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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72화 (249/256)

172화

G형 게이트에 비하면 다른 게이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어서 G형이 세력을 넓히는 족족 잡아먹혔다. 꼭 고래 입속으로 빨려드는 크릴새우 떼 같았다.

인근은 사막이었다. 아주 다행인 일이었다. 적어도 전투 중간에 휘말려 증발할 민간인 같은 건 없으니 말이었다.

“그런데 인근에 공군 기지가 있다면서?”

“퇴역기 기지입니다. 비행기의 무덤…….”

그제야 조종사에게 생각이 미쳤다. 추락 지점에서 피어오른 시커먼 연기가 게이트로 호록 빨려 들어가는 묘한 광경을 보며 착잡함을 감추지 못했다.

“구조자는 저뿐입니까?”

물어보긴 했어도 딱히 기대하진 않았다. 게이트를 혼자서 상대하느라 눈이 돌아간 수혁이 정찰기를 박살 낸 장본인이다. 인간으로서 어떻게 뻔히 구할 수 있는 아군을 죽게 내버려 둘 수 그럴 수 있느냐는 비난을, 다중 게이트를 상대로 혼자서 맞서던 사람에게 던지는 건 너무 지엽적이며 이기적인 발화였다.

차라리 묻지도 말걸. 조종사 본인도 죽음을 각오한 명예로운 전사였을 텐데.

차분히 눈을 감고 명복을 빌 때였다.

“저거 찾는 거야?”

수혁이 엄지를 제 어깨 뒤로 척 넘겼다.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고꾸라진 채 기절한 조종사가 보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눈과 입을 한껏 벌린 채로 수혁의 요모조모를 뜯어보았다. 멀뚱하던 에스퍼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나라도 덜 죽이자고 이 뺑이를 치고 있는데 그럼 눈앞에 뻔히 보이는 걸 죽게 내버려 둬?”

“인간……되셨네요.”

“원래부터 인간이었거든?”

“그렇죠. 그렇습니다.”

강수혁이 보이는 탈인간적인 행보에 익숙해진 바람에 깜빡했다.

피고름과 수포가 들끓다 못해 시커멓게 닳은 철제 척추를 드러내며 괴로워하던 모습을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순간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가져온 인명 피해에도 강수혁은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고민했었다. 그걸 자신이 어떻게 잊을 수 있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등에 천형을 짊어지고, 지금껏 인간을, 동물과 식물을, 나아가 지구라는 행성을 구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았나. 그는 누구보다 상냥하고 자애로운 초월자였다.

명치 언저리에서부터 뜨끈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전신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감동으로 환희했다.

“너, 너무 감명받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왠지 섭섭해지려고 한다.”

“아닙니다. 잠시 반성했습니다.”

“반성은 나중에 하고.”

무뚝뚝한 중에도 윤조를 감싸 안은 손길은 다정했다. 빙글빙글 돌면서 허공에 떠오르는 동안 흉측한 색에 물든 하늘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거 처리해야겠는데. 끝이 없어. 효율적인 타격 방법이 필요해.”

“말을 안 듣는 놈들에겐 매가 약입니다. 매를 드시죠?”

“텅스텐 빔이 있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윤조는 고개를 돌려 공군 기지를 바라봤다. 동시에 수혁 또한 공군 기지의 방향과 거리를 확인했다.

“날개가 있어서 날려 보내기만 하면 알아서 날아갑니다. 텅스텐 빔보다 관통력은 떨어져도 연료를 실으면 폭발력은 강합니다. 중소형은 소거하기 쉬울 겁니다.”

“좋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두 사람은 공군 기지로 날아갔다. 기절한 조종사도 짐짝처럼 따라왔다.

기지가 가시거리에 들어오자 레이더를 통한 통신이 들어왔다.

-가이드 김윤조입니다. 에스퍼 강수혁과 귀환 중입니다. 조종사는 생명에 지장이 없으나, 의무병이 필요합니다. 퇴역기를 에스퍼용 텅스텐 빔 대신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폭발력을 늘리기 위해 연료나 폐기용 탄약을 실어 주십시오. 또한 에스퍼용 에너지 바와 방사능 제염 요청합니다.

수신한 공군 기지 측은 즉시 환영 인사를 밝히고 요청에 관해서 무조건적 수용의 뜻을 나타냈다.

-감사합니다. 지금 착륙합니다.

둘 다 방사능에 절어 있기에 기지 외곽 사막지대에 착륙했다. 멀리서 지프차와 의무병 마크를 단 군용 트럭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기절한 조종사를 그쪽으로 날려 보냈다. 조종사를 받아낸 의무 트럭은 곧 방향을 바꾸어 기지 본부로 돌아갔다.

소방차 같은 제염 트럭이 인근 거리에 섰다. 방호복을 입은 병사들이 제염액 분사를 준비하는 동안 조수석에 방호복을 입고 내린 남자가 손을 들었다. 기지 소속 텔레패스였다.

-김 준위?

장세인 대위가 말을 걸었다.

-강 소령님과 합류…….

-아니…… 미, 미친! 서울에 나타났던? 아…… 알았어.

S급 텔레패스는 이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황 파악을 끝냈다. 이런 점이 전시 상황에서는 참 편리했다.

10여 초 정도 뒤에 장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의식은 윤조에게, 그리고 동조를 통해 수혁에게로 전달되었다.

“여기 사막에서 처리? 오케이. 그럼 핵미사일은 텔레포터가? 알았어. 그때까진 고물 비행기로 버텨 볼게. 텅스텐도 보내. 그게 편하긴 하니까. 분량은…… 있는 대로 다. 규격은 크면 클수록 좋아. 혹시 모르니까 인큐베이터는 전투 영역 밖에. 나는 몰라도 김윤조는 힘들 수 있어. 아줌마는 됐어. 아줌마까지 있으면 신경 쓰여서 안 돼. 대신에 김윤조가 언제든 이동할 수 있게 S급 텔레포터 보내.”

수혁이 대답했다. 궁극적 수신자는 장세인이 아니었다. 저쪽에 있는 사람은 비상 텔레패스망으로 연결된 각국 수뇌를 대표한 장선욱이었다.

-더 필요한 건 없고?

“없어. 있으면 김윤조 통해서 말할게.”

-그…….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시간 없어.”

-죽지 마라. 둘 다.

“…….”

-살아 돌아와.

“봐서.”

그 말을 끝으로 수혁은 손끝으로 목을 그어 이만 끊으라고 신호했다. 동조율을 살짝 낮춰서 텔레파시가 그에게 흘러가지 않도록 조치했다.

-김 준위.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일이 생기기 전에 도망치겠습니다.”

-그래.

-아니! 그게 무슨! 목숨을 걸고 지구를 지켜야!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끼어들어서 호통쳤다. 뒤이어 대륙과 인종을 넘나드는 비난이 쇄도했다. 어떻게 군인이 도망칠 생각을 하며, 인류의 존속을 책임진 장군이 후퇴도 아닌 도망을 지시하느냐고.

갑자기 우렁찬 쌍욕이 터졌다. 장선욱이었다.

-시발놈들아! 어차피 쟤네가 도망칠 정도면 지구도 끝이야! 죽을 때라도 곱게 집구석에 와서 죽으라는 게 뭐 잘못된 거냐! 미친 새끼들아! 그렇게 지구가 중요하면 시발! 네놈들부터 고물 비행기 타고 게이트로 돌진해! 너희 한 명당 마이크로 게이트 하나만 감당해도 이 사태가 훨씬 수월하게 풀릴 거다! 벙커에 숨어 있는 놈들이 어디서 에스퍼에게 지랄하고 있어! 왜? 꼽냐? 꼬우면 날아와서 멱살 잡아 보든가! 맷돌로 갈아 죽일 쌍놈 새―!

의식이 뚝 끊겼다. 어안이 벙벙한 건 윤조뿐만이 아니라 그걸 실시간으로 듣고 있던 공군 텔레패스도 마찬가지였다.

“왜? 꼰대가 뭐래?”

“별거 아닙니다.”

윤조는 제염 준비가 끝난 공군을 향해 턱짓했다. 대형 항공기용 제염액 노즐을 소방수처럼 양편에서 잡은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분사했다.

취이이익.

제염액이 닿은 자리에서 유독성 가스가 피어올랐다. 헬멧 없이 맨얼굴로 제염액을 맞은 수혁은 양팔을 들어 빙글빙글 돌았다. 제염액도 유독성 물질로, 보통 인간은 닿는 것만으로도 살이 문드러진다. 하지만 수혁은 제염액을 양손으로 받아 세수하듯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허리를 숙이고 머리도 감았다.

전신을 살짝 적신 후에 바로 제염액 영역에서 벗어난 윤조는 이 미친 광경에 할 말을 잃은 병사들에게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분사하라고 손짓했다. 구석구석까지 제염액 샤워로 체온이 내려간 수혁은 아주 시원한 얼굴을 했다.

“샤워하니까 배고프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염차 뒤로 냉동 트럭이 나타났다. 뭐든 대형을 자랑하는 미국답게 거대한 탑차는 제염을 마무리 짓고 물러난 제염차 옆에 서더니 공군 마크가 찍힌 양 날개를 한껏 올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흰색 방호복 위에 셰프 모자를 억지로 구겨 쓴 취사병 한 소대였다. 우르르 내린 그들은 빠른 솜씨로 간이 탁자 여러 개를 폈다. 하나에는 의자 둘과 식기를 두고 다른 탁자에는 트럭에서 내린 대형 급식소용 사각 스테인리스 그릇을 주르륵 놓았다.

뚜껑을 열자 감자와 달걀을 비롯하여 각종 곡물을 뒤섞은 고열량식 샐러드가 나왔다. 다른 통에는 진득한 고기 소스를 뿌린 파스타가 가득했고 뒤이어 와플, 시럽이 뒤를 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트럭 짐칸엔 전기 그릴이 있었고 준비를 끝낸 취사병이 두툼한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잘 익어 가는 소고기 덩이 옆에 핫도그에 햄버거도 추가되었다.

준비한 소스도 다양했다. 가장 놀란 건 쌈장이었다. 물어보니 전에 코리안 바비큐가 특식 메뉴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때 사용하고 남은 거란다. 딴에는 생채소도 내놨다.

“오.”

만족한 수혁이 일체형 전투복의 상의 부분만 벗으면서 다가갔다.

바리스타를 맡은 병사가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 기계가 증기를 내뿜더니 곧 신선한 커피가 생산되었다. 딱히 말하기도 전에 에스프레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서빙되었다.

간이 식탁에 앉자마자 제일 먼저 서빙된 건 껍질을 벗긴 에너지 바를 산처럼 쌓은 접시와 커피였다. 뒤이어 샐러드에 갓 구운 고기가 쌈장, 채소와 함께 제공되었다.

에너지 바를 쌀밥 삼은 수혁은 두툼한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취사병 중 하나가 서버를 맡아 접시를 나르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다 익은 고기가 접시에 담기는 순간 바로 접시가 저절로 날아 수혁의 식탁 위에 안착했다.

윤조에게도 갓 조립한 햄버거 하나가 대령되었다. 차가운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즐겼다. 전투를 앞두고 위를 꽉 채웠다가 구토할지도 모르기에 과식은 금물이다.

반대로 수혁은 진공청소기처럼 음식을 빨아들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저쪽 하늘에선 불길한 기운이 시시각각 세력을 넓혔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게이트에 관해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묵묵히 음식을 준비하고 먹어 치울 뿐이었다.

고기를 굽는 취사병의 태도에선 사뭇 비장함까지 흘렀다. 꼭 돌아오지 못할 전투를 앞둔 전투기에 마지막 연료를 채우는 정비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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