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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216)

28화

*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로 퍽이 날아갔다. 급하게 몸을 날린 키퍼의 노력이 헛되게도 퍽은 곧바로 그물에 꽂혔다. 애슐리는 자신에게 퍽을 패스해 준 빌과 허공에서 가볍게 손을 마주쳤다. 때마침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후아아.”

페트병의 물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켠 빌이 입술을 훔치더니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에리얼하고 헤어질 거야?”

“무슨 소리야, 그게.”

역시나 페트병을 한 번에 절반 이상 비운 애슐리가 말했다. 다소 빨라진 숨을 몰아쉬며 빌이 말을 이었다.

“네가 연락도 안 받고 만나 주지도 않았다면서.”

“바빴다니까.”

“그건 핑계지. 야, 우리끼리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냐? 다 아는데.”

‘안 그래?’ 하듯이 빌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녀석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음이 식으면 연락부터 뜸해지지.”

“훈련도 없었고 방학이었는데도 매일 만나지 않은 건 이상해.”

“이별의 전조지.”

“너 솔직히 말해 봐, 정말 다른 누구 생긴 거 아냐?”

모두의 관심이 애슐리에게 쏠렸다. 애슐리는 혐오스러워하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인상을 썼다.

“아니라고, 그리고 난 앨에게 질리지도 않았어.”

“싫어지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좋아질 수는 있는 거지.”

누군가 한 말에 빌이 지적했다.

“친구, 그걸 사람들은 양다리라고 얘기해.”

주변에서 오오, 하고 야유를 하며 박수를 쳐 댔다. 하지만 정작 애슐리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바람을 피운 것도,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긴 것도 아니다. 에리얼에 대한 호감도 예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예뻤고, 다정했으며, 애슐리와 잘 맞았다.

그런데 뭐지, 이 꺼림칙한 기분은.

“……망할.”

그는 거친 욕설을 내뱉고 남은 물을 전부 마셔 버렸다. 빈 페트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애슐리를 보고 다른 녀석들이 서로 시선을 나누며 눈치를 살폈다.

“음, 저, 티켓은 샀어?”

코를 긁으며 말을 꺼낸 것은 빌이었다.

“아니, 아직.”

애슐리의 대답에 빌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올해는 티켓을 적게 뽑았다고 그러던데. 늦게 가면 없을지도 몰라.”

“그래, 끝나고 바로 매점에 가 보면 어때?”

다른 녀석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옆에 있던 녀석이 가볍게 핀잔을 줬다.

“매점은 진작 닫았지, 멍청아.”

“아냐, 요즘은 늦게까지 하던데? 나도 어제 훈련 끝나고 갔는데 그때 문을 닫더라고.”

원래 매점은 수업이 끝나는 때와 비슷한 시간에 문을 닫는다. 이렇게 늦게까지 문을 여는 건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나 몇몇 시즌에 한해서였다. 어쨌든 훈련이 끝나고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알았어, 고마워.”

애슐리가 인사를 하자 다시 코치가 호루라기를 불었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알림이었다. 다시 링크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빌이 그를 붙잡았다.

“애슐리.”

흔치 않게 정식으로 부르는 이름에 애슐리가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빌은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말했다.

“농담하는 거 아냐, 정말로. 에리얼이 많이 불안해해.”

그는 평소와 달리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애슐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그냥 고개를 돌렸다. 먼저 나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녀석들 사이로 가 자신의 자리에서 멈춰 서자 곧 연습 경기가 시작되었다.

빌의 얘기는 어느 정도 타당했다. 그 점이 애슐리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티켓이나 빨리 사자.

퍽을 쫓아가며 애슐리는 생각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홈커밍 파티에 가고,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고, 이전처럼 시간을 보내면 에리얼도 마음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코이를 멀리 하는 쪽이 좋겠어.

그동안 에리얼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니 그녀에게 집중하는 게 맞았다. 한데 그러면 코이와 함께 보낼 시간이 없어질 게 뻔했다.

예전처럼.

코이를 알기 전까지는 그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딱히 멀리하는 건 아니지.

애슐리는 뒤늦게 생각을 고쳤다. 단지 다른 친구들을 대하는 것처럼 그를 대하는 것뿐이다. 어차피 매일 수업 시간에 보니까 따로 얼굴을 볼 필요까진 없었다. 어차피 코이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쁠 테고.

날아온 퍽을 올려친 애슐리가 급히 퍽이 날아간 방향을 쫓아갔다. 어째서 지금 코이를 생각하는 거지? 이상하잖아. 그는 달려드는 적을 몸으로 밀어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에리얼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코이를 멀리해야 한다니, 어째서 생각이 그렇게 흐르는 거야? 애초에 코이를 떠올린 것부터가 이상하잖아.

역시 그 녀석을 만나지 말아야겠어.

그는 이유를 찾기보다 외면하는 쪽을 택했다. 다 잘될 것이다. 어쩌다 마음이 맞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 잠시 들떴던 것뿐이었다. 이제 그만둘 때도 됐지.

애슐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물론 생각대로 일이 돌아갔을 때의 얘기였다.

*

“어.”

훈련이 끝나자마자 매점을 찾은 애슐리는 그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동급생과 눈이 마주친 순간 멈춰 서 버렸다. 마침 들어온 물건을 제자리에 넣으며 정리하다 고개를 돌린 예의 동급생 역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애쉬!”

반갑게 외치는 음성에 애슐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코이.”

그는 정리하던 물품을 내려놓고 애슐리를 향해 급하게 다가왔다. 애슐리는 그 자리에 선 채 코이가 다가오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바로 앞까지 온 코이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애슐리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왔어? 왜,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어, 어.”

애슐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그만 말을 더듬었다. 코이는 그런 그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연습 끝났지? 저녁은 어떻게 했어? 나 빵 사 놓은 거 있는데 먹을래?”

신나게 재잘거리는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필 당분간 코이를 만나지 말자고 결심을 하자마자 이렇게 마주치다니.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애슐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티켓을 사러 온 것뿐이잖아.

그렇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다. 애초에 왜 이렇게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코이와 자신은 그저 친한 친구가 아닌가.

아니, 코이가 여자애였다면 모두가 의심을 했을 거야.

그만큼 애슐리는 코이와 붙어 다녔다. 스스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코이가 정말 여자애였다면.

……그랬다면 나는.

“자!”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어진 빵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내려다보자 코이가 그에게 빵을 내밀고 있었다.

“내가 먹으려고 봉지를 좀 뜯었지만 아직 입은 안 댔어.”

얘기를 듣고 있는데, 코끝에 그리 좋지 않은 시큼한 냄새가 닿아 왔다. 당연했다. 기한이 지난 것들을 모아 싸게 파는 매장의 이벤트를 통해 구입한 것이니까.

“……이거, 상한 거 아냐?”

애슐리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어?”

당황해하며 빵을 확인한 코이의 눈이 금세 커졌다. 황급히 빵 봉지를 뒤로 감추는 그의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 애슐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의심이 가득한 시선에 코이는 등뒤로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어, 저기, 이건 저, 그러니까.”

“이리 줘 봐.”

애슐리가 팔을 뻗었다. 코이는 황급히 몸을 돌려 피했지만 애초에 코이가 애슐리의 공격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는 고등학교 아이스하키 우승팀의 주장이었다. 코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봉지를 빼앗겨 버렸다.

“아!”

몸을 돌린 순간 다른 쪽 손을 뻗어 간단히 봉지를 낚아챈 애슐리는 다급하게 팔을 허우적거리는 코이의 머리를 눌러 멀찍이 떼어 놓았다. 필사적인 코이의 몸부림을 무시한 채 비닐봉지에 담겨 있는 빵을 자신의 눈높이로 들어 올려서 이리저리 살펴보던 애슐리가 곧 얼굴을 찡그렸다.

“곰팡이가 생겼잖아, 이거.”

“어? 정말?”

코이가 파닥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애슐리가 그의 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고 대신 빵 봉지를 눈높이에 맞춰 보여 주었다. 애슐리의 말대로 소스가 발려 있는 샐러드 빵 한쪽에 점점이 검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정말이네.”

코이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인정했다.

“미안, 하마터면 널 위험하게 만들 뻔했어.”

미안해, 하고 다시 사과한 코이에게 애슐리는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네가 탈이 날 뻔한 게 더 문제지. 그냥 먹었으면 어쩔 뻔했어? 냄새가 바로 나던데 몰랐어?”

“어, 어어…….”

코이는 말문이 막혀 눈만 깜박거렸다.

“벌써 상했을 줄은 몰랐어.”

간신히 할 말을 떠올려 변명을 하자 애슐리는 바로 그것을 휴지통에 넣어 버렸다.

“앞으로는 좀 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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