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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216)

8화

이제 어떻게 하지.

애슐리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손을 놔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플랜B 따위는 생각도 안 했다. 하지만 이젠 생각해야 할 때다.

이 정도로 무책임한 녀석일 줄은!

코이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젖히고 심호흡을 했다.

몸이 아프니까 만사가 귀찮겠지. 하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하잖아. 진작 못 한다고 전화를 해 주든가,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이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나 혼자 이걸 어떻게…….

죽도록 아파도 정해진 날짜에 과제를 끝내는 건 세상에 자기 혼자뿐인 것 같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애슐리 밀러같이 잘난 녀석들에게 이깟 과제는 아무것도 아닌 거겠지. 성적이 B가 나와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점수가 안 되면 학교에 건물이라도 하나 세워 주고 들어가면 될 테니까.

잘난 녀석들이 미워.

코이는 결국 찔끔 나오고 만 눈물을 거칠게 닦아 냈다. 어쩔 수 없다. 냉정해지자. 이 과제 점수가 필요한 건 나뿐이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기간 내에 끝을 내야 돼.

마음을 굳히고 나자 조급해졌다. 애슐리의 몫까지 끝내려면 지금의 두 배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를 줄일 수도 없었다. 그가 줄일 수 있는 건 자는 시간뿐이었다.

“죽으면 얼마든지 잘 수 있어.”

코이는 자신에게 되뇌며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전력 질주를 했다.

*

“이야, 애쉬! 어떻게 된 거야? 감기라니!”

유명인답게 애슐리 밀러는 등교하자마자 화제의 중심이 됐다. 평소처럼 사물함 앞에 모여든 패거리들이 평소보다 더 유난을 떨면서 애슐리에게 말을 걸기 바빴다. 멀찍이 서 있는 애들도 사진을 찍기가 바쁜 와중에 코이는 묵묵히 짐을 챙겨 사물함 문을 닫았다.

수업이 있는 건물로 가려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구들을 지나쳐야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코이에게 이런 위기쯤이야 아주 우스운 정도였다.

그는 사물함에 납작하게 붙어서 옆으로 걸어 굳이 비켜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좁은 틈을 통과했다. 중간에 한 녀석이 와하하 웃으며 코이가 붙어 있던 사물함을 쾅, 때리는 바람에 크나큰 참사가 일어날 뻔했지만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주먹을 피했다.

후, 하고 간신히 고비를 넘긴 코이는 삐걱거리는 목을 문지르며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애슐리는 여전히 패거리들에게 둘러싸여 농담을 나누며 웃고 있었다.

아프긴 했나 보네.

어딘지 창백해 보이는 안색은 명백한 증거였으나 코이가 딱히 그를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 때문에 코이 또한 사흘이나 밤을 새운 뒤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에서 조는 바람에 혼쭐이 났었으니까.

코이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수업이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애슐리를 포함한 아이스하키 팀 녀석들이 큰 소리로 웃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지난번 과제에 대한 점수를 알려 주겠다.”

마르티네즈 선생의 말에 코이는 잔뜩 긴장했다. 온 신경이 다음 말에 집중해 있는데, 그녀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

“다들 열심히 했던데? 물론 대충 때운 녀석들도 간혹 있었지만. 아, 딕슨 네 이야기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렴. 과제를 보면 이 녀석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딕슨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옆자리 녀석과 농담을 했던 딕슨 또한 따라 웃었다. 물론 코이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AP 과목을 듣는 이상 대충 하는 녀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애슐리가 그렇게 나온 것은 예상외이긴 했지만 그가 진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걸 탓할 사람 또한 없다. 그는 그것 외에도 모자란 점수를 채울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나 같은 사람이나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거지.

왠지 자조적인 기분이 들었을 때, 마르티네즈 선생이 이름을 불렀다.

“코너 나일즈, 애슐리 밀러.”

“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날 뻔한 코이가 엉덩이를 가까스로 고정한 채 손을 들었다. 애슐리 역시 손을 들긴 했으나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심드렁했다. 당연하다. 그는 과제에 보탬이 되긴커녕 아예 알파벳 하나도 기여한 바가 없으니까.

코이는 잔뜩 긴장해 마르티네즈 선생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점수를 적은 종이에서 눈을 떼더니 코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열심히 했구나. 너희들이 최고점이야. A+ 이상의 점수가 있다면 더 주고 싶을 정도구나.”

그럼!

두 눈을 번쩍 빛낸 코이에게 마르티네즈 선생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코이는 너무 기뻐 저절로 입가가 허물어지고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해냈다. 고생하긴 했지만 어쨌든 해냈어!

고생만 있는 대로 하고 결과가 형편없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번엔 바라던 결과가 따라왔다.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참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르티네즈 선생은 계속해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점수를 알려 주고 있었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쁨을 만끽하는 그의 귀에 더 이상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는 오직 그 혼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다.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애슐리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

“오늘은 졸지 말고 똑바로 봐, 알겠지?”

주인은 엄하게 꾸짖으며 한쪽 천장을 가리켰다. 계산대 앞에 선 코이를 비추고 있는 CCTV를 확인한 코이에게 주인은 한 차례 더 매서운 눈길을 보낸 뒤 자리를 떴다.

혼자 가게에 남은 코이는 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제가 해결된 기쁨을 느끼는 건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다음에 밀려온 것은 어마어마한 잠이었다.

“으하아암.”

혼자가 되자마자 늘어져라 하품을 했던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과자나 잡화를 파는 가게는 오늘따라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마침 잘됐다 싶어 과제를 꺼냈으나 눈이 침침하고 자꾸 눈꺼풀이 내려왔다.

“아, 정말.”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며 힘주어 눈을 문질러도 봤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역시 안 되겠다.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와야지, 생각하고 막 계산대를 돌아 나왔을 때였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필, 하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나마 타이밍이 맞아서 다행이라고 느꼈을 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들어온 손님을 확인한 코이는 순간 당황해 그대로 굳고 말았다.

넬슨과 그 패거리들이었다.

태연한 척하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반사 작용처럼 얼어붙은 코이를 보고 넬슨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야, 어딜 가려고 그러냐? 알바가 막 자리 비우고 그래도 돼?”

패거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이야, 코이 나일즈한테 가게를 맡기고 가 버리다니 주인이 보통 배짱이 아닌데?”

“그마안큼 우리 코이 나일즈를 신뢰한다는 거 아니겠어? 굉장하네, 나일즈 씨.”

“찐따 새끼, 네가 여기서 한다고 해 봤자 뭘 할 수 있겠냐?”

와르르 웃는 소리에 이어 한 녀석이 손가락 끝으로 코이의 이마를 짚어 밀어냈다.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난 코이가 곧바로 다른 녀석과 부딪혔다. 그러자 녀석은 욕설과 함께 코이를 밀쳐 버렸다.

“씨발, 병신 새끼가 어딜 와서 비벼.”

“우와, 냄새. 이 새끼 냄새나는 거 봐, 너한테 옮는 거 아니냐?”

“씨발, 야, 너 어떻게 할 거야? 이리 와, 맡아 봐, 맡아 보라고. 아 씨발, 코가 썩겠네.”

마지막 녀석이 코이의 뒤통수를 잡아 바닥에 처박을 기세로 꾹꾹 눌러 댔다. 코이는 정말로 바닥에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몸이 반으로 접혀 위험하게 머리를 들썩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하, 하지 마. 그만해!”

코이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코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사이 넬슨은 냉장고를 열어 음료를 뒤지더니 멋대로 맥주를 꺼내 뒤에 서 있던 녀석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두 손으로 그것을 받은 녀석이 억울해하며 투덜거렸다.

“야, 이걸 던지면 어떻게 마시냐.”

“이렇게.”

보란 듯이 맥주 캔을 세차게 흔든 넬슨이 팔을 최대한 뻗어 방금 받았던 맥주를 땄다.

“아, 안 돼!”

코이가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물론 그는 멈추지 않았다. 보란 듯이 풀톱을 당긴 순간, 하얀 거품이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

“우와!”

“씨발, 뭐야?”

“아 저거, 저 미친 새끼!”

여기저기서 아우성을 쳐 웃는 소리가 뒤섞였다. 코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천장에 갈색의 얼룩을 남긴 맥주가 넬슨의 손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캔을 입으로 가져가 크게 한 모금을 마신 넬슨은 으엑, 소리를 내더니 투덜거렸다.

“반도 안 남았잖아, 씨발.”

당연하다. 절반은 천장에 부딪혔다 아래로 쏟아져 진열해 놓은 물건과 함께 바닥 여기저기로 흩어졌으니까.

하지만 코이가 절망감을 느끼기엔 아직 일렀다. 넬슨이 다시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몇 개씩 꺼내 주머니에 넣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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