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별것도 아닌 일에 자괴감을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어깨가 축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코이를 뒤로하고 혹시 모자란 게 없는지 카트 위를 살펴보던 애슐리가 말했다.
“스낵바 가서 음료수랑 얼음이랑 좀 챙겨 줄래? 스낵바가 어디 있냐면…….”
“2층 오른쪽이지? 응, 가져올게!”
코이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애슐리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는 표정에 뒤늦게 아차, 하고 실수를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코이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저기…… 어제 너희 집 왔을 때. 너 찾으려고 집 안을 좀…… 돌아다녔거든. 그때 봤었어.”
“아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제 수프를 끓여 왔었지.
속으로 납득한 애슐리와는 달리 코이는 불안해졌다. 멋대로 집을 휘젓고 다닌 것 같아 민망한 한편, 혹시 애슐리가 이 일로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두려워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잔뜩 긴장해서 눈치를 보는데, 뜻밖에도 애슐리는 선뜻 고개를 돌리더니 카트 위의 요리를 점검했다.
어?
어리둥절해하며 바라보자 애슐리가 다시 그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뭐 해?”
“어?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코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다, 다녀올게.”
“그래.”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카트 손잡이를 붙잡았다.
“식사는 어디서 할래? 다이닝? 응접실?”
“어, 난 아무 데나 괜찮아.”
코이는 황급히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애슐리와 함께라면 저 멀리 사막에서 전갈을 잡아먹어도 좋았다. 애슐리는 잠깐 생각했다가 입을 열었다.
“정원에서 먹자. 정자가 있어, 나가면 바로 보일 거야.”
“아, 응.”
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래.”
애슐리는 먼저 카트를 끌고 가며 말했다.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음료랑 컵이랑 가져와.”
“응. 얼음도?”
코이가 마지막으로 묻자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넌 안 먹어도 난 먹거든.”
지금이 애슐리의 오해를 풀 기회였지만 코이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애슐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애슐리가 알게 되는 게 싫었다. 물론 그래 봤자 결코 그와 같은 세계에 살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동떨어진 세상에서 산다는 걸 들키면 정말 애슐리와 영원히 멀어질 것 같았다.
콜라에 얼음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코이는 생각하며 서둘러 스낵바를 향해 달려갔다. 평생 콜라에 얼음을 넣지 못해도 상관없다. 애슐리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
식사를 하는 동안 해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늘 전체가 석양에 물들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굉장하다.”
코이는 식사를 하다 말고 중얼거렸다. 애슐리가 살고 있는 저택은 집의 크기는 물론이고 부지 또한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거기다 언덕이라기보다는 작은 산에 가까운 고도에 위치한 덕분에 시야까지 높았다. 그래서 부지에 서면 산 아래의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저녁에는 각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며 더없이 황홀한 야경을 선사했다.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라 코이는 무심코 우와, 하고 작은 소리로 감탄했다. 낡고 오래된 구식 모터홈에서 살고 있는 코이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애슐리는 매일 이런 야경을 보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자신과 애슐리의 거리가 또다시 멀게 느껴졌다. 콜라에 얼음을 넣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과의 차이만큼.
“왜 그래?”
애슐리가 물었다. 멍하니 넋을 잃고 있던 코이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런 생각을 해 봤자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건 현재다. 애쉬와 난 지금 함께 저녁을 먹고 있고, 그걸로 된 거야.
“맛있어.”
음식의 맛을 거의 느끼지 못하면서도 코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그가 애슐리에게 감춘 무수한 비밀 중 고작 하나일 뿐이었다.
*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애쉬.”
늦은 시간, 돌아갈 준비를 마친 코이가 감사의 말을 했다. 애슐리는 평소처럼 웃지 않고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데려다주겠다니까.”
“아냐, 정말 괜찮아.”
코이는 손을 내저으면서까지 극구 사양했다.
“자전거 타면 금방이야.”
애슐리에겐 자신이 살고 있는 초라한 모터홈의 몰골을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코이 하나로 충분하다.
“아직 감기 기운도 남아 있는데 쉬어야지, 넌.”
코이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의 몸이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아직도 열이 나는데 무리를 해서 코이를 데려다주고 데려오기까지 했으니까.
저녁 식사 후 한 번 더 약을 먹인 코이는 남은 약을 잘 포장해 애슐리에게 넘겨주었다. 절대 복용을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알았어.”
마지못한 듯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이는 한 번 더 웃어 보인 뒤 자전거의 핸들을 붙잡았다.
“코이.”
“응?”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애슐리가 그를 보고 있었다. 말을 하길 기다렸지만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응…….”
왠지 아쉬워져서 머뭇거렸던 코이는 좋은 것을 생각해 냈는지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곧 새학기잖아.”
“그런데?”
애슐리가 묻는 말에 코이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매일 볼 수 있겠네.”
그제야 애슐리도 이해한 듯 얼굴이 풀어졌다.
“그래.”
애슐리가 말했다.
“그렇구나.”
“응.”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코이가 힘차게 페달을 밟고 올라섰다.
“안녕, 애쉬. 어서 감기 나아!”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을 크게 흔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애슐리가 마주 손을 흔들기 전에 먼저 그는 고개를 돌렸고,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남은 건 애슐리와 지긋지긋한 감기뿐이었다.
“……하아.”
일부러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었던 애슐리는 곧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경험했던 적막감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
하아, 하아.
코이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최대한으로 속도를 내어 달려갔다.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한다. 전날 허락도 없이 외박을 해 버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무척 화가 나 있을 것이다.
물어봤어도 절대 허락해 주진 않았겠지만.
내심 생각했던 코이는 더욱 급하게 자전거를 몰았다. 재빨리 침대에 들어가 눈에 띄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고 있으면 억지로 깨워 그를 때리거나 행패를 부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헉.”
어두운 전등이 들어와 있는 모터홈을 발견한 순간 코이는 놀라 숨을 삼켰다. 그 자리에 자전거를 멈추고 서서 한동안 지켜보는데, 안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욕설이 섞인 고함소리는 발음이 불명확했으나 코이를 찾는 게 분명했다.
지금 눈에 띄면 안 돼.
이미 많은 경험으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걸리면 항상 죽도록 맞았다. 차라리 밤이슬을 맞으며 밖에서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눈 뜨자마자 일을 하러 나갔으므로 지금만 잘 넘기면 된다. 코이는 결심을 하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모터홈의 불빛이 보이는 정도로 거리를 두고 몸을 숨겼다.
자전거를 바닥에 눕히고 작게 웅크려 앉아 모터홈을 보고 있자니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큰 저택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다니. 거기다 애슐리와 함께였다.
애슐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까지 했는데도 현실감이 없었다. 어쩌면 모두 내가 꾼 꿈이었던 건 아닐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내가 지금까지 꿈을 꿨나 봐! 혹시 시험을 본 것도 그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휴대 전화가 울렸다. 화들짝 놀라 화면을 봤던 코이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애슐리의 번호가 떠 있었다.
“여, 여보세요?”
당황해 더듬거리며 전화를 받자 잠깐 사이를 두고 애슐리가 반응했다.
- 코이?
“아, 응.”
코이는 저절로 가빠지는 숨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애쉬.”
일부러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음에도 여전히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누가 날 놀리려고 장난을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문득 떠올렸던 코이는 이내 부정했다. 자신에게는 그런 장난을 칠 정도의 지인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애쉬가 맞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