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로아무아가 강수혁을 상대로 승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오로지 육탄전으로 혹은 개인이 보유한 능력만으로 강수혁을 상대하기 위해선 전 세계 모든 에스퍼들이 동시에 덤벼야 가능성이 있을까 말까 했다.
막강한 후방 화력 지원과 적절한 전술 지원이 없이는, 에스퍼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도 전투 재능이 탁월한 강수혁에게 각개격파 당할 확률이 더 컸다. 당연히 이런 압도적 화력 차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는 대외적 비밀이었다. 그의 가이드인 윤조와 특작부 소속으로 공적, 사적으로 지독하게 얽힌 인물 셋이 전부였다.
셋 중 둘이 윤조 인근에 얼쩡댔다.
특작부 생활비를 벌려고 부업을 시작한 카메라맨 최정은 아까 길거리 농구를 빙자한 난투극이 시작될 무렵부터 바람처럼 나타나 셔터를 눌러 댔다.
“때깔 좋다. 그림 끝내준다. 비싸게 팔리겠다.”
감탄사를 연발하던 그는 벌써 메모리 카드를 두 개째 교체 중이었다.
최근 외계 지성체의 의식 탐색에 본격적으로 나선 바람에 세상에서 제일 잘난 머리는 혹사하던 심나연은 때때로 과열된 뉴런을 식히기 위해 근무 중에 무단으로 귀가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쪽에 흥미를 보이며 다가왔다. 난투극 직후 의식을 잃은 부상자들을 분류하고 치료하는 의무병들을 보며 관심을 안 가지기도 어렵긴 했다.
“수혁이 짓이야?”
“네. 상호 동의하에 시합했습니다.”
“그랬겠지. 그런데 동의 없이 일방적이라도 어쩔 거야. 네가 페널티 날리지 않으면 누가 쟬 잡아가겠어.”
콘크리트 훈련장에 농구 골대만 세운 간이 코트 옆에 앉아 있는 윤조 곁에 심 박사가 자리를 잡고 들고 온 종이봉투를 주섬주섬 열었다. 그 안에서 반으로 갈라 마늘 버터를 바르고 고기 대신 고함량 특수 에너지 바를 끼운 희한한 바게트 샌드위치를 꺼내 윤조에게 권했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혹 허기가 있더라도 기꺼이 먹고 싶은 모양새는 결코 아니라 정중히 거절했다.
“쟤, 수혁이 이길 자신은 있다니?”
로아무아랑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심 박사는 험악한 덩치를 자랑하는 마우이족 출신 전투 교관을 옆집 애처럼 ‘쟤’로 칭했다.
“모르겠습니다. 지켜봐야죠.”
“어디 부러지지나 않을까 몰라.”
그러면서 심 박사는 뻑뻑한 샌드위치를 삼키기 위해 단백질 파우더를 잔뜩 넣은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 별로 걱정스러운 투는 아니었다.
-화력 차이가 압도적이니 핸디캡은 줘야지.
“좋아. C급 에스퍼 출신 가이드를 상대로 힘을 쓰면 오히려 내가 쪽팔리니까.”
로아무아의 요구에 강수혁이 응했다. 그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편안하게 섰다.
-능력 활성화는 당연히 금지. 양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발도 이동용으로만 사용. 비행 금지, 점프는 가능.
“순수 신체 능력만 사용하란 거네. 좋아. 목표는?”
-점수 10점 내기. 슛을 네다섯 번 정도 성공하면 돼.
“너무 쉽잖아.”
-그래? 그럼 2점 내기.
로아무아가 단판 승부를 제안했다.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데. 잘해 봐.”
수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능력을 활성화 단계로 끌어올리지 않아도 일정 반경 내에 물체를 제어할 수 있다. 기어를 넣고 가속기를 밟지 않아도, 엔진이 돌아가는 한 열이 방출되는 것처럼, 수혁이 살아 숨 쉬는 한 능력이 자연스럽게 넘실거렸고 그 덕분에 공기를 포함한 입자와의 상호작용은 숨쉬기보다 쉽다.
“한참 연장자시니 선공도 양보할게.”
-고마워.
단독으로 나선 로아무아는 가볍게 인사하며 농구공을 잡았다.
텅. 텅.
주황색 농구공이 바닥을 힘차게 두드렸다. 로아무아가 골대를 기준으로 4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원을 그리며 드리블을 이어 갔다. 느긋한 태도로 허점을 탐색하는 동안, 수혁은 골대 인근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시간 간다. 늙어 죽을 셈이야?”
뜸을 길게 들이는 로아무아를 향해 수혁이 도발했다.
-어차피 할 일이 없는데 시간 좀 들여도 되잖아.
“난 바빠. 우리 연두부 저녁밥 해 먹여야 해.”
쓸데없는 소리에 심 박사가 묵묵히 윤조를 봤다. 하도 익숙해서 이젠 낯이 간지럽지도 않다.
-오, 좋은걸? 코리안 바비큐와 소이빈 페이스트 스튜가 아주 맛있더라고. 코리안 소주는 내가 준비하지.
“초대한 적 없어. 오지 마. 꺼져.”
일전을 떠올린 수혁이 진저리쳤다.
-동료끼리 섭섭하게. 네 소프트 토푸의 의견도 그래?
“동료는 무슨, 얼어죽을. 물어보나 마나 나랑 같아.”
그러면서 수혁이 이쪽을 흘끔 봤다. 어차피 하와이 주둔군에서 식대를 다 내고 있으므로 딱히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들의 유치한 말다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철컹!
림의 철 그물이 흔들렸다. 로아무아의 손에 들려 있던 공이 어느새 림 아래에서 퉁퉁 튀고 있었다.
“어?”
“아니?”
놀란 건 수혁뿐만이 아니었다. 윤조도 당황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내 승리야.
로아무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무슨? 언제?”
윤조는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녁밥 얘기가 나오자마자 먹던 샌드위치를 봉투에 도로 넣은 심 박사가 손을 잡아끌었다.
“깔끔하게 당했네.”
“네?”
“무슨 짓을 한 거야?”
당황한 수혁이 로아무아를 노려봤다. 거구의 중년 여성이 골대까지 달려 골을 넣기까지 최소 2초. 그동안 수혁은 로아무아의 움직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농구라서 다행이지 전투 상황이라면 그 2초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진주색으로 일렁이는 홍채를 마주한 로아무아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정정당당한 능력 대결이었어.
“이 새끼, 죽고 싶어?”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는 수혁을 말린 건 다름 아닌 심 박사였다.
“너희들이 졌어. 이상한 짓 아니야. 쟤는 본인 능력만 사용했을 뿐이야.”
“어떻게요?”
윤조가 물었다.
“뮤트. 너희들 얘기하는 사이에 쟤가 골 넣은 거야. 난 봤다. 최정! 너도 봤지?”
“어, 찍었어. 볼래?”
저쪽에 있던 최정이 대답했다. 윤조는 그에게 다가가 보여 주는 화면을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윤조와 수혁이 짧게 잡담을 주고받는 동안 로아무아가 림을 향해 슛을 날렸다.
“저희가 당한 게 맞습니다.”
윤조의 확인에 수혁이 심 박사를 향해 항변했다.
“나한텐 그런 거 안 통하잖아?”
“너한텐 안 통하지. 그런데 윤조한테는 통하잖아. 윤조의 정신을 조작하면서 너에게도 일시적으로 감각 마비를 일으킨 것 같은데. 역시 윤조가 네 약점이야. 김윤조 털리면 너도 털리는 거네.”
“의식 동조를 해킹할 수 있는 거였어?”
“그러게.”
심각한 사안인데도 심 박사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미리 알고 있으면 네가 대비를 했겠지? 허점을 찔러야 제대로 알아보지.”
그렇게 대답하는 창조주는 윤조만큼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반대로 내기에서 이긴 로아무아는 즐거웠다.
-그러니까 전부터 외계 지성체가 강을 탈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잖아. 10달러 내놔.
판돈을 건 진짜 내기는 둘이서 한 모양이었다.
“달아 놔.”
이긴 판돈을 뜯어낸 적은 있어도, 진 판돈을 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지르는 외상을 진짜로 믿은 순진한 전투 교관이 승리의 미소를 짓는 사이, 허를 찔린 강수혁이 승복할 수 없다고 나왔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미리 말했어야지.”
-적을 상대로 전력을 미리 오픈하는 멍청이도 있나?
“지금은 전투 아니거든? 농구 중이거든?”
항상 목숨을 내놓고 게이트에 맞서는 최전선 전투병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차마 꺼내질 못할 유치한 핑계였다. 심 박사는 쓴 소주를 마신 사람처럼 거친 탄사를 ‘크아’ 뱉었고, 김윤조는 부끄러운 망나니를 못 본 척 외면했다.
-내가 뭘 들은 거지?
로아무아가 황당한지 헛웃음을 지었다. 부상자와 그들을 수습하던 의무팀마저 “왜 저래?”라며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쪽팔린 거 없는 세계 최강의 에스퍼는 안면 몰수하고 질척였다.
“어쨌든 한 번 더 해.”
-질 게임은 안 해.
“치사하게 굴지 말고.”
-치사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지. 나는 트리플 S급 에스퍼를 상대로 2점을 따낸 유일한 인류가 되는 거야. 앞으로도 영원히.
“이 망할 아줌마가!”
업그레이드한 군용 통역기는 ‘아줌마’를 과연 어떤 단어로 변환했을까. 로아무아가 기가 막힌 듯이 입을 쩍 벌리곤 심 박사와 김윤조를 돌아봤다. 아이돌 자율 콘텐츠 직캠 확보에 몰두한 매니저 최정이 그런 로아무아와 두 사람까지 화면에 담았다.
-재대결을 하고 싶으면 교관이라고 불러.
“아줌…… 교관.”
뒤늦은 사회화 과정을 이수 중인 에스퍼가 오만상을 구기면서 호칭을 바꾸었다.
-제대로.
“로아무아 교관, 한 판 더 붙어.”
-추후 여유가 되면 생각해 보겠네. 지금은 전략 훈련 시간이라 그럼 이만.
로아무아가 씩 웃으며 가벼운 경계를 붙이고 총총 사라졌다. 유치한 수법에 당한 수혁이 빡이 치는지 발을 굴렀다.
퍽!
콘크리트 바닥이 두부처럼 으깨면서 발목까지 파묻혔다.
로아무아가 뒤를 도는 동시에 등허리에 차고 있던 휴대용 소형 화기를 꺼내 수혁에게 겨누었다.
-그만두게. 연합 수뇌부 회의가 곧 시작될 걸세. 다들 움직이지.
어느새 노리스가 나타나 큰소리로 통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