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함께 걷는 동안 애슐리는 빌이 열심히 떠들어 대는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코이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에리얼이 애슐리를 찼다고 소문이 난 모양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예상한 대로 빌의 얘기는 시종일관 시시콜콜한 주변 일들만 이어질 뿐이었다. 결국 전날 산책을 시키던 개가 길에 똥을 쌌다는 얘기까지 듣고 나자 애슐리는 하마터면 하품이 나올 뻔했다.
“나 훈련 빠진 동안 누구 찾아오거나 하진 않았어?”
일부러 화제를 바꾸려 묻자 빌이 아니, 하고 대답했다.
“없었는데?”
이런, 내심 애슐리는 생각했다. 코이를 만났던 걸 아예 잊어버린 건가.
“네가 코이한테 그랬다며, 에리얼이 날 찼다고.”
“코이?”
빌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그 작고 깡마른 녀석? 그 녀석이 왜? 아, 그러고 보니.”
뒤늦게 그가 손가락을 마주쳐 소리를 냈다.
“너 쉴 때 찾아와서 물어보긴 했어, 왜 안보이냐고. 아파서 쉬고 있다고 말해 줬지.”
이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빌의 모습에 애슐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다야?”
“응, 그게 단데? 왜? 무슨 일 있어?”
빌이 의아해하며 묻는 말에 애슐리는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서둘러 셔츠를 벗으며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아까 그 개는 어떻게 됐어?”
“뭐? 아, 그렇지. 그래서 내가 그 똥을 주우려고 했는데 봉투를 안 가져간 거야…….”
계속해서 소란스럽게 주절거리는 그의 말을 애슐리는 그냥 흘려들었다.
별 얘기는 없었구나.
애슐리는 그가 자신을 위로하러 찾아왔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걸 아는 건 코이와 자신, 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때, 마침 저쪽에서 걸어오던 무리들이 알은체를 했다.
“애쉬, 왔구나.”
“야, 넌 왜 덩칫값을 못하냐? 벌써 몇 번째야?”
덩치도 큰 녀석들이 오랜만에 복귀한 그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이리저리 몸을 치대 왔다. 돌아가며 한 번씩 가볍게 포옹을 한 뒤 애슐리는 수업 준비를 했다. 눈으로는 코이를 찾고 있던 그는 저쪽에서 낯익은 머리통을 발견하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코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도 그는 단번에 코이를 찾아냈다. 그것은 처음 겪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틈에서 유독 코이만은 환하게 빛난다. 아주 작은 일부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코이가 사물함을 열었다. 안을 뒤적이는가 싶더니 다시 닫고 몸을 돌린다. 애슐리는 그가 자신을 보기를 기다렸다.
눈이 마주쳤다.
애슐리.
자신을 부르는 그의 입 모양이 확실히 보였다. 애슐리의 미소가 더욱 깊어지고, 코이 또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난 갈게.”
애슐리는 무리들에게 인사를 한 뒤 빠른 보폭으로 걸어갔다. 부대끼는 아이들을 헤쳐 오직 한 점만을 향해 달려간다.
“코이!”
뒤에서 이름을 부르며 뒤에서 덮치자 코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좋아해.
애슐리는 가슴 벅찬 기쁨을 느끼며 힘주어 그를 끌어안았다.
*
“치어리딩 팀에 들어오겠다고?”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치어리딩 팀 주장, 에리얼을 향해 코이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엄청난 망설임이 있었으나 결국 그는 치어리딩 팀의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너 진심이야? 스커트 입어야 되는 건 알고 있지?”
에리얼이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 코이는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최선을 다해 볼게.”
“잘해야지, 최선을 다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에리얼이 톡 쏘아붙였다. 코이 역시 그들은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던 터라 할 말은 없었다. 그냥 민망해하며 얼굴을 붉히는 그의 반응에 에리얼이 말했다.
“정말 괜찮겠어? 시즌이 시작됐는데 역시나 안 되겠다고 달아나면 곤란해.”
“제발 들어가게 해 줘.”
코이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에리얼은 팔짱을 끼고 그를 한 차례 훑어보았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심각한 표정에 코이는 아무 말 못 하고 숨만 죽인 채 결과를 기다렸다.
탐탁지 않아 하는 시선으로 코이를 바라보던 에리얼이 갑자기 큰 보폭으로 성큼 그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코이가 움칠 놀라자 그녀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특별 활동 점수 때문에 이러는 거 알아.”
코이가 숨을 삼키자 그녀는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네 점수 따겠다고 자발적으로 온 건 좋은데, 혹시나 만약에 우리 팀을 망치면 정말 두고두고 괴롭혀 줄 줄 알아.”
코이는 등골이 오싹해져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좋아.”
에리얼이 뒤로 물러났다. 다시 처음의 엄격한 주장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는 바짝 얼어붙은 코이에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급한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아무나 받진 않아. 최악의 경우엔 안무를 바꿔서 우리끼리 시즌을 끝내는 방법도 있으니까. 알겠지?”
“응, 알겠어.”
“좋아.”
에리얼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미리 준비해 둔 프린트물을 건네주었다. 서둘러 받아 든 코이에게 그녀가 설명했다.
“이건 기본 동작이야. 네가 어느 정도 되는지 시험해 볼 테니까 연습해 와. 혹시 틀리면 바로 탈락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 알았어. 고마워.”
코이가 급히 프린트물을 확인하는데, 휴대 전화를 꺼내 날짜를 확인한 에리얼이 말했다.
“테스트는 이날이 좋겠어. 이때까지 준비해 와, 합격 여부는 우리 팀 모두가 보고서 결정할 거야.”
“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
서둘러 프린트물을 가방에 챙겨 넣은 코이가 부실을 나가려 했을 때였다.
“잠깐, 코너 나일즈.”
“어, 어?”
멈칫하고 돌아보자 에리얼이 의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스케이트는 탈 줄 아는 거지?”
“스, 스케이트?”
생각도 못 한 말에 더듬고 만 코이에게 에리얼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당연한 거 아냐? 넌 우리 학교 아이스하키 팀이 고등학교 전국 우승 팀인 거 모르니? 당연히 치어리딩 팀은 아이스하키 팀을 응원해야지.”
“그, 그렇지.”
잊고 있었다. 아니, 생각도 못 했다는 쪽이 맞았다. 뒤늦게 당황한 코이의 반응에 에리얼의 표정이 금세 돌변했다.
“너 정말이야? 못 타? 스케이트?”
“아, 아니, 아냐, 물론 아니지, 스케이트 탈 줄 알아, 당연하지.”
당황한 나머지 격렬하게 부정해 버렸다. 에리얼은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완연했으나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물러났다.
“어차피 스케이트를 아무리 잘 타 봐야 기본 동작도 못하면 끝나는 거니까.”
간단히 말한 그녀는 선뜻 돌아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팀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코이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 도망치듯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큰일 났다.
밖으로 나오고 보니 곧바로 현실이 들이닥쳤다. 코이는 이내 사색이 되어 머리를 움켜쥐었다. 스케이트라니, 생각도 못 했다. 스케이트를 탄다고? 그걸 타면서 안무까지 한단 말이야?
스케이트를 탈 수 있기는커녕 아예 스케이트화가 있지도 않다고!
코이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할까? 그럼 특별 활동 점수는 어떻게 해? 다른 걸 알아봐 달라고 할까? 아니지, 이게 마지막이었잖아. 이걸 못 하면 내 내신 점수는? 정말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야?
으으윽, 앓는 소리를 냈을 때였다.
“코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뒤에서 들린 귀에 익은 목소리에 코이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저쪽에서 걸어오는 아는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안도감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애쉬!”
반가워하며 달려간 코이는 순식간에 애슐리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를 기다렸던 애슐리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코이는 한 차례 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내가…….”
막 말을 하려던 코이가 멈칫했다.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갔다. 애슐리는 에리얼과 사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도 운동부는 대부분 치어리딩 팀와 각별한 사이이니 내부 사정도 잘 알 것이다. 치어리딩 팀에 결원이 생겨서 심각한 위기가 닥쳤다는 얘기도 알고 있지 않았던가.
혹시 그럼 스커트에 관한 것도 알고 있을까?
어차피 닥칠 일이긴 했지만 자신의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것도 애슐리에게.
말을 하려다 말고 멈춘 코이를 애슐리는 의아해하며 내려다봤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했으나 때마침 치어리딩 팀의 문이 열리고 여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슐리가 급히 코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