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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216)

32화

“알았어. 그럼 이제 와도 돼.”

애슐리가 말했다. 왜인지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긴장한 것처럼 들렸다. 코이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두려움을 느끼며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마침내 벽을 돌아 애슐리를 마주했을 때였다.

……어.

코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대로 멈춰 섰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애슐리는 다른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편안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고, 맨발에 샌들을 신고 있었다. 머리칼 또한 집에 있을 때면 으레 그렇듯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채였다. 거기까지는 예상한 대로였다. 상상한 것과 전혀 달랐던 것은 바로 얼굴이었다.

애슐리의 얼굴은 부어 있긴 했다. 다만 울어서 얼굴 전체가 부어오른 게 아니라 유독 한쪽 뺨만 붉게 물들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목에 할퀸 것 같은 자국도 보였다.

……고양이?

코이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고양이를 기른 적은 없지만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 적은 있었다. 고양이가 마음을 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데, 그때까지는 수시로 손등을 할퀴어 댔다. 그나마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발톱을 숨기고 발로 때리기 시작했는데, 그것 또한 꽤 아팠다.

지금 애슐리의 얼굴이 딱 그랬다. 사이가 나쁜 길고양이가 낯선 이를 경계하며 발톱을 세우고 열심히 두들겨 팬 것 같았다.

저 손자국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는 손가락의 자국은 사람이 남긴 것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던 코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애쉬.”

“그래.”

애슐리가 대답했다. 입술도 좀 찢어진 것 같았다. 코이는 주저하다가 물었다.

“혹시, 그거.”

차마 다음 말을 못 하고 있는데, 애슐리가 말했다.

“맞아, 앨이 때렸어.”

“히익.”

순간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삼켰다. 입을 막고 눈만 데굴거리는 그를 보고 애슐리는 뒷머리를 거칠게 긁어 댔다.

“봤지?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냐.”

“그, 그렇구나.”

코이는 말을 더듬었다. 뭔가 말을 해야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는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어, 저기, 화가 많이 났었나 봐.”

“그랬겠지.”

애슐리는 남의 일처럼 말했다. 화가 났다거나 침울한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코이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저, 괜찮아?”

“뭐가?”

코이가 주저하다 솔직히 대답했다.

“앨한테 차였잖아.”

“뭐?”

애슐리가 통화할 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는 유독 놀란 것같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애슐리가 다시 물었다.

“에리얼이 날 찼다고?”

진심으로 놀란 듯한 반응에 코이의 눈도 덩달아 휘둥그레졌다.

“틀렸어?”

헤어지지 않았다는 얘기인 걸까?

내심 생각하는데, 두어 번 눈을 깜박였던 애슐리가 곧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냐, 맞아.”

누가 봐도 건성인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충격이 큰가 봐. 코이는 생각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 애쉬.”

코이는 마음을 담아 그를 위로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잊어버려, 앨이 실수를 한 걸 테니까.”

미리 검색해서 얻은 자료를 떠올리며 그대로 말하자 애슐리가 정색을 했다.

“앨은 좋은 애야. 잘못한 건 나야.”

“어, 어?”

이건 매뉴얼에 없었는데.

코이가 당황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이 우스웠는지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부드럽게 변하고, 코이의 어깨에서도 긴장이 풀렸다. 애슐리가 먼저 돌아서며 말했다.

“들어와, 저녁 먹을 거지?”

“어? 어.”

코이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먼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애슐리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어서 와.”

미소를 지으며 한쪽 팔을 쭉 뻗으며 허리를 굽힌 그의 모습에 코이는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한껏 예의를 차려 말하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뒤에서 애슐리가 문을 닫았다. 쿵, 하는 낮은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어?

왠지 이상한 기분에 코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애슐리가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넌 이제 못 나가, 코이.”

유독 낮은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둥그렇게 뜬 코이의 두 눈에 서늘한 애슐리의 얼굴이 비쳤다.

“내 거니까.”

……어?

뜻밖의 상황에 그는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애슐리가 날 가뒀어? 왜? 어째서?

당황해 그냥 멀거니 서있기만 하는데, 애슐리가 문에서 몸을 뗐다. 한 걸음, 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애슐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의 시선은 줄곧 코이에게 못 박혀 있었다. 코이 또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주변을 가득 에워쌌다. 뭔가 반응을 해야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굳어져 다가오는 애슐리를 보기만 했다. 이런 애슐리는 처음이었다. 섬뜩한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코이는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뚜벅…….

애슐리가 느리게 발을 멈췄다. 그들이 거리는 이제 고작 한 걸음밖에 남겨 두지 않았다.

“코이.”

애슐리가 낮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코이는 그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홀린 것처럼 지켜보았다. 크게 열린 시야에 애슐리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그의 단정한 얼굴이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석상처럼 차가워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을 때였다.

“워!”

갑자기 애슐리가 짧은 감탄사를 내질렀다.

“으악!”

화들짝 놀란 코이가 비명을 지르자 그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애슐리가 짓궂은 장난을 쳤다는 걸 깨달은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뭐야, 놀랐잖아.”

가볍게 핀잔을 준 코이에게 애슐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먹을까? 지난번처럼 정원에서?”

“어, 어. 난 아무 데나 좋아.”

황급히 따라가며 말하자 애슐리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방금 전 일로 아직도 가슴이 벌떡거리면서도 그나마 애슐리가 별로 의기소침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

식사는 지난번처럼 정자에서 먹기로 했다. 코이는 음료 담당이 되어 그와 관련한 소품들을 열심히 준비해 날랐다. 애슐리는 이번엔 두 종류의 샐러드와 햄버거,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맛있겠다.”

여러 개의 얇은 스틱이 꽂혀 있는 햄버거를 보고 감탄하자 애슐리가 그의 건너편에 앉아 음료를 집어 들었다.

“망고 콜라 아직 있었어?”

애슐리의 물음에 코이가 대답했다.

“그게 마지막이야. 또 뭘 가져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애슐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얼음을 덜고 음료를 따랐다.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식사를 끝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애슐리는 코이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고 가지 않을래?”

“어?”

코이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자고 갈까 말까. 아버지는 외박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화를 내겠지. 다행이라면 멀쩡할 때는 그나마 상태가 나으니 취하지만 않는다면 거기까지가 다다. 그래도 괜한 모험을 하느니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 당연히 후자가 현명한 선택이었고,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코이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응.”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

[오늘은 과제 때문에 친구 집에서 자고 갈게요. 내일 꼭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코이.]

“……게요. 내일 꼭…….”

자신이 적은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어 본 코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전송 버튼을 눌렀다. 휴대 전화는 바로 꺼 버렸다. 아버지가 술김에 전화를 걸어 대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후우우.

여전히 떨리는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지만 평온함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진정해, 벌써 메시지를 보냈잖아.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어.

“후우우.”

이번엔 소리를 내어 깊은숨을 내쉰 뒤 밖으로 나갔다.

식사를 마치고 코이는 애슐리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애슐리가 다 쓴 식기를 세척기 안에 밀어 넣는 동안 그는 빈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사실 처음엔 전화를 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무서우면 그냥 집에 가면 되잖아.

스스로를 꾸짖었지만 유혹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애슐리가 모처럼 자고 가라고 했는데, 절대로 거절할 수 없어.

코이는 굳게 마음을 먹었으나 결국 전화는 하지 못했다. 대신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끝내 버린 뒤 다시 복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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