챈 건지 어떤 건지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먹고 나면 바로 연습을 해야 할 텐데 다른 데 들르면 시간이 그만큼 낭비되니까.”

“아, 그렇구나.”

그럼 다행이고. 코이는 내심 안도했다. 애슐리는 능숙하게 차를 몰아 곧바로 컨트리를 향해 달려갔다.

*

애슐리가 준비한 저녁은 고용인이 미리 만들어 놓고 간 것으로, 역시나 양은 어마어마했다. 코이는 이렇게 큰 샐러드 볼은 처음 봤다. 풀까지 이렇게 많이 먹는구나. 거기다 바로 옆에 함께 내놓은 매쉬드 포테이토 또한 같은 크기의 샐러드 볼 가득히 담겨 있는 것을 보고 코이는 과연 앞으로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내심 두려움을 느꼈다.

예상과는 달리 애슐리가 코이와 자신의 앞에 내놓은 것은 치킨 샐러드와 스테이크, 매쉬드 포테이토가 다였다. 계속해서 음식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코이는 식탁 맞은편에 앉는 애슐리를 보고 신기해하며 물었다.

“집에서는 별로 안 먹나 봐?”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뒤늦게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애슐리가 덧붙였다.

“지금 있는 게 이게 다라서.”

“컥.”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입에 넣던 코이는 그만 목이 콱 막히고 말았다. 급히 가슴을 두드리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그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과 애슐리의 접시를 번갈아 본 코이는 결심을 하고 남은 고기의 절반을 썰었다.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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