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김치에 남다른 집착을 가진 대한외계인 강수혁과 그의 사이드킥 윤조에게 출동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은 일단 태평양 연합 수뇌부에 있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불성실한 태도에 명령 불복종, 나아가 항명을 해도 실질적으로 강력한 에스퍼를 제재할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실질적 출동 여부는 강수혁 본인의 판단에 달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대체로 비협조적이다 못해 수틀리면 사방을 초토화하고 남을 성질머리로 유명하기에, 특작부 내에서도 막 완성된 프로토타입 가이드를 최우선 배치했을 만큼 다루기 힘든 트리플 S급은 태평양 연합 이름으로 내려지는 명령에 관해 의외로 간단한 기준을 내세웠다.
“김윤조가 동의하면.”
결과적으로 2인조 지구방위대의 출동 여부는 김윤조의 판단에 달리게 되었다. 이조차도 특작부 소속은 모두 예상한 바였다. 심지어 김윤조 본인도 알았다.
개망나니적 모먼트에 당황한 건 태평양 연합에 참여한 각국 수뇌부였다. 그들은 일전 회의에서 수혁이 쌍욕과 함께 자리를 뜬 것에 대해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저렇게 폭력적이고 비협조적인 에스퍼를 자유롭게 놔둘 수 있느냐고 장선욱과 심나연을 향해 항의했다.
인류 존속이라는 막중한 책임 의식과 함께 절도와 상하 위계 존중, 닥치고 명령 이행 같은 군인으로서의 미덕을 강수혁에게 기대하는 눈치 없는 외국 수뇌부를 향해 특작부 소속 두 사람이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재하고 싶으면 알아서 하쇼. 대신 우리 한국군은 빠질 거요.”
“나도. 참고로 핵미사일 정도는 쏴야 할걸? 물론 수혁이 살짝 돌아서 그걸 안 피하고 얌전히 맞아 준다는 전제하에. 인근에 김윤조라도 있으면 그쪽이 쏜 핵미사일은 그쪽 나라 수도로 직격할 거고. 참, 쏘기 전에 연합국에 미리 통보는 하시죠? 그 나라에 있는 국민 소개 작전 구성해야 하니까.”
태평양에 발생한 F형 게이트를 단독으로 파괴하고도 모자라 넘치는 힘으로 북미 항모 전단을 전투 불능으로 빠트린 에스퍼를 상대로 뭘 어떻게 제재하란 건지. 강수혁과 심나연이 선을 긋자 각국 수뇌부는 트리플 S급을 통제도 못 하면서 그들의 상관이라고 할 수 있냐고 가당찮은 성토를 했다. 심지어 발언권이 없는 일본도 나댔다.
-미 12함대 전투 자료를 봐야 할 시점이군요.
중간에 하와이 주둔군 사령관이 끼어들었다.
탈(脫) 지구급 개망나니가 아직 국내 전용 골칫거리로만 여겨질 때, 북미적인 혹은 세계적인 골칫덩이 역할은 미 12함대의 것이었다.
군인으로서 선을 한참 넘은 흉악한 외모와 불성실한 태도를 묵인하고도 남을 무지막지한 화력과 전투력을 자랑하던 12함대가 강수혁과 김윤조의 콤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장면을 똑똑히 본 태평양 연합 수뇌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강의 협조를 바란다면 자유를 보장하십시오. 더불어 국가 존속을 위한다면 그의 가이드에는 손도 대지 말길.
비록 협상용 인질이었으나 특작부에 머물면서 내부 분위기를 어느 정도 파악한 노리스가 쐐기를 박았다.
심 박사는 노리스와 롭슨과 함께 게이트가 발산하는 미지의 의식을 수신하기 위한 장치 개발에 골몰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가까우면서도 게이트와의 교신(?)에 성공한 윤조를 이용하는 방법이 대두되었다. 당사자의 의사, 혹은 당사자보다 더한 페어링 에스퍼의 의사를 묻기도 전에 태평양 연합 수뇌부에서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통제 불능인 트리플 S급 에스퍼의 안정성을 해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에 다른 가이드 ‘사용’을 제시했다.
가이드의 안정성과 경험을 따져 다양한 형태의 가이드 그룹을 형성했다. 노련함과 안정성으로는 대체할 사람이 없으며 노령에 이른 지금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강력한 가이드인 노리스, 신체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발군의 뮤트 실력을 뽐내는 동시에 기민한 눈치를 가진 로아무아 외에 러시아 육군 출신 젊은 남성 가이드인 드미트리가 합류했다. 거기에 통신이 불가할 경우 각 가이드를 이어 줄 보조 수단으로 에이브리가 있었다.
외계 지성체와의 대화 시도를 향한 집중 탐사에 돌입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러시아발 협조 요청이 도착했다.
“사하공화국에 M형 게이트가 터졌다는군. 다중 게이트로 처음엔 5개였는데 소형 두 개는 커지기 전에 닫았고 다른 세 개는 합쳐져서 초대형이 되었대. 그쪽 에스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데. 어쩔래?”
“사하공화국이라면…… 시베리아군요.”
윤조가 AI를 통해 게이트 위치부터 파악했다. 극지방에 걸쳐져 있는 러시아 내 지역으로서 경도상으로는 한국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시베리아라면 사람도 없는데 굳이 뭐 하러 고생을 해. 슬라임 한껏 토하고 나면 알아서 닫히겠지.”
“그건 그런데. 거기가 한파 근원지라서.”
심 박사가 덧붙이면서 겨울마다 한반도를 덮치는 시베리아 기단이 어디서 어떻게 흘러 들어오는지에 관한 기상 관측용 위성 지도를 보여 주었다.
“여기가 오염되면 될수록 우리가 위험해져. 겨울 되기 전에 제염작업을 끝내려면 한시라도 빨리 게이트 빨리 닫아야 해.”
“하여간 쥐방울만 한 나라가 위치 선정 하나는 끝내주지. 어쩌다가 저기에서 태어나서는.”
옆에 있던 수혁이 괜스레 툴툴댔다.
“당장 출동합니까?”
“그럴래? 전투복 조정은 끝내고 바로 가. 12분쯤 남았네.”
마침 전투복 조정을 하던 중이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로 강화된 동조 시스템은 전투복에도 적용이 되어서 이제는 윤조 단독이 아닌, 수혁의 전투복과 함께 조정해야 했다. 그 말인즉, 수혁도 헬멧만 쓰면 바로 대(對) 게이트 전투가 가능하단 뜻이었다.
조정이 끝나고도 수혁의 헬멧을 찾느라고 3분 이상 허비했다. 하지만 최신예 전투기를 능가하는 속도로 날아간 덕분에 훨씬 먼저 출발한 태평양 연합 소속 수송기를 단 15초 만에 따라잡았다.
우주선용 소재로 새로 만든 전투복이 초월적인 속도로 인한 태풍급 공기 저항은 잘 막아 주었으나, 중력 가속도까지 상쇄하진 못한다. 예전이라면 기절하고도 남았을 속도에도 윤조는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외계 지성체의 영향을 수혁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민항기 운항 영역입니다.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사고가 날 수 있으니 고도를 더 올리거나 낮추십시오.
윤조의 지시에 수혁은 더 위로 올라갔다.
대기를 뚫는 로켓처럼 맹렬한 속도는 느려졌다가 극점에 이르러서는 거의 멈췄다. 고요하고 차가운 그곳은 지구와 우주를 가르는 경계였다. 아래를 보자 희미한 공기층을 휘젓는 두 발 사이로 곡선으로 부드럽게 구부러진 지평선이 보였다. 푸르고 흰 별을 향해 태양은 휘황찬란한 빛을 내던졌다.
-지구는…… 참 예쁘네요.
윤조는 감탄했다. 지구를 밖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괜히 콧등이 시큰거렸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이 콩알만 한 별에 뭘 볼 게 있다고 괴물 놈들이 꾸역꾸역 찾아오나 싶기만 한데.
-낭만을 좀 가지십시오.
-무슨 얼어 죽을 낭만. 하강 좌표나 줘.
차라리 심 박사와 함께 로맨스를 논하지. 강수혁을 상대로 낭만을 논한 제가 잘못이었다. 윤조는 제 어리석음을 비판하며 좌표 계산 후 비행경로를 수혁의 헬멧으로 전송했다.
-음?
좌표를 잘 수신한 수혁이 별안간 고개를 사방으로 휙휙 돌렸다. 꼭 뭐를 찾는 사람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게이트가 나타났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윤조를 단단히 안은 수혁은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시베리아 쪽을 향해 내려가야 하는데 도리어 더 위쪽으로 가는 바람에 윤조의 궁금증이 더 커졌다.
-뭔지 몰라도 낭비할 시간 없습니다. 중요한 게 아니면 다음에…….
-저거네.
수혁이 날아가던 방향 쪽을 가리켰다. 윤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다. 거기엔 뭔가가 있었다. 윤조는 전투복 카메라로 그 물체를 확대하여 무엇인지 확인했다.
-저건…….
좀 전 둥글게 말리는 지표면을 보았을 때처럼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그건 윤조의 AI 위성이었다. 제 위성을 생눈으로 보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얀색 누에고치 형태를 가진 인공구조물로서 각진 잠자리 날개 같은 집광판이 4개 달려 있었다. 아래로는 안테나로 추정되는 긴 철심이 나와 있었다. 천천히 돌아가는 흰 고치 표면에는 [KOR ‘윤석’ G0001-pt] 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위성의 이름이 따로 있는지 몰랐다. 그것도 윤석일 줄은 더더욱.
가이드 프로젝트에 참여 의사를 밝힌 이후, 적합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특작부 소속 정보부가 윤조와 딱히 안면도 없는 먼 친척까지 범죄기록과 각종 이력을 털었을 테니 제 죽은 쌍둥이의 존재에 대해서 이미 다 알았을 거다. 하지만 제 AI 위성에 쌍둥이 이름을 붙였을 줄은 몰랐다.
심나연식 유머? 아니면 배려? 혹은 코드명 짓기 귀찮은 김에 그냥 쌍둥이 형 이름을 가져다 쓴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다 싫다. 그렇다고 마냥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약간은 반가운데 이상하게 슬프고, 재미있는데 한편으로 가슴이 아렸다. 콧등이 시큰거리면서도 괜히 짜증도 치밀었다.
-네 깡통도 꼭 연두부처럼 생겼네. 다른 놈들에 비하면 꽤 귀여워.
-……그러네요.
-그게 다야? 네 영혼의 쌍둥이를 봤는데?
망할 개망나니 덕분에 애매하던 기분이 한결 선명해졌다. 물론 안 좋은 쪽이긴 하지만. 지금 기분 같아서는 대형 게이트를 혼자서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봤으니까 이젠 작전에 집중하시죠.
-삭막하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의 심장을 난도질한 에스퍼는 꽤 실망한 눈치로 방향을 틀었다. 시베리아 한중간을 향해 자유낙하 하면서 윤조는 이를 벅벅 갈았다. 그리고 게이트부터 패 준 후, 시키지도 않은 짓으로 사람을 골탕 먹이는 빌어먹을 에스퍼와 제 소시오패스 창조주를 처절하게 응징하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