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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58화 (235/256)

158화

태평양 연합 수뇌부뿐 아니라 소식을 전해 들은 세계 각국 정상이 화상 회의에 집합했다. 그들은 외계 지성체와의 의사소통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진 정황이 포착되었다는 하와이 주둔군 사령관의 보고와 함께, 어쩌면 지구 쪽에서 그들을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중후한 매력과 함께 꽤 합리적인 성품을 가진 사령관은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지만, 조사해서 나쁠 것이 없다고 부연했다. 그의 유보적 태도는 실제 사안을 다루는 실무진인 심나연과 롭슨 입장에선 매우 정치적인 거짓말로 들렸다.

“걱정할 필요가 없어?”

수혁이 윤조에게 속삭였다.

“아뇨. 진짜 심각합니다.”

“그래? 꼰대들이 지랄할까 봐서 저러는 거야?”

“그렇죠.”

“시끄러우니까 질문은 나중에 할래?”

아까부터 신경이 날카로운 심 박사가 핀잔을 주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화상 회의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동유럽 출신 다혈질 대통령의 삿대질로 시작하여 남미 대통령의 욕설에, 아시아 대통령의 윽박지름까지. 딴에는 좌장 노릇을 하겠다고 노력하는 미국 대통령의 말을 러시아 대통령이 잘랐고, 중국 주석은 이 상황에서도 누구누구 탓이라면서 100년 넘는 양아치 왕서방 외교의 전통을 지켰다.

그 와중에 한국 대통령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특작부를 통한 직통 전화로 자세한 내용을 이미 보고 받았다. 비밀회의라서 참가 자체로 이미 정치적 치적은 다 쌓은 거라, 실제 회의장에서는 굳이 입을 열어서 괜한 트집잡히느니 가만히 남의 말만 듣는 전략이었다.

특별한 발언 없이도 한국 대통령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2인조 지구방위대와 둘을 완성한 환장할 천재 심나연 덕택이었다. 다른 쪽들이 지들끼리 멱살을 잡고 죽이니 살리니 발광을 떨다가 어떻나 결론에 도달해도 그것에 어떻게든 특작부 소속 정확하게는 트리플 S급 에스퍼가 관여하는 이상, 한국 대통령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니 미리 뭐라고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겨운데 참석 안 하긴 어려우니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꼭 누구누구 같았다. 세상에 종말이 올 때까지 홀로 존재할 능력은 있되, 무리 생활을 추구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피를 98퍼센트 가지고 태어난 죄로 인류의 일원으로서 남기를 자청하기에 이 지겨운 회의가 벌어지는 본부 구석에 구겨져 꾸벅꾸벅 조는 에스퍼 말이었다.

기묘한 대여 형태긴 해도 이미 강수혁을 하와이에 주둔시킨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어떻게든 자국 게이트를 하나라도 더 떠넘기려고 혈안이었다. 한국 정부에 로비해도 명확한 이점을 보장받을 수 없는데도 물밑으로 접촉해 각종 이권을 제시하기도 했다. 까다로운 게이트를 이쪽에서 담당하면서 게이트로 인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이 상당히 줄었고, 더불어 쥐어짜던 국방력에 많은 숨통이 트였고, 그것을 체감한 국민이 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여 궁극적으로 강수혁을 어떻게든 초청해 오겠다는 정당에 표를 무작정 던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대통령은 강수혁의 하와이 주둔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각국 정상은 회의 내내 왜 이때까지 전파 신호 발산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냐고 서로를 추궁했다. 세계 경제 공룡이자, 강수혁 제외 게이트 대응 화력의 최고봉을 달리는 미국을 향해서도 삿대질을 하는 정상도 있었다. SETI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운용자이며, 위성 궤도를 쓰레기장으로 만든 어느 미치광이의 통신 산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가라는 이유에서였다.

대(對) 게이트 시대가 도래한 이후 국방력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던 저들이 미친 척 미국을 물어뜯는 데는 미국 아니라도 당분간은 강수혁에 의지할 수 있다는 속물적인 계산과 함께,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SETI 잔재를 훑으려면 인적, 물적 자원이 들었다. 곧 돈이란 얘기다. 이미 100년 전에 외우주로 나간 보이저 1호까지 거론된 이상, ‘알아봐서 나쁠 것이 없다’의 ‘알아봐서’가 천문학적 규모임은 자명했다.

-그래서 얼마나 더 듭니까?

종국에 유럽 연합 의장이 본론을 꺼냈다. 침 튀기며 발광하던 각국 정상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때가 바로 한국 대통령이 나설 때였다.

-우리는 염력 트리플 S급 에스퍼, 두뇌 강화 A급 에스퍼 1명 외 가이드 1명과 행정 장교 1명 외 제공 인력 관련한 후방 지원을 하겠습니다.

뭔가 대단한 걸 내놓는가 했지만, 결국 지금 하와이에 있는 4명이 다란 소리였다. 그래도 감히 토를 달 사람이 없었다. 저들 대신에 돈을 내겠다고 하면 오히려 더 곤란했다.

“그럼 우린 얘기 끝난 거지? 가도 되나? 배고파서 말이야.”

묵묵히 조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깬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방진 발언이 가까운 마이크를 타고 세계 정상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강수혁 소령, 지금이 무슨 상황인 줄 압니까? 게이트에 관련한 패러다임이 변하는 막중한 시점입니다.

딴에는 강수혁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발급한 국가의 수반이라고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강수혁을 타일렀다.

“변하든가 말든가. 찾아오는 이유를 알면 뭐, 안 찾아오기라도 한대?”

-강 소령.

아주 시건방진 태도에 한국 대통령이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강수혁 소령이 에너지 소모율이 워낙 막강한 만큼 적절한 열량 보급이 필수다 보니, 식사 시간에 매우 예민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보다 못한 최정이 끼어들었다. 동시에 윤조가 강수혁의 손목을 잡고 아래로 쓰윽 끌어당겼다. 건방짐의 화신인 심 박사마저 이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아주 살짝 저었다.

“아줌마까지 왜 그래?”

“야, 몇 번을 얘기해. 저기 있는 사람 중에 딱 다섯만 연합해서 경제 제재 걸면 네가 사다 먹는 김치 공장 문 닫는 거 순식간이야. 앉아.”

다들 한국 땅에 지킬 게 있었다. 최정은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딸이, 심나연은 양친과 형제자매가 멀쩡히 살아 있다. 그에 반해 일가족을 모두 잃은 윤조지만, 그래도 얼굴을 알아보는 동창과 친구가 있고 또 연락이 드물어도 삼촌, 고모와 사촌들이 있다. 그들이 사는 땅이 경제 제재로 초토화되는 꼴은 피하고 싶었다.

혹은 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혼자서 잘 살겠다고 강수혁과 함께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방법도 있으나, 그건 그거대로 골치였다. 특작부만큼 강수혁을 유연하게 다룰 군대가 타국에도 과연 존재할까.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나마 사이 나쁜 양부에, 성격 나쁜 이모에, 쭈굴쭈굴한 삼촌이라서 저 유치한 개망나니를 감당하는 거다.

“툭하면 먹을 것으로 협박하는데. 그게 먹힐 것 같아?”

“효과를 ‘먹힌다’로 표현하는 놈이 뭐래. 앉기 싫어?”

심 박사가 고개를 돌리고 수혁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강수혁이 마치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리에 척 앉았다. 하여간 쪽팔리게 하기엔 선수였다.

-말이 나온 김에 그럼 식사하고 다시 모일까요?

-그럽시다. 1시간 휴식 어떻습니까?

한국 대통령이 제안하고 미국 대통령이 받았다. 만장일치로 1시간 휴식이 정해졌다. 진짜 밥을 먹는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참모와 의논할 시간이 필요했다. 실제로 화상 회의 프로그램이 꺼지자마자 하와이 주둔군 사령관의 개인 단말이 울렸다. 저쪽 대통령의 개인 호출이었다. 동시에 이쪽의 개인 단말도 울렸다. 당첨자는 최정이었다.

“네, 네네. 알겠습니다. 대기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최정이 한숨을 쉬었다.

“중장님이야. 대통령실에서 회의 같이 보고 있었나 봐. 이따가 전화할 테니까 스피커 폰으로 받으래.”

“오랜만에 단체 잔소리 타임이네.”

특작부 일행은 강수혁의 힘에 의해 심 박사의 숙소로 이동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윤조는 보안 체크에 나섰고 심 박사는 보안용 통신 장치를 가동했다. 최정은 회의 동안 정리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동안, 강수혁은 식사 준비에 집중했다.

메뉴는 마늘 오일 파스타였다. 말이 파스타지 솔직히 올리브유 마늘 볶음에 국수 첨가로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들통에 파스타 세 봉지를 쓴 거라 양도 어마어마했다. 반찬으로는 한인마트에서 사 온 깍두기와 명이나물이었다.

최첨단 군용 기밀 장비 옆에 대형 접시 4개가 놓였다. 강수혁표인 만큼 맛은 보장되어 있으므로 다들 맛있게 먹었다. 그러는 사이 심 박사의 기밀 통신 장비가 삐익 울었다. 접시를 든 채로 심 박사가 생체 코드를 입력했다.

-뭐야? 왜 화면이 뿌옇나?

“아, 카메라에 국물이 튀었네요.”

심 박사가 소매를 끌어당겨 장비 카메라를 닦았다. 그러는 사이 저쪽에서 탄식이 터졌다. 강수혁이 고개를 들었다.

“꼰대만 있는 게 아닌데?”

-대통령일세.

“아.”

최정이 파스타 접시를 들고 조용히 카메라 밖으로 피신했다. 그를 부러워하면서 윤조는 기름이 묻은 입을 얼른 닦았다.

-식사 중인가?

“아닙니다. 막 끝났습니다.”

윤조가 대답했다. 다른 두 에스퍼는 그러든가 말든가 먹었다. 하여간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강화 인간 새끼들.

-배고플 만도 하지. 먹으면서 듣기만 하게.

고작 준위가 국군통수권자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자라 주변의 쪽팔림에 대한 배려까지 받는 바람에 윤조는 송구함을 감추지 못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방금 미국 대통령이 말했는데, 그쪽 정보부가 전파 발생 의심 물체를 찾았네.

“그렇습니까?”

꽤 희망적이면서도 동시에 은근히 화가 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게이트가 우주적 자연 현상이 아니라 어느 미친 새끼의 어떤 미친 짓으로 인해 지구에 나타난 거면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일단 증거를 확보한 후의 일이었다.

-그 위치가 좀 희한하다네. 장선욱 중장.

그러면서 대통령은 장선욱에게 시선을 던졌다. 화상은 계속해서 대통령을 비추고 있으나, 목소리는 장선욱으로 바뀌었다.

-좌표를 송신했네. 확인하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AI가 암호화된 통신을 해석하여 윤조에게 알렸다. 그런데 좌표가 기이했다.

지구가 아니었다. 지구의 위성 궤도도 아니었다. 인류가 밟은 적 있는 달이나 탐사선을 보낸 화성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예 별세상도 아니었다. 훨씬 애매한 위치, 하지만 그럴싸한 곳이었다.

라그랑주 포인트. 지구를 중심으로 중력 균형을 이루는 세 지점. 그중 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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