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9월이 가까워졌지만 날씨는 여전히 무더웠다. 이른 아침부터 높이 떠오른 태양의 따가운 햇살이 벌써부터 눈을 아프게 했다.
코이는 언제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예전엔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갈 때마다 우울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학교에 가 봤자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는 데다 그를 괴롭히는 넬슨 패거리를 피해 다니려 안간힘을 쓰고,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혼자 외롭게 수업을 옮겨 다니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안녕, 코이!”
“안녕, 사라!”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코이 역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전거를 지정된 자리에 세워 두고 사물함을 찾아가는 동안 몇 번 더 인사를 나눴다. 코이는 예전과 달라졌다. 훨씬 당당했고, 자연스러웠다. 물론 이렇게 된 건 모두 애슐리의 덕분이었다.
사물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 쪽에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코이는 이내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애슐리가 다른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과 걸어오고 있었다.
술렁이는 아이들도, 그들을 향한 열렬한 시선도, 여유 있는 팀의 분위기도 모두 방학 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코이만은 달랐다. 예전처럼 그들을 피하지도, 구석에 숨어 부러움을 곱씹지도 않았다. 단지 사물함의 문을 닫고 언제쯤 인사를 할까 타이밍을 찾고 있을 뿐이다.
마침 누가 농담을 했는지 와르르 웃음소리가 났다. 함께 웃고 있던 애슐리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이어 코이와 시선이 마주치고, 코이는 슬그머니 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애슐리의 눈이 더 가늘게 접히고 미소가 더 커졌다. 코이 역시 마주 웃어 보인 뒤 먼저 돌아섰다.
그렇게 첫 수업을 들을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잠시 뒤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코이!”
“우왓!”
갑자기 어깨를 낚아채는 바람에 코이는 그만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드니 역시나 애슐리였다. 굵은 팔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애슐리가 남은 손으로 코이의 덥수룩한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코이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애슐리는 웃기만 했다.
“네가 혼자 가 버리니까 그러지.”
그의 가벼운 비난에 코이는 슬쩍 눈치를 봤다.
“어차피 교실에서 만나잖아, 같은 수업 들으니까. ……거기다 친구들하고 즐거워 보이던데.”
본심을 감추고 싶었지만 무심코 털어 내고 말았다. 순간 당황한 코이에게 애슐리는 흐응, 하고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더니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이제 다시 훈련 시작할 거라서 그거 얘기하고 있었어.”
하긴, 그런 얘긴 해 봤자 나하곤 대화가 안 될 테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코이는 수긍했지만 곧 다른 데 신경이 쓰였다.
“무거워, 좀 놔.”
애슐리는 여전히 한 팔을 코이의 어깨에 두른 채 걷고 있었다. 일부러 투덜거리자 애슐리는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싫은데.”
괜히 놀리는 말에 코이는 끙, 하고 팔을 떼어 보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애슐리는 되레 팔에 힘을 줘 코이의 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왁!”
코이가 지르고 만 괴상한 비명 소리에 애슐리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코이는 그를 흘겨봤지만 곧 덩달아 웃고 말았다.
여름방학을 기점으로 코이는 애슐리와 급격히 가까워졌다. 애슐리는 자주 그를 집으로 초대했고, 코이는 기꺼이 응했다. 애슐리의 말대로 멋진 나날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들은 함께 드라이브를 했고,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었으며, 같이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이렇게 반짝이는 나날들은 처음이었다.
나란히 걷고 있던 애슐리가 갑자기 코이의 뒤에서 그의 양어깨에 팔을 걸치고 머리 위에 턱을 괴었다.
“아아, 다시 방학이었으면 좋겠다.”
“자, 잠깐, 잠깐만.”
코이는 위에서 내리누르는 무게에 당황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애슐리는 휘청거리는 코이의 발걸음에 맞춰 뒤뚱뒤뚱 교실까지 걸어갔다.
“어.”
간신히 교실에 다다라 이제 해방이라고 생각한 순간, 코이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멈칫하고 말았다.
“왜 그래?”
애슐리가 여전히 코이의 머리통 위에 턱을 괸 채로 물었다. 코이는 즉시 대답하지 못하고 잠깐 머뭇거렸다.
“자리가 없어.”
코이의 중얼거림에 애슐리가 그제야 몸을 뗐다. 한 차례 교실을 둘러봤던 애슐리가 말했다.
“저기 있잖아.”
그가 가리킨 곳에는 딱 두 개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코이가 항상 앉는 구석자리가 아닌, 정중앙에 앞뒤로 놓여 있는 자리였다.
애슐리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물론 애슐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설명을 하는 것도 꼴이 우스웠다. 대신 그는 손을 들어 빈자리를 가리켰다.
“넌 저기 앉아.”
“어디?”
“뒷자리.”
코이가 말했다.
“내가 뒤에 앉으면 안 보인다고.”
예전에 반대로 앉았다가 골탕을 먹었던 때를 생각하면 절대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또다시 애슐리의 거대한 등에 시야가 막히는 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대입 시험을 망치긴 했지만 내신 점수를 관리하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그런 코이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애슐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걸음을 옮겨 코이가 가리킨 뒷자리에 앉았다. 코이는 그가 자리를 잡은 뒤에야 발을 떼 당당하게 앞자리에 앉았다. 곧 수업이 시작되고, 코이는 자세를 바로 했다.
한창 진지하게 수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애슐리가 말을 걸었다.
“코이.”
“응?”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정한 채 등을 한껏 젖혀 귀를 기울이자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잘 보이는데?”
코이는 기가 막혀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자 애슐리가 씨익 웃었다. 처음으로 그 잘생겼지만 얄미운 얼굴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어졌다.
“너 같은 떡대가 앞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해 봐, 안 보일걸.”
작게 속닥거리자 애슐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난 콩알만 하지 않아서.”
“너!”
“코너 나일즈, 방금 내 질문이 뭐였지?”
갑자기 선생이 큰 소리로 물었다. 당황한 코이는 눈을 깜박이며 말을 더듬었다.
“네, 네?”
이내 선생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코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저기, 그, 그게, 그러니까.”
우왕좌왕하는 그의 모습을 본 선생이 엄하게 주의를 줬다.
“수업에 집중해야지. 자, 모두 여길 봐라.”
한 번 더 학생들의 주목을 끈 선생이 수업을 계속했다. 코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급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슐리가 웃는 소리였다.
애쉬, 너!
코이는 즉시 뒤를 돌아봤으나 애슐리는 그가 노려보는 시선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능청스럽게 앞을 가리켰다.
“수업에 집중해야지, 코이.”
약이 올랐지만 방법이 없었다. 또다시 주의를 듣기 전에 코이는 자세를 바로 했다. 뒤에서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
“정말, 애쉬 너!”
수업이 끝나자마자 코이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보란 듯이 그의 가슴을 탕탕 두드려 댔지만 애슐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런 솜방망이 주먹 따위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이. 그 모습이 한없이 얄미웠지만 애초에 코이가 애슐리를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코이가 한껏 부푼 얼굴로 휙 돌아서자 곧 애슐리가 뒤를 따라왔다.
“코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하고 걷는데, 이내 그를 따라잡은 애슐리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너 홈커밍 파티 갈 거야?”
“아니, 그런 거 안 좋아해.”
난 여자 친구도, 돈도 없는걸.
코이는 슬쩍 물었다.
“넌 가겠지?”
애슐리는 여자 친구도, 돈도 있는 데다 학교의 킹이니까 당연하다. 그는 아마 이전에도 매년 열리는 홈파티에 꼬박꼬박 참가했을 것이다.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예상외로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글쎄,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계속 가지 않았어?”
“그랬지.”
애슐리가 뒷머리를 거칠게 털어 댔다.
“뭐, 아마 가지 않을까. 앨이 갈 테니까.”
“그래…….”
여자 친구가 최우선인 게 당연하지. 코이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나란히 걷던 애슐리가 코이의 뒤에서 또 머리 위로 턱을 괴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코이가 힘껏 버둥거렸지만 애슐리가 어깨 위로 두 팔을 얹기까지 해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됐다.
“아, 편하다.”
“너어!”
코이가 다시 소리쳤을 때였다.
“애쉬!”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애슐리는 물론 코이 또한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머리 위에서 애슐리가 말했다.
“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