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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216)

19화

*

“……쿨럭, 쿨럭.”

거센 기침에 온몸이 뒤흔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외면했던 통증이 전신에 번져 고통스러웠으나 악몽을 계속 꾸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잠들기 전에는 환했는데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직 열은 그대로였다. 화끈거리는 뺨과 늘어지는 전신에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시 눈을 감았을 때였다. 문득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뭐지?

애슐리는 눈을 감은 채로 귀를 기울였다. 열 때문인지 감각이 둔해져 처음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의식이 몽롱해지려는 찰나, 또렷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였다.

고용인인가, 잠깐 생각했지만 곧 부정했다. 자신이 설령 하루 이상 의식을 잃었었다고 해도 저물어 가는 태양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고용인들은 아침 일찍 와서 오전 중에 일을 끝내고 돌아간다. 저게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하면 너무 일렀고, 지는 태양이라면 너무 늦었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은 휴가 중이었다. 결론은 누군가 허락받지 않은 방문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둑일까?

애슐리는 여전히 누운 채 생각했다. 멀쩡할 때라면 아이스하키 채라도 찾아 휘둘렀겠지만 지금은 만사가 귀찮았다. 뭐든 마음껏 가져가고 자신은 자게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저택의 전부가 사라져도 그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할 것이다. 다만 애슐리가 없어진다면 조금은 신경을 쓸지도 모르겠다.

애슐리는 그 남자의 자식이었고,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애슐리를 낳은 ‘그’와 마찬가지로.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도둑이라면 여기저기를 뒤지느라 분주할 텐데 그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점차 다가오는 발소리는 목적지가 애슐리의 방이라는 걸 말해 주는 듯했다.

……설마, 그 남자가?

혐오스러운 보라색 눈동자가 떠올랐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애슐리는 의식적으로 깊이 숨을 들이켰다. 만약 그 남자라면 그 지긋지긋한 단 향이 폐 속 깊숙이 들어올 것이다.

그런데 불쾌한 기분이 뒤따라올 것을 각오하고 한껏 공기를 들이마셨으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신이 덮고 있는 이불의 희미한 섬유 향이 전부인 것을 깨닫고 애슐리는 자신의 이전 추측으로 돌아갔다.

도둑이구나.

애슐리는 그가 흉기를 들고 자신을 위협하며 귀중품을 내놓으라는 귀찮은 요구만 하지 않기를 바라며 더욱 침대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다 가져가. 나만 건드리지 말고.

애슐리의 바람은 그것뿐이었으나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그는 최악의 경우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놓지 않으면 안 됐다.

다 가져가. 나만 건드리지 말고.

애슐리의 바람은 그것뿐이었으나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그는 최악의 경우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놓지 않으면 안 됐다.

눈을 감은 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도둑은 선뜻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뭐가 있는지 문밖에서 훑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끼이, 시끄러운 소리에 애슐리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저 멍청한 도둑은 최대한 소리를 안 내려고 문손잡이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요란한 소음이 울리자마자 그가 기겁을 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시시한 좀도둑인가.

애슐리는 여전히 눈을 감고 비몽사몽인 채로 생각했다. 저렇게 덜떨어진 녀석이라면 물건을 챙기는 것도 변변치 않을 것이다. 저러다 가겠지, 생각하고 그냥 잠이나 자기로 했다. 다시 몽롱한 의식 속으로 빠져들어 거의 성공할 뻔했을 때였다.

끼이이익.

또다시 울린 날카로운 소리가 그를 억지로 잠에서 끌어냈다. 심각하게 찌푸린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이번에도 좀도둑은 움직임을 멈췄다.

애슐리는 무시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실패했고, 또 한 번 크게 문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애슐리는 하마터면 그냥 열고 들어오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온몸을 끓게 하는 고열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가는 신음을 낸 게 전부였다.

다행히 문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음산한 기계 소리가 들렸다. 끽, 끼익, 끽. 아까만큼 요란스럽지는 않았지만 귀에 거슬리는 건 여전했다.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걸 훔치려고 저렇게 난리 법석인 거야. 애슐리가 이를 갈았을 때, 그 소리도 멈췄다.

잠시 뒤 숨죽인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금살금 발끝을 들고 걷는 누군가의 움직임이 피부에 와닿았다. 조심스럽게 방 안을 가로지른 그가 애슐리의 침대로 다가왔다.

애슐리는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간 크게도 좀도둑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좀도둑이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시트를 살그머니 들어 올린 순간, 애슐리는 불쑥 손을 내밀어 그 팔을 붙잡았다.

“이 개자식아, 적당히 해……!”

놀란 좀도둑을 다짜고짜 침대에 쓰러뜨리고 잔뜩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을 때였다. 생각보다 더, 도둑은 몸집이 작았다. 애슐리가 마음만 먹으면 뼈 하나둘쯤은 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도둑의 정체였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애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코이?”

잠긴 목소리가 간신히 성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던 코이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야. ……잘 있었어?”

누가 봐도 ‘잘’의 상태는 아닌 애슐리를 보고 형식적으로 덧붙였던 말은 작게 사그라들었다. 애슐리는 멍하니 코이를 내려다보다 뒤늦게 기침을 해 댔다.

“애쉬!”

코이가 당황해 소리치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도둑의 정체를 알고 나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애슐리는 그만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애쉬, 괜찮아? 어떡해, 많이 아픈가 봐!”

너 때문이잖아.

애슐리는 말하고 싶었지만 기침 때문에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괴로운 기침을 반복하는 그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던 코이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갔다.

“애쉬, 약 가져왔어. 좀 먹어, 수프도.”

기침을 하느라 온몸을 들썩이며 간신히 눈을 뜬 애쉬는 그 요상했던 기계 소리가 뭐였는지를 알아냈다. 코이가 끌고 온 카트 소리였다.

“주방이 엄청나게 크더라.”

애슐리가 묻기도 전에 코이는 먼저 말하며 냄비에 담아 온 수프를 국자로 떠 그릇에 담았다.

“야채수프야.”

“치워.”

곧바로 애슐리가 내뱉었다. 멈칫한 코이는 황급히 몸을 돌리더니 덜어 낸 수프를 다시 냄비에 쏟고 다른 냄비를 열어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크림수프야.”

“…….”

애슐리는 열에 들떠 멍한 상태에서도 어이가 없어 코이를 바라보았다. 숨을 몰아쉬며 그의 뒤로 시선을 향하자 카트 위에 냄비가 네 개나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네가 뭘 먹을지 몰라서 종류별로 다 사 왔어.”

코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채소를 안 먹는다는 건 기억해 둘게, 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슐리는 누운 채 그저 눈만 깜박거렸다. 말을 하기는커녕 이제는 생각할 기운도 없었다. 그런 애슐리가 안쓰러운지 코이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수프를 휘저어 스푼에 떠서 내밀었다.

“자, 애쉬. 좀 먹어.”

애슐리는 눈동자만 움직여 스푼을 향했다가 다시 코이를 바라보았다. 코이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먹고 약 먹자, 응? 그러면 금방 나을 거야.”

자, 하고 한 번 더 스푼을 내미는 코이의 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고 생각하자 애슐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 자.”

망설이다 입을 벌리자 코이는 조심스레 스푼을 넣어 수프를 흘려 넣은 뒤 다시 빼냈다. 얼른 또 수프를 떠 넣어 주려고 대기하는 모습을 보며 애슐리는 어렵게 그것을 목으로 넘겼다.

“아파?”

이내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애슐리를 보고 코이는 즉시 반응했다. 인후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은 무리였다. 또다시 스푼을 내미는 코이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자 그는 침울해하더니 곧 그릇을 내려놓고 이번엔 물컵과 약을 내밀었다.

“약이라도 먹어, 자.”

애슐리는 누운 채로 눈을 깜박이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이건 해열제, 이건 가래 약, 이건 목 아플 때.”

하나하나 설명을 해 준 코이가 애슐리의 손바닥에 알약과 캡슐을 놓아주었다. 미지근하게 데운 물도 잊지 않았다. 목으로 물을 삼킬 때마다 저절로 일그러지는 미간을 어쩌지 못하던 애슐리는 간신히 한 컵의 물을 모두 비운 뒤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목은 지독히도 아팠지만 그나마 갈증은 좀 풀렸다

애슐리가 다시 침대에 누우려 하자 코이가 급히 다가와 그를 부축해 주었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애슐리는 슬그머니 그 마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마에 닿은 그의 티셔츠가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어서 자, 애쉬. 자고 나면 훨씬 나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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