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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53화 (230/256)

153화

사하공화국 수도 야쿠츠크에서 남쪽으로 74km 떨어진 작은 마을은 유전 발견으로 개발이 한창이었던 지난 세기 초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외지인으로 북적였다. 목축과 낚시 외엔 딱히 즐길 걸 리가 없는 광활한 초원이기에 특별한 관광 코스를 찾아온 건 절대로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하늘엔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렸다. 굴곡 없이 평지만 이어진 덕분에 더욱 가까이 보이는 녹색 게이트는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고도 소름 끼치게 도사렸다.

지금으로부터 13시간 전, 소형 게이트 다섯 개가 다중 생성되었다. 초기에 효율적인 대처로 두 개를 조기에 처리하면서 사기가 오른 슬라브 전사들은 나머지 게이트 소멸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때 인간을 조롱하듯 나머지 세 개가 갑자기 합쳐졌다. 그런 현상은 또 처음이었다. 당혹감을 감추기도 전에 형성을 마친 초대형 게이트는 막대한 질량의 슬라임을 지표면으로 쏟아냈다. 꼭 우주적 존재가 지구에 대고 설사하는 모양새였다.

이곳은 벌판이었다. 슬라임 홍수를 막아 낼 강이나 언덕 같은 지형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초대형 게이트가 쏟아내는 슬라임 설사는 사방으로 빠르게 퍼졌다.

-아나나스! 이 쌍놈들아! 뭘 보고 있어! 빨리 땅부터 갈아!

가이드이자 캡틴이 호통치자 알파 팀이 튀어 나갔다.

A급 염력 사용자인 알파 팀이 팔을 뻗자 후방에서부터 아나나스라고 불리는 바퀴형 무기가 튀어나왔다. 지름이 성인 남자를 능가하는 데다가 날카로운 곡괭이가 360도 돌아가며 박힌 아나나스는 맹렬하게 회전하며 평평한 땅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바퀴가 일렬로 지나간 자리마다 큰 구덩이가 생겼다. 물 없는 강에는 슬라임이 흘렀다.

-지금이다! 봄바, 이 게으른 쌍놈들아! 쏟아부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베타 팀이 날아들었다. 염력 조정은 미숙하나 출력이 상대적으로 센 자들로 인근 천연가스전에서 확보한 가스 운반용 기차 화물칸 하나를 슬라임 강으로 던졌다.

쿠쿵! 퍼퍼펑!

고막을 찢는 폭발과 함께 무시무시한 화염이 확 번졌다. 마른강에 빠진 슬라임이 일제히 타올랐다.

-소각 확인 중!

슬라임은 대부분 쪽수가 문제일 뿐, 개체 자체는 전투력도 모자라고 느리고 아둔했다. 그렇기에 단순한 작전의 반복도 잘 통했다.

-좋아! 이대로 간다! 아나나스! 봄바!

자신감을 얻은 캡틴의 지휘에 따라 알파 팀과 베타 팀이 번갈아 슬라임을 조지기 시작했다. 슬라임이 착륙하는 속도보다 소각되는 속도가 빨랐다. 30량에 이르는 액화 천연가스 기차 한 대 분이면 지금 인원으로도 충분히 없앨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막 생길 무렵이었다.

우우우우웅. 쿠쿠우우우우웅.

하늘이 울었다. 얌전한 설사 구멍 같은 게이트가 일순간 변화무쌍해졌다. 변동 폭이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는 원형이 아니라 아주 불가사리로 변했다. 낡은 트럭의 썩은 머플러처럼 털털 떨던 게이트가 갑자기 맹렬한 속도로 슬라임을 내뿜었다. 이제껏 생성하던 양의 다섯 배는 되었다.

-시발!

-설사 새끼!

각 팀이 피를 토하면서 날뛰었다. 하지만 준비한 액화 천연가스 탱크 30량을 다 소진하고도 슬라임의 확장세를 꺾기는 역부족이었다. 액화 천연가스를 채운 다른 열차가 전속력으로 부상하고 있으나 당도하기 전에 슬라임이 저지선을 넘을 것이 분명했다.

캡틴은 불안한 시선을 위로 던졌다.

망할 게이트 새끼. 오염 확산을 저지하려면 오염물질을 싸지르는 수도꼭지를 잠가야 했다.

하지만 당장 액화 가스를 실은 기차가 도착한다손 치더라도 이미 팀의 체력이 한계에 이른 상황이었다. 태평양 연합에서 지원군을 급파할 거라는 모스크바의 전언이 있었으나 솔직히 기대는 안 했다.

수송기로 하와이에서 여기까지 이동하는 시간도 있을뿐더러, 더불어 누가 와도 이 게이트를 닫기까지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고, 그동안 망할 슬라임 홍수는 비옥한 토지를 초토화하고도 남는다. 대(對) 게이트 전투는 이겨도 인류의 존속을 건 전쟁에서는 큰 패배를 맛본단 얘기였다.

악조건 속에서 캡틴은 가이드로서 에스퍼를 보호할지, 혹은 국가에 충성하는 군인으로서 마더 러시아의 보전을 우선할지 가늠했다. 아무래도 선택은 전자로 기울어졌다. 버틸 때까지 버텨 보고 튀는 거다.

-동쪽, 북쪽은 포기하고 서쪽과 남쪽에 집중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서진과 남하만 막아!

캡틴이 대원에게 명령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인간이 살기 힘든 극지방을 포기하고 어떻게든 서쪽과 남쪽 방어에 총력을 기울일 뿐이다.

짙은 패배감을 떨치지 못한 중에도 리더를 비롯한 에스퍼는 과열되어 폭발하기 직전인 레이저 건으로 슬라임을 조졌다. 대원 중 몇은 방전된 레이저 건을 버리고 군용 단검으로 슬라임의 핵을 물리적으로 타격해 터트렸다. 레이저보다 훨씬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방식이었다. 그나마도 체력이 빠르게 소진되어 확산 저지선이 남서부로 이동했다.

-더는 못 버팁니다!

-이러다가 다 죽습니다.

대원들이 캡틴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포기하고 퇴각하라는 캡틴의 한마디를 기다렸다.

과열되어 총신이 녹아내리는 레이저 건을 던진 캡틴은 범람하는 슬라임에 떠밀려 흩어지는 대원들을 향해 퇴각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삐삐삐!

갑자기 경고음이 떴다. 헬멧 스크린에 뜬 표식을 따라 캡틴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처음에는 게이트가 또 변형을 일으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표식은 게이트 저편을 가리켰다.

-캡틴! 미확인 물체가 위성 궤도로부터 낙하 중입니다!

통신 담당이 외쳤다.

-식별 신호 수신 중…… 이 신호는 설마?

-전원 즉시 전력 퇴각! 휘말린다! 벗어나!

식별 신호를 분간한 캡틴이 고함 치자 에스퍼들이 즉시 흩어졌다. 캡틴과 인근에 있던 에스퍼가 상대적으로 느린 캡틴을 낚아챘다. 부하에게 떠안긴 캡틴은 미친 속도로 달아나는 중에도 조금도 멀어질 기미가 없는 게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짝!

불길한 형광 오로라를 끼고 맴도는 게이트 저편에 반디처럼 작은 빛이 반짝 켜졌다. 태풍에 맞먹는 게이트에 비하면 그 빛은 미세한 먼지에 지나지 않았다. 대기의 흔들림에 따라 물먹은 별처럼 흔들리는 빛은, 하지만 고집스럽게 방사능 소용돌이 중심부를 향해 돌진했다. 불길한 구멍은 맹랑한 빛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키에에에에에!

끔찍한 비명이 온 하늘과 대지를 뒤흔들었다. 게이트 중심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타르보다 더 끈적하고 시커먼 무저갱에서부터 맑은 빛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티끌 크기였던 빛은, 캡틴의 거친 날숨이 반복될 때마다 거짓말처럼 커졌다.

금방 동전만 하게, 야구공처럼, 비치볼 크기로 몸집을 불린 빛은 이내 아득하게 성장했다.

번쩍!

환한 빛이 하늘을 갈랐다. 까마득한 빛의 창이 검은 소용돌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원반에 꽂힌 작살 같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꿰뚫린 게이트가 비명 대신에 막대한 진동을 발산하던 중, 빛의 창이 180도 빙글 회전했다. 게이트 저편에 뻗은 끝은 하늘에 무지개 같은 포물선을 그렸고, 대지를 향해 비스듬하게 뻗은 이쪽 끝은 아나나스로는 꿈도 꾸지 못할 깊은 계곡을 단숨에 파냈다.

키이이이이이!

반으로 갈라진 게이트에서 끔찍한 고성이 튀어나왔다.

쿠르르릉.

잘린 게이트가 조각조각 비산(飛散)하기 시작했다. 실제 파쇄는 음속을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맹렬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워낙 막대한 규모이기에 지상에서 관찰하기에는 대단히 느긋하고 잔잔하게 보였다.

빛보다 늦게 도착한 충격파가 당도했다. 캡틴을 안고 달리던 에스퍼가 충격으로 고꾸라졌다. 가이드인 캡틴도 마찬가지였다.

사막을 구르는 회전초처럼 충격파에 떠밀려 진창을 데굴데굴 뒹구는 사이 잘못 부딪친 덕분에 헬멧이 완전히 망가졌다. 손상된 고막으로 인해 통증이 심했기에, 캡틴은 날카로운 노이즈를 발산하는 헬멧을 벗어 버렸다. 럭비 선수용과 비슷하게 생긴 헤드기어를 벗자 양 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삐――.

이명이 이어졌다.

에스퍼는 등으로 충격파를 고스란히 흡수한 덕에 그에게 안긴 캡틴은 상대적으로 멀쩡할 수 있었으나, 대신 대원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쓰러진 대원을 향해 기어간 캡틴은 제 대원의 헬멧을 풀고 그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살아 있었다.

-시발, 누구 뒈진 사람? 전부 살아 있어?

-아나나스! 봄바! 응답하라!

생존 대원들이 제각각 동료의 생사를 확인했다.

-나는 일단 살아 있어.

-아직 안 뒈졌네.

-캡틴? 캡틴은?

이쪽 둘도 살아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어지러워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휘청이는 머리를 간신히 가누면서 어떻게든 입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자냐는 목숨이 붙어 있어. 그런데 캡틴이 확인이 안 돼! 그쪽 가까이 있는 게 누구야, 확인해서 보고…… 으악! 시발!

쿠웅!

굉음과 함께 지면이 흔들렸다. 방금 생성된 거대한 협곡에서 미친 불길이 피어올랐다. 누군가 슬라임 전체를 소각 중이었다. 얼마나 강한 불길인지 일 킬로 이상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뜨거울 정도였다.

붉은 불의 강을 홀린 듯 보는 사이 안면에 열기가 사라졌다. 고개를 들자 주황색 불빛을 등진 인물이 1미터 전방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캡틴 일리코프, 대위 예브스키. 생존 확인. 충격파에 당하긴 했지만 비교적 양호한 상태입니다.

통신에 대신 대답한 그는 캡틴을 향해 흰 전투복을 걸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민국 육군 특작부 소속 가이드 김윤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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