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인간의 이해력이란 너무나도 미천했다. 천지창조의 원래를 파헤치겠다고 우주 배경 복사니, 양자역학이니 뭐니 떠들기 시작한 지 근 이백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우주의 중심은 고사하고 아직 태양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런 인류에게 게이트란 근원적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대(對) 게이트 시기가 막 시작될 무렵에는 무수한 개인이 절망감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일삼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절망감을 인지할 지능도 없는 멍청이들은 반달리즘에 매진하다가 군대에 의해 소탕되었다.
유일신의 형벌이라며 집단 자살을 시도하는 광신도며, 게이트를 조종할 수 있다며 나약한 인간을 현혹하는 사이비 무리가 득세했다. 그런 세대가 지난 후 에스퍼가 발생하고 그들이 게이트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면서 인간은 서서히 이성을 되찾았다. 게이트란 이제 방사능과 괴물을 쏟아내는 자연재해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인류의 멸종은 이미 결정된 사안으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저 버텼다. 신의 횡포에 비견되는 게이트를. 저항할 자는 저항하고 받아들일 자는 받아들이며. 힘겹게 인류는 공룡의 길을 걷고 있었다. 울고 웃으면서. 때로는 무참하게 찢어진 채로. 때로는 흥에 겨워 춤을 추면서.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는 드높이던 지성체가 느끼는 비장함을 이루다 말 할 수가 있을까.
게이트는 자원을 착취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출현 의도가 늘 수수께끼였다.
인류에게 호전적이긴 했다. 전혀 다른 생물군의 충돌은 늘 적자생존 경쟁으로 이어졌기에 당연시하였다. 그래서 이면을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호전적인 면모는 달리 말해, 상대에게 관심이 많다는 뜻도 된다.
게다가 게이트 발생과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인류는 에스퍼로 진화했다. 이것도 진정한 의미를 간과했다. 그저 인류의 입장에서 생존을 위한 진화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이런 변환 자체가 게이트가 의도한 바라면?
성적 성숙에 든 개체가 다른 미숙한 개체의 성숙을 돕는 과정은 지구 생물군 내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발정기에 든 암컷과의 접촉으로 인해 발정하는 수컷은 지구상에도 넘치고 흐른다. 하다못해 인간도 옆에서 옆구리를 살살 찔러 대면 일부는 몸이 동하지 않나.
그걸 행성 단위로 저지르고 다니는 깡패가 저들이다. 깡패가 뭔가? 그냥 성폭행범 그 자체다. 실제 지구 자연계에도 위력에 의한 성폭행이 횡행한다. 코끼리는 코뿔소를 타서 죽이고 돌고래는 펭귄을 찔러 죽인다.
어설픈 지능과 강력한 힘의 교합은 언제나 무참한 파괴와 살육을 낳는다. 처음부터 저것들은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 위험을 80년 멍청한 미치광이가 자초했다. 그 대가는 지구적 고통이었다.
게이트의 정점에 선 G형이 나타나 말한다. 불렀다고. 불러서 왔다고. 그리고 거듭 읍소한다. 내놓으라고……그러니까.
-저 괴물이 한마디로 말해서……짝짓기 상대를 찾는 거야? 여기서?
뇌 속에서 들린 허탈한 음성은 아무래도 윤조의 두 번째 창조주 같았다.
-그러니까……지금 80년 전 미치광이가 라그랑주 포인트에 갖다 놓은 물건이 발생하는 신호가 저 망할 괴물 새끼를 위한 세레나데였다는 거야, 지금?
-…….
장세인을 통해 연결된 각국 수뇌부와 군 관계자 중 누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추측이지만 반박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착착 맞아떨어졌다.
키에에에에에엥.
G형이 재차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많은 기억과 충동이 발산되었다. 녀석이 느끼는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생생한 욕망이 한층 선명하게 전사(傳寫)되었다.
뇌압이 쑥 올라갔고 덕분에 눈알이 튀어나오려 했다. 엄청난 분노가 몰아쳤다.
“미……친? 이…… 새끼가?”
80년은 저 괴물에겐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지구적 재앙은 그저 잠깐 옆구리를 찔러 본 행위였다. 심심풀이 삼아 쿡 찔러봤을 뿐인데 쓸 만한 짝짓기 대상이 툭 튀어나왔다. 그게 누구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제야 윤조는 수혁이 하고자 했던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저것은 수혁을 같은 종족이라고 부른다. 수혁에게 같이 가자고 한다. 그리고 수혁만을 쫓아올 것이다. 더불어 수혁이 왜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에 집착했는지도 완벽하게 이해했다.
-미쳤네요. 그러니까 저게 지금 강 소령님을 점찍었다는 말?
-저런 게 좋다고 달려들면 나라도 치가 떨리지. 하, 시발. 우리 망나니 불쌍해서 어떡하나.
장세인과 심 박사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울 사건 이후로 제정신 유지한 게 대단한데요.
임성준까지 혀를 내둘렀다.
G형은 자욱한 먼지 속에서 수혁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크기 차이가 너무 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고릴라가 맨손으로 정자 한 마리를 잡으려는 꼴이었다.
“개새끼야! 어디서 내 에스퍼를 건드려! 개자식아! 그건 내 거야!”
뚜껑이 제대로 열린 윤조가 공중을 향해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지표를 더듬던 G형의 촉수 더듬이가 다시 움찔했다.
“더럽게 못생긴 새끼야! 짝짓기 상대는 다른 데서 알아봐! 그건 나랑 짝짓기 벌써 예전에 수십 번도 더 했고 혼인신고서에 도장도 찍었어! 어디서 할 짓이 없어서 남의 에스퍼를 넘봐! 네가 만들었든 뭐든 내가 먼저 먹었으니까 꺼져!”
-싫어싫어싫어싫어…… 너어너어너어너어…… 싫어!
“누군 안 싫은 줄 아냐? 블랙홀이 싼 방사능 물똥처럼 생긴 놈이!”
-경쟁자경쟁자경쟁자경쟁자……… 싫어싫어싫어싫어!
G형의 촉수가 다시 이쪽을 향해 돌진했다. 수혁이 목숨을 걸고 공격한 두 다리 표면은 재생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연계 공격을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빌어먹을!
-위험합니다.
임성준이 윤조와 확성기를 잡고 다시 점프를 반복했다. 그의 체력도 거의 바닥난 지라 점프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거리를 제대로 벌리지 못해 점프한 자리에서 촉수를 맞닥뜨리고 다시 점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핀치를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임성준도 즉시 동의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기왕 죽을 거라면 엿이라도 한 방 먹이고 떳떳하게 가겠습니다. 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합니다.
윤조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성실한 모범생이어도 임성준 역시나 특작부다.
“1분이면 됩니다.”
텔레파시를 통해 이쪽을 내내 지켜보고 있던 심 박사가 호통쳤다.
-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 둘 다 죽고 싶어? 네가 망나니 같은 용가리 통뼈인 줄 알아?
잔소리를 뒤로하고 윤조는 좌표를 지정했고 임성준은 즉시 점프했다. 바로 G형의 다리 표면이었다.
아까부터 윤조가 소리를 내지르는 대로 쫓아오기만 하던 촉수는 예상대로 움직였다. 거대 촉수는 초고층 크기 다리 둘 사이를 점프하는 임성준과 윤조를 따라 이리저리 쏘다녔다. 미친 규모를 자랑하는 G형의 유일한 약점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아둔한 전투 지능이었다.
긴 촉수가 어느새 두 다리에 엉망으로 꼬여 버렸다. 거대한 다리가 기묘한 각도로 꺾이는 바람에 막대한 체중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자 재생이 되던 표면에 균열이 생기면서 도로 터졌다. 끔찍한 체액이 폭포처럼 흘렀다.
키에에에에에―
G형이 또 무시무시한 전파 폭발을 일으켰다.
쿨럭.
윤조를 감싼 임성준이 피를 토했다. 아무리 S급이라도 G형의 전파를 감당하긴 불가능했다.
움직임을 봉쇄한 덕에 모래폭풍의 위력이 누그러졌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누그러졌다는 의미일 뿐, 권역 내에서는 여전히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방사능으로 인한 열기 때문에 전투복 표면이 녹기 시작했다. 윤조는 지금이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윤조야!
이번에도 역시나 심 박사가 히스테리컬하게 소리쳤다.
-이건 아니야! 너마저 그럴 필요는 없잖아! 얼른 돌아와!
“저는 강수혁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가이드입니다. 박사님의 소중한 개망나니가 개죽음하지 않도록 저를 만드셨지 않습니까.”
-윤조야아.
뇌 속에서 흐느낌이 흘렀다. 콧등이 저릿했다. 장세인에게 텔레파시 차단을 부탁했다. 사실 부탁을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마음을 다잡으며 허공을 향해 싱긋 웃었을 뿐이었다. 이후 뇌 속 울림이 끊겼다.
이제 남은 건 임성준의 결심이었다. 피를 삼킨 그가 마주 보며 웃었다.
-어쩐지 강 소령님이 부러운 것 같습니다.
성실한 군인답게 전투 시 우선하는 지침대로 가이드의 지시에 얌전히 따랐다. 그는 윤조를 특정 지점에 떨군 채 혼자서 G형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윤조는 아직 자욱한 모래 폭풍에 떠밀리면서 균형을 잃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강력한 바람에 저항하면서 일어선 그는 분명히 인근에 있을 수혁을 찾았다.
“소령님!”
헬멧 스크린은 점멸하는 빨간 신호 범벅이었다. 통신 불능, 생명 유지 장치 작동률 치명적 수준으로 감소, 방사능 차폐 장치 가동률 경고, 전투복 배터리 폭발 위험 등등 이미 각오한 바였다. 윤조는 손목 패드를 조작했다.
펑.
응급 코드를 통해 등에 붙어 있던 전투복 배터리가 분리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투복 전원이 모조리 나갔다.
“헉!”
강력한 열기와 방사능이 전신을 엄습했다. 전투복 장갑이 진득하게 녹아내렸다. 몸이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었다. 끔찍한 고통이 흉부와 복부를 휘저었다. 가장 아픈 건 역시 머리였다. 뇌를 뜨겁게 달군 꼬챙이로 후벼파는 느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전자레인지 안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윤조는 속에서부터 삶기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