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뭐?”
코이는 이번에도 역시 눈만 둥그렇게 떴다. 머릿속에는 곧바로 여자 친구와 함께 있던 애슐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가장 뜨거운 아이스하키 팀 주장과 치어리딩 팀 주장 커플이 깨졌다니. 빌이 다시 무리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며 덧붙였다.
“난데없이 차였으니 충격이 크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저, 빌. 정말 감기는 아닌 거지?”
막 가 버리려는 빌을 급하게 불러 세우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감기일 수도 있지. 그런데 하루도 아니고 미리 며칠 쉬겠다고 말할 정도로 심한 감기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빌은 곧 자리를 떠나 버렸다. 혼자 남은 코이는 한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생각에 잠겨 달려가는 그의 자전거는 평소보다 현저히 속도가 느렸다.
*
실연이라니.
한가한 아르바이트 가게의 계산대 앞에 서서 코이는 생각을 곱씹었다. 그는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 짝사랑조차 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누군가에게 차이거나 헤어진다는 건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애슐리는 다르다. 애슐리의 이전 여자 친구는 코이가 아는 것만 해도 수 명이었다. 빌 틈이 없었던 그의 옆자리는 에리얼을 사귀게 된 후 꽤 오랫동안 채워져 있는 듯했으나 그것도 이제 끝나 버린 모양이었다.
당연히 둘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에서 만나 20살이 되자마자 결혼하는 커플은 흔하게 있다. 막연하게 그들도 그럴 거라 여겼었던 코이는 달라진 현실에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것도 에리얼이 애슐리를 찼다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애슐리의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죽하면 훈련을 며칠이나 빠진다고 했을까.
햇살처럼 웃던 애슐리의 얼굴을 떠올린 코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지만 이미 용기는 바닥이 났다. 끊지도 못하고 떨고 있는데, 마침내 연결 음이 멈추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 ……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짧게 흘러나왔다. 코이는 애슐리의 갈라진 음성에 당황해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어…… 애쉬?”
이번에도 그는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 ……그래. 무슨 일이야?
고작 몇 마디뿐인데도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잔뜩 가라앉아 쉰 듯한 음성을 듣자 코이는 안타까움에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기, 우연히 빌을 만나서 들었는데, 많이 아프다면서? 좀 어떤가 해서 전화했는데…… 많이 안 좋은가 봐…….”
점차 사그라지는 음성을 애슐리는 그저 잠잠하게 듣기만 했다.
혹시 기절했나?
순간 가슴이 철렁했을 때, 애슐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 쉬면 나아질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어…….”
코이가 머뭇거리자 애슐리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 정말이야, 코이. 주말 지나고 보자.
“학교에 올 거야?”
- 물론이지.
애슐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유쾌한 웃음소리를 듣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지만 곧이어 들린 그의 작은 신음소 리에 코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이를 두었다가 애슐리가 다시 말했다.
- 걱정하지 마. 그럼…….
코이는 좀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럴 컨디션이 아니었다. 결국 대충 인사를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하아,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던 코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애슐리는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빌의 말이나 태도로 보아 친구들이 그를 찾아가 보살펴 주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떡하지.
머릿속에는 열에 들떠 있던 애슐리의 모습이 계속해서 어른거렸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병이 난 게 분명했다.
결국 그는 마음을 굳히고 다시 휴대 전화를 들었다. 몇 번의 신호음 뒤 다시 애슐리의 음성이 들려오자 코이는 다짜고짜 용건을 꺼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갈게.”
- 뭐?
건너편에서 애슐리가 당황한 듯 물었다. 흔치 않은 반응이었으나 코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걱정이 돼서 못 참겠어. 갈게, 허락해 줘.”
- ……지금 나한테 허락을 구하는 게 맞아?
애슐리가 사이를 두고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맞아.”
코이는 즉시 대답했다.
“실은 나 지금 굉장히 떨려. 하지만 네가 너무 걱정돼. ……만약에 내가 정말 필요 없다면, 혼자 있고 싶은 거라면.”
그는 긴장된 한숨을 내쉰 뒤 덧붙였다.
“그럼 참을게. 정말 너무 걱정되지만.”
애슐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시 화가 난 걸까? 코이는 이내 불안해졌다. 내가 너무 나댔을까? 좀 친절하게 대해 줬다고 너무 들뜬 거 아냐? 애쉬가 나한테 질렸으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릴까?
- ……풋.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느껴졌을 때,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코이는 어, 하고 숨을 죽였다. 애슐리는 졌다는 듯이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 알았어, 와. 허락해 줄게.
“아…….”
- 그 전에 미리 말해 둘 게 있어.
기뻐 자신도 모르게 소리칠 뻔했던 코이를 애슐리가 가로막았다.
- 내 얼굴이 지금 심각하게 엉망이거든. 보면 놀랄지도 몰라. 각오하고 와.
너무 울어서 퉁퉁 붓기라도 한 걸까?
“설마, 그럴 리 없어.”
코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애쉬의 얼굴은 너무너무 멋있을 거야. 지금도 끝내주게 잘생겼을걸.”
- 그 생각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여전히 웃음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던 애슐리가 전화를 끊었다. 코이는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뒤 와아, 하고 두 팔을 쭉 뻗었다. 다행이다. 기분이 아주 우울하진 않은 것 같아.
실컷 울고 후련해진 건지도 모르지.
코이는 생각했다. 자신은 실연을 당해 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애슐리를 위로해 줘야겠다고. 거기까지 떠올린 그는 급히 휴대 전화를 꺼내 검색어를 입력했다.
실연한 친구를 위로해 주는 법.
화면에 가득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재빨리 훑으며, 코이는 할 수 있는 방법을 골라 꼼꼼하게 메모를 했다.
*
“코너 나일즈, A 고등학교.”
학생증을 확인한 경비원이 매서운 눈길로 코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전처럼 산을 돌아서 갈까도 생각했지만 애슐리에게 허락도 받았으니 번거로워도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경비원은 코이를 세워 둔 채 전화기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애슐리에게 전화를 하는 게 분명했다.
잠시 기다렸던 그가 코이의 인적 사항을 말하고 방문객 확인을 했다. 경비원이 전화를 끊고 출입을 허락할 때까지 코이는 자전거 위에 앉아 지루하고도 초조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경비원이 한 손을 들어가라는 표시를 했다. 코이는 황급히 페달을 밟아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기다려 줘, 애쉬. 지금 갈게!
*
대체 왜 이런 꼭대기에 집을 지을까.
코이는 녹초가 되어 페달을 밟으며 이를 악물고 생각했다. 답은 알고 있었다. 이토록 높은 위치에 지어진 덕에 어마어마하게 멋진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풍경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이렇게 올라가기가 힘들어서야.
물론 그것에 대한 답도 알고 있다. 이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결코 낡아 빠진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르지 않기에 상관업다는 걸.
때마침 승용차가 그의 옆을 쌩하니 스쳐 달려갔다. 코이는 뒤에 남은 배기가스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비틀비틀 꾸역꾸역 페달을 밟아 올라갔다. 마침내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아, 하아, 우웩.”
숨이 너무 차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코이는 헐떡거리며 벽에 기대어 호흡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문득 시야에 넓은 하늘이 들어왔다. 걸리는 것이라곤 전혀 없는, 끝없이 펼쳐진 새파란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을 때였다.
아련하게 발소리가 들려왔다. 코이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다가오는 발걸음은 분명 애슐리의 것이었다. 코이가 이 집에 올 때마다 그랬지만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지금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외에는.
“코이?”
애슐리의 음성에 코이는 응, 하고 벽에서 몸을 떼려고 했다.
“잠깐.”
갑자기 애슐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의아해하며 멈춰 서자 벽 뒤에서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얼굴을 보기 전에 할 얘기가 있는데, 보고서 놀라지 마.”
“응, 각오하고 왔어.”
코이는 비장하게 약속했다. 머릿속에는 애슐리의 온갖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공통된 것은 울어서 벌게진 얼굴과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멋있을 거야.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