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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77화 (254/256)

177화

윤조는 꺼진 전투복에서 케이블을 끌어냈다. 뾰족한 끝을 수혁의 전투복에 꽂았다. 그리곤 손목 패드 특정 세 지점을 동시에 꾹 눌렀다.

삐빅.

빨간색 단조로운 화면이 떴다. 패드에 장착된 소형 배터리로 작동하는 응급 모드였다.

표준 응급 모드에선 SOS 콜과 함께 치명적 부상을 입은 착용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마취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에스퍼에게 후퇴할 힘을 주기 위한 부스터 샷 버튼이 뜬다. 그 외 전투복 사용자가 개별적으로 원하는 기능을 추가할 수 있다.

즉시 마취제와 부스터 샷을 눌렀다. 전투복에서 미세 바늘이 나와 약물을 주입했다. 고통이 사라지고 호흡 기능이 조금 향상되었다. 가쁜 숨을 두어 번 몰아쉬는 동안 전투복 내 산소 농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시간이 없어.’

윤조는 눈을 감고 위치 파악에 집중했다. 동조율은 아까부터 맥스였다. 분명히 인근에 있을 텐데도 의식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방사능과 전파, 그리고 부스터 샷의 환장할 어우러짐에 과도 활성 상태에 이른 뉴런이 하나둘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조.

뭔가가 뇌리를 스쳤다.

김……조.

김윤조.

‘저기다!’

방사능 폭풍 속에서 방향을 특정한 윤조는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허우적대며 서너 발자국 떼자 발치에 무언가 채였다. 묵직한 덩어리인데 바위는 아니었다. 무릎이 저절로 꺾여 모래 위에 푹 처박혔다. 동시에 양손에 닿은 건 익숙한 전투복 감촉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데 바로 알아채지 못하다니.

거구의 에스퍼는 엎드린 채로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 때문에 발견이 늦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G형에게도 발견이 늦어 다행이었다.

“소……령님.”

부들거리는 손으로 모래를 밀어냈다. 엎드린 몸을 똑바로 누이려고 했으나 피폭으로 파괴된 근육으로는 그마저 힘겨웠다. 1톤짜리 추 같은 묵직한 몸을 돌리기 위해 윤조는 바들바들 떨었다. 감각이 사라진 발끝이 뒤로 밀리면서 모래에 얇고 긴 고랑을 냈다가 몰아치는 바람에 사라졌다.

몸을 돌릴 수 없다. 힘이 남지 않았다. 대신에 윤조는 수혁의 얼굴 인근 모래를 힘겹게 긁어냈다. 모래에 파묻힌 뺨이 드러났다. 진물과 핏물이 뒤엉킨 피부는 재생 중에 들러붙은 모래와 돌 알갱이를 밀어내지 못한 채 굳어 끔찍하고 징그러웠다.

“일어나십시오.”

우툴두툴한 뺨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쓸었다. 최선을 다해 쓸고 밀었으나, 수혁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다. 가냘픈 뇌파는 계속해서 윤조만을 부를 뿐이었다. 재생력이 너무 떨어졌다.

시야가 아찔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윤조는 제 전투복에서 케이블을 끌어냈다. 대형 바늘 같은 끝을 수혁의 경동맥에 찍어 꽂고 손목 패드를 확인했다.

가이드용 마취제와 부스터 샷 각각 1회분 외에 다른 응급 부스터는 모조리 트리플 S급 에스퍼 전용이었다. 가지고 있는 부스터 총 3회분을 모조리 다 쏟아부었다. 하지만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재생에 쓸 에너지원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당장 에너지 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윤조는 제 전투복 케이블을 완전히 뽑았다. 비상시에 링거줄로 쓸 수 있도록 반대편엔 굵은 플라스틱 바늘이 달려 있었다.

헬멧을 벗어 던졌다. 모래가 눈, 코, 입 할 것 없이 들이닥쳤다. 눈을 감은 채로 딱딱한 전투복 칼라를 꺾어 내리고 빗장뼈 인근을 더듬었다. 위치를 가늠하자마자 플라스틱 막대를 쑤셔 박았다. 뜨뜻한 혈액이 케이블을 타고 저쪽으로 들어갔다.

‘이게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소령님…… 제발 일어나십시오.’

긴급하게 맞은 부스터와 마취제 효과도 이젠 거의 가셨다. 눈꺼풀이 들러붙은 채 떠지지 않았다. 쓰러지고 싶어도 수혈에 낙차가 필요하기에 기를 쓰고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얼굴의 맨살을 뜨거운 모래가 할퀴고 지나갔다.

혹여 산 채로 불타는 고통이 이런 것일까. ‘혹여’가 아닐 거다. 실제로 강력한 전자파에 의해 내부부터 익어 가고 있으니.

키이이이잉―

분노한 G형이 기어이 제 다리에 뒤엉킨 촉수를 스스로 뜯어냈다. 토막 난 촉수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쿵! 쿵! 쿠구구구! 쿵!

국소 지진과 함께 자욱한 방사능 폭풍이 몰아쳤다.

이미 모든 힘을 다한 가이드의 몸은 모래가 뒤엉켜 붙은 연인의 얼굴 위로 쓰러졌다.

방사능 열기에 녹아내리고 모래에 마모된 흰색 전투복 옆구리 사이로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모래 중간에서 솟아오른 그 손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상대의 표면을 더듬었다.

흙먼지에 뿌옇게 변한 흰색 가이드 전투복 아래서 찬란한 광휘가 터져 나왔다. 빛무리는 사방 반경 5미터 내에 부는 바람을 잠재우고 모래를 가라앉았다.

검은 형체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 위에 걸쳐져 있던 흰 몸이 옆으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에 검은 팔이 흰 몸을 받아 들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를 일으킨 에스퍼의 머리칼은 오색 찬란한 색으로 물든 채로 수초처럼 고요히 나부꼈다. 재생력을 찾은 피부가 기생따개비처럼 붙어 있던 돌 알갱이와 모래를 튕겨냈다. 그것들은 늘어진 흰 몸 위에 떨어지기 전에 미세한 가루가 되어 버렸다. 늘어진 몸을 부드럽게 감싼 광휘가 먼지를 밀어냈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모래알에 찢어진 각막이 재생하면서 시야가 선명해졌다.

좀이 슬어 버린 광목처럼 너덜너덜한 검은 전투복 장갑으로 제 품에 안긴 이의 뺨을 쓸었다. 날카로운 모래 열기에 당한 얼굴엔 크고 작은 수포가 가득했다. 뒤로 툭 꺾어진 고개 덕분에 검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흔들렸다.

김윤조.

속으로 불러 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상대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를 들어 가슴에 귀를 대었다.

심장 박동이 들리지 않는다. 횡격막의 움직임도, 커졌다가 쪼그라드는 폐포도, 심지어 혈액 이동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귀를 대기 전부터 알았다. 그에게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걸 눈을 뜨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또 죽었다. 김윤조가.

저를 살리겠다고 또 죽었다.

눈가에 붉은 물기가 고였다.

주변을 맴돌던 광휘가 실타래처럼 휘몰아쳤다.

쿠우우우우우…… 키이이이이잉!

G형이 수혁을 인지하고 달려들었다. 거대한 몸체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진주알에 불과한 빛무리에 다리 끝이 닿을 때였다.

흰 구슬이 연꽃처럼 갈라졌다. 빛의 조각은 바람에 흩날리는 이파리처럼 빙그르르 돌더니 점차 꼬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찬찬히 나중에는 맹렬하게 돌아가는 빛의 조각은 제각각 퍼지더니 소닉붐을 일으키며 G형의 다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쾅!

다섯 개 빛은 긴 다리를 둘러싸며 꽂힌 채 회전했다. 느릿느릿 다리 표면을 파고들던 빛이 기어이 반대편으로 뚫고 나왔다.

키에에에에에!

G형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끔찍한 체액을 휘날리며 날아오른 다섯 개 빛이 다른 다리에 다시 달려들었다.

게이트가 진동하면서 다리 하나가 더 내려오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고무줄처럼 늘어지는 게이트를 통해 무수한 다리 끝이 모습을 드러냈다. 촉수와 다리가 뒤엉킨 채 내려오는 게이트는 그 자체로 대양 해파리 모습이었다.

맹렬하게 돌아가는 빛의 파편 다섯 개로는 각각이 초거대 빌딩 같은 다리 수백 가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수혁이 만들어 낸 빛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이쪽이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때였다.

남쪽 하늘에서부터 환한 빛이 날아올랐다. 유성처럼 지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빛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인류 최후의 우주선이었다.

-강 소령! 피해!

익숙한 중년 남자가 뇌 속에서 외쳤다. 수혁은 즉시 게이트에서 최대 속도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작부의 살림을 도맡은 소심한 중년 대령은 다른 동료가 전투에 매진하는 동안 내내 백업 방안을 논의했다. 일전 바다 위 게이트를 없앨 때 위성 타격을 준비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최후의 희망에 전략 핵탄두 실어 날려 보냈다.

아무리 골동품이라도 우주선은 우주선이었다. 최신 군용 장갑도 녹여 버리는 강력한 방사능과 전파 소용돌이를 세라믹으로 뒤덮은 두꺼운 특수 강판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인 우주선은 기어이 게이트 한복판에 닿았다.

핑―

이명이 길게 이어졌다.

고요했다. 바람도 소리도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략핵이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하지만 남아 있다고 한들 수혁은 들을 수 없었다. 이제 고막이 없기 때문이었다. 귓바퀴도 없다. 머리카락도 날아가 버렸다.

한 박자 늦게 뜨거운 열기가 돌아선 수혁의 등을 때렸다. 전투복과 동시에 피부가 증발했다. 보호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에 당연했다. 누구보다 강력한 재생력을 가진 몸이 뒤에서부터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부스터 샷은 남은 힘을 모조리 끌어낼 뿐이다. G형의 다리를 끊어 낸 힘은 김윤조가 넘겨준 혈액 조금에 제 체세포 더해 불태워 만들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이젠 제 몸을 다 불살라도 화를 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키이이이이―

작렬하는 고요를 깨트린 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G형의 괴성이었다.

분노, 증오, 혐오. 딱히 한 가지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감정적 폭발로 인해 확장된 오감이 텅스텐 빔과 전략 핵탄두를 감지했다.

내장을 태웠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윤조를 안을 품과 두 팔이 남아 있으니까. 맹렬하게 회전하는 텅스텐 빔 수십 기가 전략 핵탄두를 모조리 싣고 날아올랐다.

이제 끝이다.

망할 게이트로부터.

에스퍼로서의 지긋지긋한 삶으로부터.

두려움은 없다.

미련도 없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인 것은,

툭 치면 뭉그러지는

소중한 이를 놓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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