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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30/216)

30화

“평생 나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

“어?”

코이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애슐리가 다시 웃었다. 계속 저렇게 웃는 걸 보면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있던 게 분명해. 코이는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매점에 들어와 있는 동안 생긴 기분 좋은 일이 뭘까?

‘홈커밍 티켓?’ 하고 생각했던 그는 곧 머릿속에서 그것을 지워 버렸다. 여자 친구하고 가라고 준 티켓을 나하고 가겠다고 하다니, 분명 이게 이유는 아닐 것이다. 여자 친구에게 무슨 사정이라도 생긴 걸까? 그러니까 나와 가려고 하는 거겠지?

그럼 애초에 홈커밍 파티 티켓을 사러 온 이유가 뭐야? 앞뒤가 전혀 안 맞잖아. 대체 뭐지? 전혀 모르겠어!

머릿속이 온통 뒤엉켜 버려 코이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애슐리가 하는 말들은 죄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 확실한 건 그가 무슨 소리를 하건 코이는 전부 다 따를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정말 갈 거야? 나랑? 홈커밍 파티에?”

“그래.”

애슐리가 말했다.

“난 너와 가고 싶어.”

그 말은 무엇보다 기뻤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남자끼리 가기도 해?”

조심스럽게 물은 코이에게 애슐리가 되물었다.

“나와 가는 게 싫어?”

“뭐? 아냐, 절대 아냐!”

코이는 펄쩍 뛰며 두 팔을 마구 휘저었다. 애슐리가 다시 웃었다.

“그럼 됐네.”

“어…… 응.”

뭔가 얼렁뚱땅 돼 버린 듯했지만 어쨌든 결정은 나 버린 모양이었다. 코이는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애슐리를 올려다봤다. 애슐리 또한 그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무심코 열려 있는 입술에 고정되었다.

키스하고 싶다.

너무나 강한 충동에 그는 세게 주먹을 움켜쥐어야 했다. 참아, 애슐리 도미니크 밀러. 애슐리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넌 아직 고백도 안 했잖아.

“남은 건 이게 다야?”

애슐리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코이는 먼저 걸음을 옮긴 그를 급하게 쫓아갔다.

“아, 응. 이만큼만 정리하면 돼.”

“그래, 빨리 끝내자.”

“뭐?”

깜짝 놀란 코이에게 먼저 상자를 들어 올린 애슐리가 말했다.

“어서 끝내고 가자고,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아니, 저, 그런데.”

코이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일이잖아, 내가 혼자 하면 돼.”

“그냥 같이하면 빨리 끝나잖아. 어서 끝내 버리고 뭐라도 먹으러 가자고.”

애슐리가 빈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올리면 돼?”

“아, 응. 맞는데…….”

코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애슐리가 들고 있던 상자를 선반 위에 밀어 넣었다. 코이가 끙끙거리며 들어서 발판을 밟고 올라가 정리해야 했던 그것을 애슐리는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또 있어?”

금세 돌아서서 묻는 애슐리를 코이는 한 번 더 만류했다.

“정말 괜찮아, 애쉬. 이건 내 일이야, 내 봉사 활동 점수라고.”

“코이, 난 지금 죽도록 배가 고파.”

애슐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빨리 끝내고 가자고. 너도 저녁 못 먹었지? 네가 가져온 저녁이 저거 아냐?”

애슐리가 흘긋 시선을 던졌다. 곰팡이 핀 빵 봉지가 들어가 있는 휴지통에 덩달아 시선을 향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저 저녁 식사를 꺼내서 먹을 생각이 아니면 어서 끝내고 가자고. 너무 늦으면 싸구려 햄버거 말고는 먹을 게 없어져.”

애슐리의 의지는 확고했다. 결국 코이는 그를 이기지 못하고 손을 들어 버렸다. 코이의 말에 따라 남은 물건을 정리하면서 애슐리는 이따금 코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코이의 마음이 나와 같다고는 확신할 수 없어.

그는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을 느끼면서도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코이는 지금까지 그에게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코이에게 나는 그냥 친구일 수도 있어. 좋아하는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큰.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설령 자신과 같은 마음이더라도 코이가 그것을 우정과 구분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그것도 아주 낙관적인 기대에 불과했다. 그리 달가운 결론은 아니었지만 애슐리는 인정했다.

나는 짝사랑을 시작한 건지도 몰라.

*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애쉬.”

코이는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트렁크에서 코이의 낡은 자전거를 꺼내 인도에 내려 준 애슐리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집까지 안 바래다줘도?”

“응, 괜찮아. 저 모퉁이만 돌면 되는걸.”

애슐리는 썩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지만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그는 물러날 때와 들이댈 때를 아주 잘 알았다. 지금은 물러날 타이밍이었다.

“그래, 코이. 잘 가.”

애슐리가 먼저 인사를 하자 코이 또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애쉬. 조심해서 가.”

막상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둘 다 움직이지는 않았다. 애슐리는 코이가 자신이 떠나고 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만약에 공식적인 데이트였다면 애슐리는 코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 차를 출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함께한 시간은 데이트가 아니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선뜻 차에 오른 애슐리가 시동을 걸고, 코이가 한 발 물러났다. 예상대로 코이는 애슐리가 저만큼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룸미러에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애슐리는 차를 갓길에 세웠다.

“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핸들 위에 엎드린 그는 그제야 쌓였던 긴장을 풀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에리얼이 첫 여자 친구인 것도 아니었고, 이전에도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했다. 모두 그와 잘 맞았고 설렘도 있었다. 서로의 합의하에 관계를 끝냈지만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함께 있는 내내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코이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기억하기 위해 전신의 세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기다 수시로 키스하고 싶은 자신을 억누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어째서 코이는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가슴 벅찬 행복을 좀 더 음미하고 싶었지만 그에겐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더 늦어도 안 되고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애슐리는 잠시 고민했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잠깐 만날 수 있어? 너희 집 앞으로 갈게.]

몇 초 뒤 알림이 왔다.

[뭔데?]

애슐리가 다시 문자를 두드렸다.

[만나서 얘기해.]

이번에도 답은 금방 돌아왔다.

[알았어. 오면 메시지 보내.]

애슐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에리얼의 집으로 향하면서, 그는 일부러 머릿속을 비우려고 애썼다. 어쨌든 잘못한 건 자신이다. 에리얼이 어떤 비난을 하건 모두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따귀를 세 대나 맞았다.

*

주말 하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창하기만 했다. 코이는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언제나 그랬듯 텅 비어 있는 냉장고를 확인한 후 자전거를 타고 먹을 걸 사러 나왔다. 주말까지 먹을 빵을 미리 사 놨지만 전날 애슐리가 그것을 전부 버려 버린 탓에 다시 먹을 게 없어졌다.

전날 팔다 남은 빵을 모아서 팔곤 하는 매장을 향해 가려던 그는 충동적으로 방향을 돌려 학교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가면 많이 돌아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코이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쯤 아이스하키 팀이 훈련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전날 늦게까지 애슐리를 만났지만 또 보고 싶었다.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바쁘게 페달을 밟았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학교에 다다른 그는 자전거에 올라탄 채로 천천히 교정을 돌며 운동장을 훑어보았다. 체력 훈련 중인 아이스하키 팀을 보며 눈으로 애슐리를 찾는데, 아무리 살펴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빌!”

틈을 살피던 코이는 마침 빌이 물을 마시려 무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을 걸었다.

“안녕, 코이.”

“안녕, 빌.”

숨을 몰아쉬며 인사를 하는 빌에게 마주 인사를 건넨 코이가 서둘러 용건을 꺼냈다.

“저기, 애쉬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야? 오늘은 안 나와?”

“어? 아아.”

빌은 생수 뚜껑을 돌려 따며 대답했다.

“아프다고 해서 며칠 쉬게 됐어.”

“애쉬가 아프다고?”

뜻밖의 소식에 코이는 놀라 물었다.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빌이 500밀리리터의 물을 한 번에 비우고 난 뒤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감기라던데.”

“또?”

이전에도 감기에 걸려 끙끙 앓았던 애슐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감기 덕에 코이는 그와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슐리가 아픈 게 좋을 리 없었다.

“많이 아프대? 훈련을 빠질 정도면…….”

그것도 며칠이나.

조심스레 묻자 빌은 피식 웃었다.

“글쎄, 정말 아픈 것일 수도 있고 감기가 아닌 걸 수도 있고.”

“응? 무슨 말이야?”

의아해하는 코이에게 빌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앨하고 헤어졌잖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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