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 집에 사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차를 주차하며 대답했다.
“게이트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보안이 좋은 편이지.”
크기를 물은 건데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더 묻기에도 민망해져서, 코이는 “그렇구나.” 하고 말을 멈춰 버렸다.
부드럽게 차를 세운 애슐리가 먼저 운전석에서 내렸다. 코이도 역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는데,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어.”
먼저 가던 애슐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코이는 뒷좌석을 가리켰다.
“여기, 인형.”
무심코 시선을 따라간 애슐리는 곧 납득했다. 뒷좌석에 쪼르르 안전벨트를 매고 앉아있는 못생긴 인형들을 본 코이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다 같이 드라이브를 하고 있어.”
“안전벨트도 착실하게 맸지.”
“맞아.”
코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이 준 선물이 이렇게 애슐리와 내내 함께 있는다고 생각하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애슐리는 빤히 그의 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제.”
조용한 음성에 코이가 고개를 들었다. 애슐리의 등 뒤로 한 차례 바람이 불어와 그의 밝은 금발이 이리저리 헝클어졌다. 애슐리는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선 채 코이를 응시하며 말했다.
“왜 안 갔어?”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기만 하는 코이에게 애슐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어제 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네 손을 붙잡긴 했는데, 잠들 때까지만 있었어도 됐잖아? 그냥 놓고 갔으면 몰랐을 텐데, 왜 안 갔어?”
애슐리가 진지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시험 전날이었는데.”
다음 기회도 물론 있겠지만 한 번의 기회를 놓치는 건 누구에게나 아쉬운 일이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점검을 해야 하는 중요한 시간을 코이는 애슐리에게 잡혀 그냥 허비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이유가 뭔지 애슐리는 궁금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를 향해 코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이 점차 밝아지며 만면에 가득히 웃음을 머금었다.
“약속했잖아, 애쉬. 옆에 있겠다고.”
환하게 웃는 코이의 얼굴을 애쉬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는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어째선지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고, 심장이 무섭게 뛰어 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울기 시작한 태양이 코이의 얼굴을 오렌지 빛으로 물들이고, 그를 올려다보는 갈색 눈동자를 마치 황금처럼 빛나게 했다.
아.
애슐리는 그만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폭하게 질주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릴 것 같았다.
약속 같은 건 믿지 않아.
애슐리는 생각했다. 함께 있겠다는 말 따위 절대로 믿지 않아. 그런 건 모두 거짓이니까.
하지만.
코이의 웃는 얼굴이 애슐리의 눈동자 가득히 차올랐다.
하지만 네 말은 왜 이렇게 내 심장을 설레게 하는 걸까.
*
저택은 언제나처럼 텅 비어 있었다.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저택의 고요함에 코이는 문득 궁금해졌다.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 오는 거야?”
코이의 물음에 애슐리는 간단히 답했다.
“휴가 갔어.”
“그렇구나……. 그럼 언제 와?”
“글쎄, 다음 주?”
건성으로 말했던 애슐리가 덧붙였다.
“며칠 먹을 건 만들어 놓고 갔으니까 모자라면 배달시키거나 밖에서 사 먹으면 돼.”
“그렇구나.”
코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먹는 것만 중요한 건 아니잖아, 하고 생각했다. 혼자 음식을 데워서 그 넓은 저택에 앉아 저녁을 먹는 애슐리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도 그런데.”
“응?”
작게 중얼거렸던 코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물론 애슐리와 자신은 전혀 다르다. 친구라고는 애슐리뿐인 데다 학교 아니면 아르바이트에 쫓겨 다니고, 낡아 빠진 구식 모터홈에서 깜박이는 전등과 싸우며 과제를 하다 술에 취한 아버지를 피해 납작한 매트리스 위에서 숨을 죽이고 잠이 든 척해야 하는 코너 나일즈와 그가 어떻게 같겠는가.
하지만 곧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니까. 망친 시험도 오늘만큼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럼 휴가가 아닐 때는 언제 와?”
다시 묻자 애슐리가 대답했다.
“내가 없을 때.”
“왜?”
애슐리는 코이가 궁금해하는 것을 손쉽게 알려 주었다.
“가급적 나와 마주치지 않는 게 계약 조건이기 때문이야.”
“응? 그건 왜?”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에 코이는 놀라 다시 묻고 말았다. 애슐리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 아버지는 사생활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여전히 코이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또 그만큼 많은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애슐리의 집안과 같은 부자들의 삶은 아무리 말해 줘도 코이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럼 식사는 그냥 알아서 준비해 놓고 가는 거야?”
주방으로 향한 애슐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코이가 물었다. 애슐리는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대부분은. 특별히 원하는 게 있으면 메모를 남기거나 아버지의 비서를 통해 전달하면 돼.”
“그렇구나…….”
코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보는 애슐리의 생활은 다른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밖으로 나오면 이다지도 큰 차이가 있었다. 벌써 두 번째인데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저택의 규모에 새삼 위압감을 느끼며 코이는 애슐리의 뒤를 따라갔다.
“저녁부터 먹자.”
“응.”
뒤를 돌아보고 말한 애슐리에게 선뜻 고개를 끄덕인 코이는 그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2층의 주방과 다르게 다이닝을 위한 메인 주방은 거대한 저택의 크기만큼이나 넓었고, 심지어는 냉장고가 네 대나 있었다. 디자인이 다 다른 것으로 보아 용도가 다른 게 분명한데, 애슐리가 혼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런 저택에 냉장고가 이렇게 많다니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주방을 채우려면 냉장고 네 대쯤은 아주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벽에 붙어 있는 오븐은 물론이고 조리대 역시 어마어마하게 컸다.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조리 도구도, 무수하게 꽂혀 있는 식칼도 마치 유명한 식당의 주방을 보는 듯 다양했고 잘 모르는 코이의 눈에도 엄청난 고가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화려했다.
우와, 소리를 내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주방을 둘러봤던 코이는 애슐리가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안을 확인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갔다.
“도와줄게.”
코이의 말에 애슐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접시를 꺼내 내밀었다. 랩으로 둘러 놓은 접시에는 미리 재어 놓은 커다란 닭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오븐에 넣고 250도에 30분.”
랩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의 메모를 소리 내어 읽자 애슐리가 말했다.
“오븐에 넣어 놔, 한꺼번에 돌리게.”
“응.”
처음 보는 오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내심 당황했던 코이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애슐리는 몇 개의 요리를 더 꺼냈다. 능숙하게 버튼을 눌러 오븐을 조작한 그는 예열을 기다리는 동안 다시 냉장고의 음식을 확인했다.
“샐러드는 뭐가 좋아? 새우에 아보카도? 연어에 양상추? 아니면 치킨?”
“어…….”
뭐가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데, 애슐리가 세 개를 다 꺼내 카트에 올려놓았다. 코이는 그가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이리저리 기웃기웃하다가 팔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하고 뒤를 졸졸 따라다녀도 봤지만 딱히 뭘 할 틈이 없었다.
식기를 꺼내려 까치발을 하면 그새 애슐리가 슥슥 집어 내려놨고, 포크와 나이프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면 애슐리가 성큼성큼 걸어가 수많은 서랍 중에 하나를 열어 개수를 맞춰 꺼내 놓았다. 그러다 다섯 개나 되는 샐러드 소스 병을 꺼내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어.”
병을 받으려 준비하고 있던 코이는 애슐리가 한 손에 세 병, 다른 손에 두 병씩 들고 돌아서는 걸 보고 멍해졌다.
샐러드 병 목을 잡으면 되는 거였어.
굵고 긴 손가락 마디마다 하나씩 끼운 병을 아무렇지 않게 카트 위에 올려놓은 애슐리를 보고 코이는 작게 탄식했다. 때마침 ‘땡.’ 하고 예열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애슐리의 차지였다.
난 정말 애쉬한테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