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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61화 (238/256)

161화

유사 이래 가장 진보적인 우주 탐험을 이루어 냈던 기관은 그야말로 불난 호떡집이었다. 실제로 미사일이 부속 건물을 타격하여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겉보기에는 괴멸처럼 보여도 실상은 아니었다. 게이트에 대응하는 중요 기관이기도 하기에 주요 시설은 핵 방공 기지 수준의 지하 시설에 있기 때문이었다.

게이트가 있기 전에는 유명한 관광지여서 세계 각국에서 날아든 민간인으로 북적였다고 했다. 하지만 수혁에 의해 단숨에 드러난 입구는 삭막한 콘크리트 구조였다.

무지막지한 규모의 콘크리트 동굴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두꺼운 격벽이 있었다. 처음 두 개를 아주 형체도 없이 찢어 놨더니, 이후부터는 알아서 열렸다. 항복의 의사였다.

회색 벽에 주황색 조명이 아니라 흰색 타일과 주광색 조명이 시작되는 곳이 도달했다. 환영한다는 문구와 함께 거대한 공동(空同)이 나왔다. 실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항공기가 공동 가장자리를 따라 정지해 있었다. 입구 콘크리트 구조가 단순한 대각선으로 쭉 이어진다 싶었더니 이륙 사출구였던 모양이었다.

-위성 신호 유실되었습니다.

-깡통 기어이 부서졌어?

반투명 모드인 헬멧 스크린 저쪽에서 싸늘한 눈초리가 윤조를 향했다.

-콘크리트 지하라서 그런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위에 구멍 뚫어 줄까? 그럼 신호 닿겠지?

-좋습니다.

수혁이 손을 위로 뻗었다. 출력을 한곳으로 모아 얇은 창을 만들어 뚜껑을 도려낼 심산이었다.

-멈추십시오! 더 이상의 파괴는 권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무조건 항복합니다!

저쪽에서 구식 확성기가 쩌렁쩌렁 울었다.

드릉드릉 뚜당당당당.

헬기 프로펠러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용했고, 그렇다고 차량 엔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요란한 소리가 났다.

-저게 뭐야?

-오토바이?

그냥 오토바이도 아니었다. 구시대 유물인 구형 엔진을 장착한 할리 데이비슨이었다. 심지어 옆에는 앉은뱅이 보조 좌석도 달려 있었다.

-멈추십시오! 저희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보조 의자에 앉은 사람이 확성기에 대고 외치면서 작은 백기를 필사적으로 흔들고 있었다.

-최첨단 시설인 줄 알았는데 어디서 저런 골동품을 가져온 거야?

-그러게요.

가만히 기다리자 할리 데이비슨이 멈춰 섰다. 운전자는 백발을 휘날리는 히피 스타일 할머니고 보조석에 앉은 사람은 상당한 체구를 자랑하는 중년 남자였다. 그들은 자신을 각각 제플린 국장과 크리스 부국장으로 소개했다.

-이 기지에는 나와 크리스, 그리고 함께 죽기로 약속한 책임자 다섯뿐이네.

바이크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제플린 국장이 말했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아프리카계 할머니는 척 보기에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혁이 비딱하게 반응했다.

-게이트 시대를 종식할지도 모르는 막대한 잠재력도 있지. 정말로 파괴할 텐가?

-그건 우리 연두부 깡통에 대고 미사일을 쏘기 전에 말했어야지.

수혁이 진줏빛 오로라를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그러자 공동 가장자리에 얌전히 있던 항공기 모두가 들썩였다. 보조석에 앉아 있던 크리스 부국장이 기겁했다.

-그건 저희 판단이 아닙니다. 군부에서 자체적으로 쏜 겁니다.

-어쩌라고. 어차피 한패잖아.

-좋아. 얼마든지 파괴하게.

제플린 국장이 말했다. 수혁이 조소했다.

-그쪽이 허락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대신에 오늘 여기를 파괴하면 라그랑주 포인트에 있는 전파 발산체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까지 파괴되는 거네. 그걸 다시 만들기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지 아무도 몰라. 그걸 알고 하게.

-허풍떨기는. 얼마나 대단하든 네놈들이 만들 수 있는 건 우리 집 아줌마 비위 좀 맞추면 금방 나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공중에 뜬 항공기들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F형 게이트를 상대했을 때처럼 거대한 창을 만들어 공동 저편에 있는 시설 본거지를 공격할 셈이었다.

딴에는 침착을 유지했던 국장과 부국장의 입이 바이크 모터보다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가 한층 후퇴할 거야.

-그렇습니다. 대(對) 게이트 시대입니다. 본 우주국의 소실은 막대한 손실을 초래합니다.

에스퍼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시발, 게이트 끌어들인 게 누군데. 무슨 손실 운운이야.

항공기 변형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국장이 품에 손을 넣었고 그것을 감지한 수혁이 국장을 마비시켜 공중에 띄웠다. 부국장은 마비된 채로 경련하는 국장을 보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당황하며 국장을 끌어내리려고도 들었다.

완성된 원뿔이 무섭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드릴이 공동 벽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다.

-잠시만요. 소령님.

내내 뒤에 머물던 윤조가 나섰다. 원뿔의 회전이 약간 느려졌다.

-또 봐주려고? 넌 너무 물러 터졌어. 이 새끼들이 우리 깡통까지 위협했다고.

-봐주는 것이 아닙니다.

윤조는 수혁을 뒤로하고 국장에게 다가갔다.

-뭔가 전달할 것이 있는 모양이죠?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수혁이 국장의 신체 마비를 살짝 풀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국장은 품에 넣었던 손을 아주 천천히 꺼냈다.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소형 이동식 저장장치였다.

-이게 뭡니까?

국장이 더듬더듬 뭐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단어를 채 완성하지 못했기에 군용 통역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라……그랑……주…… 우주…… 쓰레기…… 수거…… 아! 라그랑주 포인트에 직접 가서 망할 오작동 망원경을 제거할 프로그램!

퀴즈쇼처럼 보조석 앞을 탁 내려치고 손을 번쩍 든 부국장이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그에 국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긍정을 표했다.

-소령님.

부름에 수혁이 국장을 놓았다. 바닥으로 털썩 떨어진 국장은 물에 빠졌다가 살아난 것처럼 숨을 크게 헐떡였다.

-허억…… 허억. 그 프로그램을 허억, 허억,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은 현재로선 헉헉, 여기뿐이야. 헉.

-또 만들면 그만이야.

-그럴 수 있죠. 하지만 시간이 걸릴 겁니다. 라그랑주 포인트까지 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아무리 그 유명한 심이라도 말이죠.

부국장이 반박했다.

-여길 없애고 싶으면 얼마든지 없애도 좋아.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구하기란 쉽지 않을 걸세. 심 혼자서 다 할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지.

-우리 아줌마를 너무 우습게 보는데.

수혁은 시큰둥하게 나왔지만, 윤조는 아니었다. 심 박사면 언젠가는 해낼 수 있겠지만,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심 박사를 애먹인 가이드 프로젝트도 저들이 순순히 협조했으면 훨씬 수월했을 거다.

-일단 확인은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냥 넘어가자고?

-그냥 넘어가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이용할 건 이용하고 처리해도 나쁘지 않단 얘깁니다.

-…….

쾅!

무시무시한 원뿔 구조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로 인한 진동 때문에 공동의 까마득한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당장 아줌마 불러.

-일단 여긴 통신이 어려우니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발화는 질문이었으나, 사실상 통보였다. 국장과 부국장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공동을 가로질러 시설의 정복자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공동 안쪽은 더욱 거대했다. 쇼핑센터처럼, 탁 트인 공간감을 강조하기 위해 지하에서 꼭대기까지 중심부를 뚫은 구조였다.

쇼핑센터와 다른 점은, 보통 분수가 있어야 할 중앙에 무지막지한 크기의 흰색 원기둥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래가 굵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는 어딜 봐도 우주선이었다. 수혁과 윤조가 들어온 입구는 그 우주선의 딱 중간에 해당하는 층에 있었다.

-이겁니까?

-현재 지구에 남은 유일한 유인 우주선이지. 한가롭게 우주 탐사나 할 때가 아니거든. 게이트 덕분에 말이야.

국장이 시니컬하게 설명했다.

-골동품은 아니고?

-50년 되었으니 따지면 빈티지는 맞네. 여기저기 손을 봐야 하고 말이지.

-50년 된 우주선으론 옆 동네도 못 가는데 지구 밖 라그랑주 포인트까지 간다고? 겁 없는 미친놈을 구해야겠네.

수혁이 혀를 내둘렀다.

-물론 미친 소리지. 일반인은 물론이고 웬만한 에스퍼도 라그랑주 포인트까지 우주여행을 해 본 역사가 없네. 도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특히 게이트를 생각한다면 아주 위험한 임무지.

국장이 우주선과 둘을 번갈아 봤다.

-하지만 트리플 S급 에스퍼와 그 가이드에게는 미친 짓이 아닐 수도 있어.

순간 수혁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이거 타고 라그랑주 포인트까지 가라고?

-자네들이 F형과 거대 M형을 단숨에 없애는 화면을 봤다네. 거기다가 전투복만 입고 위성 궤도까지 비행했지 않나. 우주 공간에서 충분히 비행한다는 얘기고. 전투력 발휘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소리야. 내 말이 맞지?

국장의 확신에 윤조는 반박하지 못했다. 윤조의 AI 위성을 위협한 것이 정말로 미 군부의 독단적 행위일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백발 할매가 제일 무서워. 이율희도 그렇고 이 할매도 제정신이 아니야.

수혁이 혀를 찼다. 하지만 할 능력이 없다는 얘기는 안 했다.

국장 말대로 고물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날아가 고장 난 쓰레기를 야무지게 때려 부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 지구에 있다면 딱 하나, 강수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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