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216)

34화

“어어?”

빈 캔을 내려놓은 코이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곧 일어날 암담한 상황을 예상한 애슐리는 입 밖으로 답답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코이가 벌써 알코올로 인해 몽롱해진 눈으로 애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좀 이상하다.”

“술이니까 그렇지.”

애슐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얼굴을 찡그렸다.

“냄새를 맡아 보면 알잖아.”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던 코이가 이내 헤실 웃었다.

“그러네에. 어쩐지 코가 찌잉 하고 울리더라.”

찌잉, 찌잉 하고 소리를 내며 키득거리는 코이의 모습에 애슐리는 당황했다. 술에 취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원래 술이라는 게 이렇게 금방 취하는 건가?

혹시나 해서 캔을 흔들어 보니 역시 비어 있었다. 고작 맥주 한 캔에 이렇게 취해 버릴 줄은 몰랐다. 처음 마시는 술이라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상황을 정리해야 돼.

애슐리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술을 먹인 건 그의 잘못이니 책임을 져야 했다.

냉장고에 술을 넣어 둔 건 고용인들이 한 짓일 것이다. 근무 도중에 마시려고 넣었을 수도 있고, 그냥 구색 맞추기용으로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 넣었을 수도 있다. 지금 중요한 건 ‘왜’가 아니었다. 애슐리는 계속해서 키득거리며 웃는 코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은 좋은가 보네.

이따금씩 까딱거리는 귀를 보고 애슐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술이 깨고 나면 죄책감을 느낄지는 모르지만 이 상황을 아는 사람은 그와 코이 단둘뿐이니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물론 애슐리 또한 일부 자신의 책임이 있는 일을 굳이 떠벌리는 것보다 지금 코이를 책임지는 게 먼저였다.

“일어나, 코이. 여기서 누우면 안 돼, 감기 들어.”

“어? 어어……?”

코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헤롱거렸다. 애슐리는 한숨을 내쉬고 그를 안아 들었다.

“윽.”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벼워서 하마터면 허리를 다칠 뻔했다. 놀란 신음을 뱉어 낸 애슐리는 키득키득 웃고 있는 코이를 얼빠진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코이는 여전히 그의 속도 모르는 채 실실 웃기만 했다.

“애시이, 나 몸이 둥둥 떠 있어어.”

“그렇겠지, 사실이니까.”

무심히 대답하며 애슐리는 걸음을 옮겼다. 저택으로 들어가는데, 코이가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신기하다아. 누가 날 안고 날아가는 거 같아아.”

안 취한 거 아냐?

애슐리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레 코이를 내려다봤다. 막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코이가 팔을 휘적거렸다.

“앗, 야!”

놀란 애슐리가 황급히 그를 고쳐 안자 코이가 까르르 웃었다.

“날았다아, 날았어어어.”

“너 또 술 먹기만 해 봐.”

애슐리가 으름장을 놓았으나 코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주인이다, 나 우주인이 됐어어.”

입으로 부웅, 부웅 소리를 내는 그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애슐리는 묵묵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코이는 웃기도 하고 바람 소리를 내기도 하고 별자리 이름을 두서없이 나열하기도 했다. 애슐리는 입을 다문 채 그저 걷기만 했다.

“으으응…….”

어깨로 객실의 문을 밀어서 연 애슐리가 침대 위에 코이를 내려놓자 코이가 웅얼거리며 잠꼬대를 했다. 고작 맥주 한 캔밖에 안 먹었는데 취해 곯아떨어진 그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애슐리는 침대에 널브러진 코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과 취기 때문인지 홍조를 띤 뺨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코이.”

애슐리가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깨어 있었다면 당연히 대답을 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지금 들리는 것은 깊은 숨소리뿐이었다.

“코이.”

애슐리가 한층 더 낮아진 소리로 속삭였다. 조심스럽게 코이의 위로 몸을 숙인 그는 살며시 뺨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코이의 온기가 느껴졌다.

코이.

애슐리가 입술만 달싹여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키스하고 싶어.”

숨소리처럼 잦아든 음성으로 그는 고백했다. 화끈거리는 뺨의 온기가 자신의 것인지 코이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혹은 너무나 강렬했다. 아주 살짝 닿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그냥 입술만 닿는 거라면. 아주 살짝.

……그럴 리가 없잖아.

애슐리는 자신의 모든 인내심을 끌어모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강렬한 유혹을 뿌리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댓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짙은 남빛의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아…….”

마치 끓어오르는 것처럼 깊은 한숨을 뱉어 낸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한 번에 쏟아 내 버린 기분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던 그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애슐리는 복도로 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코이를 돌아보지 않았다.

*

“우우웅…….”

크게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깬 코이는 한동안 그대로 누운 채 졸린 눈을 깜박거렸다.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생소하기만 했다. 침대는 놀랄 정도로 넓고, 구름처럼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실제로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코이는 다시 눈을 감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낡고 더러운 시트에서 느껴지던 쾌쾌함은 이 자리에 없었다. 대신 갓 빤 것처럼 산뜻한 느낌으로 은은하게 몸을 휘감아 오는 부드러운 시트에 코이는 하아,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어?

다시 잠으로 빠져들려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꿈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나?

그럴 리가 없잖아!

놀라 눈을 번쩍 뜨고 황급히 일어나 앉은 코이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전경은 변함이 없었으나 고풍스러운 침대와 가구, 산뜻한 색감의 벽이 커다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비쳐 한층 더 부드러워 보였다.

여긴…….

코이는 뒤늦게 기억을 되살렸다. 전날 있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쏟아지던 별들, 밤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던 하늘, 마음을 설레게 하던 산뜻한 바람.

그리고.

나 술 먹었어!

코이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우연한 사고였지만 자신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살면서 어떤 사소한 규칙이라도 어긴 적이 없었던 코이였는데 자그마치 법을 어겼다.

세상에, 어떻게 내가 이런 범죄를.

코이는 하얗게 질려 머리를 움켜쥐었다.

어떡하지!

*

“안녕, 코이.”

애슐리를 찾아 넓은 저택을 헤매 다녔던 코이는 간신히 티룸에 있는 그를 발견했다. 마침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애슐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아침 먹을 거지? 이리 와 앉아.”

“어, 응.”

코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말했다.

“도와줄 일은 없어?”

“아니, 다 했어. 그냥 앉아.”

“응.”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자 애슐리가 물었다.

“커피? 홍차? 허브티? 아니면.”

무심히 나열하던 그가 짓궂게 덧붙였다.

“맥주?”

“풉.”

마침 물을 마시고 있던 코이는 그만 당황해 그것을 뿜어 버렸다.

“콜록, 콜록.”

사레에 걸려 버려 급하게 기침을 해 대자 애슐리가 냅킨을 들어 내밀었다.

“고, 고마워.”

“천만에.”

코이는 간신히 기침을 가라앉힌 후 자세를 바로 했다. 그사이 애슐리는 식사 준비를 마무리했다.

“이거, 다 네가 만든 거야?”

접시에 가득한 음식을 보고 묻자 애슐리가 가볍게 대답했다.

“별거 아냐. 그냥 굽기만 하면 되는데.”

실제로도 대단한 솜씨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베이컨에 달걀, 소시지와 감자에 샐러드가 올려져 있는 게 다였다. 하지만 이걸 혼자서 준비했다는 게 대단했다. 코이는 맞은편에 앉은 애슐리를 보고 물었다.

“항상 이렇게 아침을 먹어?”

“아니.”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잘 안 먹어. 시리얼이나 먹을까.”

“그럼 나 때문에 만든 거야?”

코이는 일부러 물었다. 당연히 장난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그저 미소 짓는 애슐리의 얼굴뿐이었다.

어.

코이는 멈칫했다. 정말 나 때문에?

“어서 먹어.”

애슐리가 냅킨을 펼치며 말했다. 코이는 “으응.” 하고 서둘러 포크를 들었다. 그도 역시 아침식사를 한 지 무척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식사는 기억하는 한 최고로 맛있었다.

*

“애쉬! 야, 괜찮아? 다 나았어?”

오랜만에 학교에 도착하자 마침 차를 주차시키던 빌이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넸다. 차에서 내린 애슐리는 자연스럽게 포옹을 나눈 뒤 그를 떼어 내고 대답했다.

“괜찮아, 이제. 별일은 없었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뭘.”

빌이 이내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한 일주일은 쉰다고 하더니.”

“코치가 잘못 말했네. 난 조금만 쉬겠다고 분명히 말했었어.”

“오.”

빌이 짧게 휘파람을 불더니 한결 가라앉은 애슐리의 뺨을 살펴보았다.

“좀 부은 것 같기도 한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꽤 아팠다고.”

애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맞을 짓을 했지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