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코이는 아이에게 하듯 말한 뒤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베개에 얹어 주었다. 순간적으로 애슐리가 아쉬움을 느낀 것이 무색하게 코이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주고 그 위로 가슴을 토닥이는 손길에 애슐리는 안도하는 스스로를 깨달았다.
“응, 여기 있을게.”
코이가 말했다. 그제야 애슐리는 자신이 그에게 뭔가를 속삭였다는 걸 알게 됐다.
가지 마.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여자 친구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하물며 그를 낳은 부모에게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애슐리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코이를 바라보았다. 흐린 시야에 코이가 미소 짓는 얼굴이 보였다.
……붙잡아도 모두 가 버릴 테니까.
애슐리는 무거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천천히 토닥이는 코이의 손을 붙잡았다. 열이 오르고 있는 자신과 달리 코이의 손은 서늘했다.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애슐리는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았다.
*
코이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애슐리의 얼굴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처음 애슐리를 발견했을 때는 구급차를 부를 뻔했다. 그 정도로 위중해 보였고, 자칫하다간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침착해야 돼.
두려움을 참고 코이는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애슐리가 아프기 시작한 게 언제일까?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건 확실했다. 지금껏 코이는 누군가를 마주치긴커녕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 보자.
그는 결심을 하고 조심조심 애슐리의 방을 나왔다. 오면서 확인한 바로는 스낵바나 간단한 주방이 2층에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수프를 끓일 냄비와 접시, 약을 탈 물컵 정도가 다였으므로 다이닝을 위한 주방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코이는 등 뒤로 문을 닫은 뒤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주방은 공교롭게도 반대쪽에 있었다.
그는 또 한참을 걸어 주방에 도착한 뒤 가져온 인스턴트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닫았던 문을 다시 열 때 애슐리의 잠을 깨운 모양이었지만 어쨌든 약을 먹였으니 됐다. 코이는 잠든 애슐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우선 약효가 어떤지 보자.
가게에서 대충 골라 담은 것이라 효과가 어떨지 불안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땀에 젖은 애슐리의 이마를 가져온 냅킨으로 닦아 준 뒤 자세를 바로 했다.
애쉬가 일어나면 수프를 다시 데워 주고…….
그렇게 생각했던 코이는 무심코 하품을 했다. 뒤늦게 피로가 밀려왔다. 애슐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코이의 손을 잡고서. 코이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 그냥 내버려 둔 채 침대 위에 엎드렸다. 순식간에 잠이 그를 덮쳐오고, 작게 쌔근거리며 코이 역시 잠이 들었다.
*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정신을 일깨우고, 상쾌한 공기가 주변에 맴돌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차가운 공기에 애슐리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
처음에는 그저 멍하기만 했다.
누운 채로 눈을 깜박이다 문득 이상한 기분에 자신의 손을 확인했던 애슐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마 잠든 내내 잡고 있었을 게 분명한 손의 주인을 확인하려 시선을 옮긴 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코이.
텅 비었던 머리가 어렵게 다시 움직였다.
어떻게?
깊은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하나씩 기억이 되살아났다. 난데없이 애슐리를 찾아왔던 그, 수프를 네 종류나 끓여서 먹이려 했던 그, 한 움큼의 약을 사 와서 물과 함께 건네주었던 그.
마지막으로 애슐리의 손을 마주 잡고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던 것까지.
코이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침대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애슐리의 손을 잡고 엎드려 자는 중이었다. 침대 시트 위에 반쯤 파묻힌 얼굴은 잠에 푹 빠져 있어, 웬만한 일에는 결코 깨지 않을 것같이 보였다.
애슐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런 코이를 바라보았다.
그냥 가도 됐을 텐데.
열에 들떠 한 말 따위를 듣고 이렇게 불편하게 잠들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라면 진작 돌아갔을 것이다.
어째서.
애슐리는 생각했다.
왜 가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떠올렸을 때, 갑자기 단조로운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애슐리는 몸을 일으켜 벨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다. 자신의 휴대 전화가 아님을 확인한 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던 그는 곧 깨달았다. 바로 코이의 휴대 전화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여전히 작게 코를 골며 자는 코이의 옷을 조심스럽게 뒤적여 재킷 주머니에 있는 휴대 전화를 찾아낸 애슐리가 알람을 끄려고 화면을 열었다. 그리고 화면에 뜬 스케줄을 확인한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코이, 코이!”
애슐리가 다급하게 코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때까지 애슐리는 아직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놓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애슐리는 큰마음 먹고 코이의 손을 놓는 대신, 양 어깨를 잡고 억지로 그를 일으켰다.
“코이, 일어나! 아침이라고!”
“응…… 으응?”
간신히 눈을 뜬 코이가 웅얼거렸다. 멍하니 눈앞의 얼굴을 바라봤던 그는 이내 헤실 웃었다.
“애쉬, 다 나았어?”
“정신 차려!”
애슐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험이라고, 너! 대입 시험!”
애슐리의 고함 소리에 코이는 졸린 눈만 깜박였다. 그가 반응한 것은 몇 초 뒤의 일이었다.
“뭐라고?”
애슐리 못지않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른 코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코이!”
사색이 되어 냅다 달려가는 코이의 뒤를 따라가려던 애슐리가 순간 현기증에 휘청거리며 눈을 감았다.
망할.
아직 열이 내리지 않았다. 전날보다 훨씬 낫긴 했지만 아직 머리가 무거운 걸 느끼며 그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코이, 기다려!”
여전히 쉰 목소리로 애슐리가 그를 불렀다. 허겁지겁 계단을 달려 내려가던 코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색이 된 그를 보고 애슐리가 난간에 기대서서 말했다.
“시험장에 데려다줄게. 필요한 건 다 챙겼어? 그것부터 먼저 확인해 봐!”
“어? 어어.”
코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아무렇게나 들고 내려온 가방 안을 뒤적였다.
“저, 전화!”
“여기 있어.”
애슐리는 자신의 전화와 코이의 전화를 한 손에 움켜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가 가지고 있을게.”
“고마워.”
코이는 황급히 인사를 한 후 다시 준비물을 점검했다. 다행히 수험표를 비롯해 대부분은 가방 안에 있었다. 하나만 빼고.
“잠깐만, 내 계산기 줄게.”
코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애슐리가 얼른 말하고 다시 계단 위를 뛰어 올라갔다.
“먼저 차에 타고 있어!”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른 애슐리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코이는 불안으로 가슴을 졸이며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애슐리의 차는 전날 보았던 거기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코이는 경고음이 울려 퍼지는 게 아닐까 내심 걱정하며 차에 손을 댔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수석의 문은 간단히 열렸다. 차에 타고 보니 대시보드 위에 스마트키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
운전석에 앉기도 전에 먼저 계산기를 던져 둔 애슐리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시험 장소는 어디야?”
저택을 빠져나오며 묻는 말에 코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이네, 가까워서.”
“응.”
문제는 출근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시험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 코이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깍지 낀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제발!
“기도는 나한테 해야 하는 거 아냐?”
불쑥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너랑 네 차한테 하고 있는 거야. 부디 늦지 않게 가 달라고.”
“성공하면 나하고 내 차한테 뭘 해 줄래?”
아직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전날보다 나았다. 코이는 그가 자신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말만 해,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게.”
진심을 담아 말하자 애슐리가 웃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못 배웠어?”
그는 농담을 했지만 코이는 진심이었다.
“괜찮아, 너한테라면 뭐든 해 줄 수 있어.”
애슐리가 정면에서 시선을 떼고 코이를 쳐다보았다. 코이가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고마워.”
“그런 말은 제시간에 도착한 다음에 해.”
웃음기 서린 음성으로 말한 애슐리가 곧바로 핸들을 꺾어 옆 차선에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