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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216)

24화

처음이었다. 정말로 애슐리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만 코이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직 안 잤어?”

스스로가 듣기에도 부자연스러운 높은 음성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만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했다.

- 잘 거야. ……그냥, 잘 들어갔나 해서.

뒷말은 조금 사이를 두고 흘러나왔다. 코이는 그 묘한 간극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잘 왔어. 지금 집 앞이야.”

- 집 앞?

“응.”

애슐리가 다시 물은 말에 코이는 솔직히 말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셔서, 지금 들어가면 안 돼. 괜찮아, 금방 잠들 거야. 별로 춥지도 않고.”

거짓말이었다. 서늘한 밤바람에 저절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열기는 진작 식어 버리고 남은 건 냉한 밤공기뿐이었다.

- 뭐라고?

아차.

애슐리가 되물은 말에 코이가 흠칫 놀랐다. 큰일이다, 애슐리가 의심하고 있어. 코이는 황급히 말을 수습했다.

“아니,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꼭 날 붙잡고 주정을 하셔서, 계속 말을 하시거든. 그걸 들어 줘야 하니까 귀찮아서 그래.”

- 그렇다고 길에 있는 건.

“괜찮아, 괜찮아. 금방 들어갈 거야. 걱정하지 마.”

자신이 아버지에게 맞기까지 한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코이는 안간힘을 써 거짓말을 했다.

화제를 돌려야 해.

코이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애쉬. 그렇게 멋진 저녁 식사는 다신 없을 거야. 석양도 멋있었고, 저녁도 맛있었어.”

그리고 너도 있었어.

얼굴은 금세 달아올랐다. 코이는 화끈거리는 뺨을 급히 쓰다듬었다.

- 그건 틀렸어, 코이.

진심을 담아 한 말에 애슐리가 정색을 하고 부정했다. 멈칫한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 앞으로도 너에겐 수없이 많은 멋진 날들이 있을 거야. 내년에도, 후년에도, 내후년에도.

하지만 네가 없잖아.

코이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의 말은 너무나 따뜻하게 코이를 위로해 줬지만 거기에 애슐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다시 슬퍼졌다.

“……고마워, 애쉬.”

작게 소곤거리자 애슐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이가 할 말을 찾아 머뭇거리는데, 한동안 침묵하던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 그 한정판이라는 인형은 또 언제 들어와?

“응? 인형?”

의아해하며 되물었던 코이는 뒤늦게 아, 하고 깨달았다.

“그 시리즈?”

코이는 황급히 눈을 깜박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글쎄, 다음 주 정도……? 정확히는 몰라. 미안.”

솔직히 말하자 애슐리는 선뜻 말했다.

- 또 들어오면 알려 줘. 사러 갈게.

순간 코이의 귀가 번쩍 뜨였다.

“정말? 올 거야? 나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연이은 물음에 애슐리는 웃음이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 그래.

그 순간 코이의 귓가에서 난데없이 폭죽소 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코이는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좋아!”

막혔던 숨을 토해 내는 것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아!

순간 당황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코이는 급하게 눈을 깜박거렸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어, 저기, 그.”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입을 벌렸지만 제대로 말이 이어지지 않아 계속해서 더듬기만 하던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우린, 친구니까. 그렇지?”

사이를 뒀다가 애슐리가 대답했다.

- 맞아.

후, 코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 그럼 코이, 다음에 또.

“응, 또 만나. 오늘 정말 고마웠어.”

한 번 더 감사의 말을 하자 애슐리가 말을 받았다.

- 나 역시. 약 갖다줘서 고마워.

“응.”

괜히 뿌듯한 기분에 코이는 뺨을 붉히며 흐뭇하게 웃었다. 끊기 싫다. 좀 더 애슐리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코이가 말했다.

“저, 그럼…….”

말끝을 흐리자 애슐리가 먼저 말을 맺었다.

- 그래, 잘 자.

“잘 자.”

코이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애슐리는 바로 전화를 끊지는 않았다. 서로 먼저 끊기를 기다리듯 그렇게 숨만 쌕쌕거렸따. 그러다 애슐리가 건너편에서 먼저 통화를 마쳤다. 코이는 몇 초 더 그대로 꼼짝 않고 있다가 살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 애쉬……?”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대답은 없었다. 역시나 전화는 끊겼다. 후우, 코이는 한숨을 내쉰 뒤 휴대 전화를 든 손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뺨은 화끈거리고 있었다.

하아아.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두 번째로 숨을 들이켰을 때,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생각지 못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코이?

“애, 애쉬?”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한 뒤 황급히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분명히 애슐리였다. 다시 휴대 전화를 귀에 갖다 대자 건너편에서 으흠, 하는 헛기침 소리에 이어 애슐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일 별 일 없으면 놀러 올래?

“너네 집에?”

무심코 되물었던 코이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놀러 오라고? 너네 집에? 또?”

- 그래.

애슐리는 선뜻 대답하고 덧붙여 물었다.

- 아르바이트 있어?

“어, 어?”

코이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물론 있다. 하지만 모처럼 애슐리가 초대해 줬는데 고작 그런 사소한 이유로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무슨 수를 쓰든 가고 말겠어!

코이는 급히 애슐리의 집에 놀러 갈 방법을 떠올리며 응, 하고 대답했다.

“있는데, 끝나고 가면 돼.”

서둘러 대답하자 애슐리는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 좋아, 그럼 내일 보자. 저녁쯤 되나?

“어? 어.”

내일은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녁 전에 갈게.”

- 그래. 잘 자, 안녕.

부드럽게 인사말을 한 애슐리가 짧게 웃음소리를 내더니 덧붙였다.

- 이번에는 정말 안녕이야.

“응.”

코이는 대답했으나 내심으로는 ‘다시 해도 돼, 열 번 스무 번 다시 해도 돼!’ 하고 열렬히 소리치고 있었다. 애슐리는 다시 웃더니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확인한 코이는 한동안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을 설레며 기다렸지만 이번에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다.

“하아.”

코이는 실망감이 배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문득 모터홈이 시야에 들어왔다. 슬그머니 다가가 귀를 기울였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코이는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낡은 문이 끼이, 하고 불길한 소리를 내고, 그는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코이는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바닥에 널브러져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옆에 나뒹구는 빈 술병을 슬쩍 넘어선 코이는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자신의 침대로 향했다. 샤워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신 그는 양치질과 세수만 대충 하고 침대에 누웠다.

아버지가 나가면 바로 씻어야지.

코이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전날 샤워도 하지 않은 더러운 모습으로 애슐리를 만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은 냄새를 맡지 못하니 혹시 악취가 나는 걸 모른 채 그를 만나러 갈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절대 안 돼.

코이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휴대 전화를 꼭 쥔 채 잠을 청하면서, 그는 어서 내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

하아, 하아.

코이는 숨을 헐떡이며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오늘은 당당하게 게이트를 통해 들어왔지만 산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것에는 다를 게 없었다.

보란 듯이 그를 스쳐 달려가는 스포츠카를 본 코이는 열심히 발을 굴렀다. 분명히 힘든데 또 힘들지 않았다. 어서 빨리 애쉬를 만나고 싶다. 코이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드디어 저 멀리 바라던 저택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이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마침내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코이는 너무 숨이 차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은 위기감마저 느꼈다.

하아, 하아.

가슴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선 채 숨만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코이.”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들자 흐릿한 시야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얼굴이 들어왔다. 어느새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고, 대신 어마어마한 기쁨이 솟아났다.

“애쉬.”

코이는 가슴 가득히 행복을 느끼며 환하게 웃었다. 애슐리 또한 그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서 와.”

“응.”

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었어.”

고작 하루뿐이었는데도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리웠는데 표현할 말이 이것밖에 없을까. 한편으로는 아쉬운 기분을 느끼는데, 애슐리가 말했다.

“나도 그래.”

그 말을 듣는 순간 코이의 아쉬움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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