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야, 굶어 죽는 줄 알았어.”
과장되게 큰 소리로 말한 애슐리는 제일 먼저 햄버거를 들고 입에 넣었다. 더블 패티에 치즈를 두 장이나 넣은 햄버거였다. 주문한 음식의 양도 어마어마했지만 먹는 속도 역시 무시무시했다.
고작 세 번 만에 햄버거 하나를 먹어 치운 애슐리가 다음에는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더블 패티 햄버거를 먹고, 메이플 시럽을 흠뻑 적신 팬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동안 코이는 얼음 없이 나온 콜라 한 잔을 조금씩 홀짝거리며 나눠 마셨다.
“정말 그걸로 되겠어?”
탄산수를 세 병이나 비우고 네 병째 주문한 애슐리가 물었다. 코이는 응, 하고 보란 듯이 콜라 컵을 들어 아주 조금 마시는 척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애슐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음 없이 콜라를 마시다니 특이하네.”
그래야 많이 마실 수 있으니까.
그린 벨은 음료를 리필해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코이는 한 잔의 콜라를 아주 오래 마셔야 했다. 눈앞에서 배가 터지도록 먹어 대는 애슐리 밀러는 둔 상태로.
“너야말로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다니 대단하네.”
“아주 격렬한 운동을 하거든, 매일.”
부러워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 한껏 태연한 척 중얼거리자 보란 듯이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입에 넣은 애슐리가 덧붙였다.
“거기다 성장기이기도 하고.”
“더 큰다고? 거기서?”
경악을 해 묻자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 지난달에 4센티 컸어.”
“……지금은 몇인데?”
코이는 두려워하면서도 물었다. 애슐리는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192.”
당장 그만 먹으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농구 선수라도 될 거냐고, 2미터가 목표냐고, 기네스북을 목표로 하지 왜 그러냐고 화를 내고 싶은 자신을 억누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모든 감정이 질투와 부러움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스하키는 몸싸움을 많이 하니까 몸은 클수록 좋지.”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애슐리에게 코이는 내심 대꾸했다. 지금도 넘치도록 커, 라고.
아이스하키 팀 주전 중에서 제일 큰 주제에.
그렇게 말하면 주장이니까, 하고 간단히 받아넘길 것이다. 코이는 더 이상 그와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 코이 입장에서야 언쟁일 수 있겠지만 애슐리에겐 바닥에서 구르는 축구공을 걷어차는 것만큼이나 별거 아닌 잡담일 테니까.
“프로라도 될 생각이야?”
내뱉고 보니 누가 들어도 열등감에 찌든 찌질이의 말투였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인생의 굴곡이라고는 평생 아주 옅은 그림자조차 드리운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애슐리 밀러는 이번에도 역시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니, 운동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야지.”
뭔가 묘하게 현실적인 대답이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코이가 무심코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반쯤 남은 팬케이크를 크게 자르며 애슐리가 말했다.
“본격적으로 선수를 할 만큼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천하에 둘도 없을 나르시시스트라고 생각했던 녀석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부정했다. 그러자 애슐리는 두어 시간 동안 넘치도록 보여 줬던 예의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간단히 치하한 애슐리가 덧붙였다.
“아버지 일을 물려받을 확률이 높으니까 대학도 그렇게 가게 되겠지.”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 평온한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코이는 그걸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아버지 일? 사업이라도 하셔?”
몰고 다니는 차만 봐도 대충 집안이 상당한 부자일 거라고만 지레짐작했던 차라 호기심이 부쩍 커졌다. 두 눈을 반짝이는 코이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애슐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가난한 사람들한테서 부자들의 재산을 지키는 일을 하지.”
퀴즈인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바로 떠오른 것을 말했다.
“악마야?”
“오.”
웃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애슐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슷해. 변호사야.”
“아…….”
그제야 애슐리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저 정도로 부자라면 꽤 유명한 변호사겠지? 코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애슐리가 덧붙였다.
“동부에선 꽤 유명한 로펌이지. 변호사 밀러라고 하면 바로 내 아버지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그런 대단한 말을 하면서도 그는 자랑스러워한다거나 잘난 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어조로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는 보란 듯이 탄산수를 마셨다.
“그럼 넌 졸업하고 나선 동부로 가겠네? 대학도 그쪽으로 갈 거야?”
“아마도.”
대충 흐름으로 보면 아버지가 나온 대학을 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코이는 과연 이걸 물어도 되는 걸까, 하고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넌 왜 여기 있는 거야? 가족들 다 여기 있어?”
아버지만 동부에 계신 건가? 휴가 때 이쪽에 오는 걸 수도 있고.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코이에게 애슐리는 선뜻 대답했다.
“여기 있는 건 나뿐이야. 부모님은 동부에 계셔.”
“너 혼자라고? 왜?”
생각 없이 물었던 코이는 돌아온 애슐리의 표정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애슐리가 뭐든 선선히 대답하니까 너무 선을 넘어 버렸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사생활을 너무 많이 물었다. 후회와 함께 눈치를 보자 애슐리는 이내 아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혼자 살고 싶었거든.”
“우와, 나도 그런데. 좋겠다.”
세상의 모든 10대가 꿈꾸는 생활 아닐까? 좋은 차에 여유 있는 생활과 혼자만의 집이라니. 정말 이 녀석은 안 가진 게 없구나.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을 때, 애슐리가 피식 웃었다. 어딘지 자조적인 씁쓸한 웃음에 코이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 그래도 혼자는 외롭지. 청소 너무 싫지 않아? 빨래도.”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지만 이번에도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뭐 내가 하는 건 아니니까…… 주말마다 업체에서 와. 대충 사람처럼 살 수는 있다는 얘기지.”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코이는 그만 얼이 빠져 버렸다. 너무나 별세계인 얘기들을 듣는 바람에 뇌에 과부하가 온 것 같았다. 집이 그 정도로 크냐고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지금까지 캐물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쳐. 선을 너무 넘었다고. 애슐리 밀러와 난 그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자신을 내심 꾸짖었으나 곧이어 찾아온 어색한 침묵에 코이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애슐리는 아무렇지 않게 남은 식사를 마저 하고 있었지만 코이는 이런 침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뭔가 할 말을 찾아야 돼, 어서, 빨리.
“어, 저기. 그러고 보니 너네 팀은 아직 발현한 녀석이 없지?”
동급생 중 하나가 최근 오메가로 발현했다던 말을 떠올리고 황급히 묻자 애슐리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부분은 발현하지 않으니까.”
수적으로 보면 확실히 알파나 오메가가 될 확률은 아주 적다. 코이도 자신은 평생 베타로 살다 죽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만약에 이 녀석이 발현한다면 당연히 알파가 되겠지.
알파가 된 애슐리 밀러도 꽤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는 곳마다 페로몬을 뿌려 대는 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발현하면 운동하는 것도 힘들지 않아?”
“대부분은 그만두지. 프로는 아예 불가능하고.”
알파나 오메가의 경우는 발정기 때문에 몇 가지 제약을 받는데, 스포츠 선수가 못 된다는 게 그중 하나였다. 시즌 중에 발정기가 올 경우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고 팀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나마 개인 경기는 본인이 시즌을 건너뛴다든지 해서 조절할 수 있겠지만 팀 경기는 얘기가 달랐다. 억제제를 먹고 시즌을 치르는 경우가 있긴 해도 이것은 선수의 컨디션을 매우 저조하게 만들었고, 또한 몸에 심각하게 무리가 간다는 의견이 우세해 결국 프로팀에서는 발정기가 없는 베타나 감마가 아니면 팀에 들이지 않았다. 수억 달러가 오고 가는 경기에서 굳이 모험을 할 구단주는 없을 테니까.
“발현 예측 검사해 본 적 있어?”
코이가 묻자 애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는?”
“안 했어.”
코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베타일 텐데 뭘.”
“나도 그래.”
어쩐지 애슐리가 건성으로 말을 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화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다음 화제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벽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시간은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식당이 문을 닫을 것이다. 뒤늦게 정신이 든 코이는 자신이 학교의 유명인을 앞에 두고 너무 들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제 때문에 만난 거잖아, 정신 차려!
스스로를 호되게 꾸짖은 코이는 부랴부랴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 저기, 그래서 이 정도 정리하면 어때? 자료 조사는 각자 알아서 하고 메일로 교환을 하자. 정리를 나눠서 해 놓고 다음에 만나면 목차랑 챕터 나누면 될 거 같아. 어떻게 생각해?”
“좋아.”
말을 마친 뒤 그가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식탁 위를 가득 채웠던 접시들은 어느새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그럼 이제 얘긴 끝난 거지? 돌아가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