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151화 (228/256)

151화

15. 탐색

단순한 고민은 진지하게, 진지한 고민은 단순하게 역전하는 능력이 탁월한 두뇌 강화 인간 심나연 박사와 트리플 S급 에스퍼 강수혁은 출생의 비밀이 가져온 충격을 아무렇지 않게 극복했다. 심란한 사람은 그들 사이에 낀 윤조뿐이었다.

이튿날, 환청 얘기가 하와이 주둔군 사이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각국이 전부 정보 공유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심 박사의 주도로 환청 문제 브리핑 겸 대책 회의가 열렸다.

환청 문제가 불거진 날 연구소에 있었던 인물 전부와 함께, 하와이 훈련에 참여한 각국 군 수뇌부도 화상으로 참여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장선욱도 있었다. 그는 엄격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건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마련된 자리니 앉아는 있으나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자리를 뜨겠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불량스럽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눈빛은 서늘했고 입매는 딱딱하게 굳었다. 옆에 앉은 윤조는 인조인간답게 묵묵한 태도만 유지했다.

“자,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알겠지만요. 다시 확인하자면 우리 애들, 지구방위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트리플 S급 에스퍼와 그의 가이드가 환청을 듣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각국에서 제출한 관련 기밀을 취합, 정리한 파일을 나눠 드렸으니 딴말 안 합니다. 혹시 파일 못 받으신 분은 여기에 있을 자격 없으니 조용히 꺼져 주시고요.”

누구누구 의붓 이모 아니랄까 봐서 심 박사는 각국 군 수뇌부를 앞두고도 평소처럼 껄렁한 자세로 무례한 발언을 이어갔다.

정보는 상호 교환이 기본 전제였다. 환청과 일부 가이드가 겪은 혼선에 관련한, 혹은 그에 준하는 기밀 자료를 공유하지 않은 나라는 이 회의에서 아웃이었다.

의뭉스러운 중국은 의미 없는 조작 자료를 냈다가 아예 배제되었다. 일본은 한국을 제외한 나라에만 공유하겠다고 했다가 한국이 아예 우리가 빠지겠다고 맞받아치는 바람에 곤궁에 처했다.

트리플 S급과 그의 전속 가이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뿐더러, A급 두뇌 강화 인간의 협조 또한 절실했던 미국은 일본을 조용히 쥐어팼고 후로 일본은 회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지 않는 조건으로 조건부 참여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료를 공유하는 건 러시아였다. 그들은 워낙 커버할 땅이 많아서 그런지 게이트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기술 관련이 아닌 현상 관련 정보 공유에는 아주 개방적이었다. 그 덕분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가이드 혼선 사건도 파일에 취합되었다.

미래 지향적이다 못해 빛의 속도로 달리는 심 박사는 수혁이 외계인과의 혼종이라는 점은 과거로 치부했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소시오패스 같은 성격은 차지하고서라도, 수혁의 유전적 특수성을 공개해 봤자 수혁과 특작부에 대한 국제적인 압박만 더해질 뿐이다.

무엇보다 수혁이 본인의 정체성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한국인뿐이라고 선언했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트리플 S급 개망나니의 선언에 반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G형의 의식이 수혁에게 전달되었다는 것만 밝혔을 뿐, 수혁을 동료로 부르고 합류를 요구했다는 부분 또한 특작부만의 기밀로 남았다.

“환청이 외계 지성체가 발산하는 의식이라고 가정합니다. 확실한 물증은 없어도 우리 망나니가 그렇게 증언했으니까요. 특정 개체 간에만 통하는 텔레파시의 일종으로 전제로 하고 현상을 분석하자면, 가이드의 동조율이 일정 이상 높아지면서 외계 지성체의 의식이 잡힌 게 아닌가 추정합니다.”

-라디오 주파수를 조정하는 중에 우연히 남의 통신을 낚아채는 거죠. 통신 혼선.

롭슨이 거들었다.

-어쨌든 외계 지성체와의 소통이 가능하단 거군. 지금까지는 지성체라는 표현이 어폐가 있다고 했는데 말이지.

좌장 격인 하와이 주둔군 사령관이 정리했다.

-게이트가 인간 진화를 촉진하여 에스퍼를 출현시켰다는 얘기가 이미 정설로 통하고 있소. 어떤 의미에서 에스퍼는 게이트와 인간의 연결 고리가 되는 거요. 물론 아직 연결이 매우 연약하긴 하지만. 더불어 가이드는 에스퍼를 기반으로 제작한 인공 휴머노이드로서, 우리의 존재 목적은 에스퍼와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결이요.

노리스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가이드는 에스퍼뿐만이 아니라 게이트와 소통할 수도 있다는 거요?

화상 속 미 국방부 장성이 물었다.

“그렇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는 왜 몰랐지?

“가이드가 생긴 건 상대적으로 최근이고, 또 각국 간의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은 탓도 있죠. 에스퍼를 통제하는 가이드 기술은 최고 기밀이니까. 나도 혼자서 뺑이 치면서 완성했지. 여기 있는 강 소령이 환청 문제를 거론할 때 마침 그 자리에 영감과 롭슨이 없었다면 이 회의도 안 열렸을 겁니다.”

심 박사는 가이드 기술 공유를 거부한 각국에 아직도 앙심이 있었다. 혼자서 머리가 터지도록 독자 기술을 개발해 놨더니, 국가 경제 제재라는 국제 깡패 수단으로 홀라당 털어먹는 양아치 태도에 대한 울분도 아주 컸다.

-맞아. 서로 간의 확고한 정보 공유 채널을 설립, 활용할 필요가 있소.

-그렇소. 이참에 기술 교류를 정례화합시다.

-에스퍼와 가이드 합동 훈련의 규모를 키우고, 횟수도 늘립시다.

이쪽이 더 나은 정보와 수단이 있음을 확인한 후에 입장을 180도 바꾸는 각국의 뻔뻔하고 비겁한 태도가 역겨웠다. 독자 생존이 어렵게 좁은 영토와 애매한 인구 규모 덕분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가 없는 것이 원통했다.

“그런 건 나중에 의논하시고. 환청에 관해서는 좀 더 많은 사례 수집이 필요합니다. 환청을 들은 가이드 중 현재 생존한 사람은 즉시 하와이로 보내시길 요청합니다.”

그에 각국 수뇌부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존자가 없다는 얘기였다. 환청을 들은 직후 정신 붕괴로 자살하거나, 혹은 자살에 가까운 사고로 죽었다. 환청 사례가 빠르게 공유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기도 했다. 환청을 들었다고 증언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내 침묵하던 강수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발. 무슨 회의가 이래? 재수 없기만 하네.”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수혁은 윤조에게 나가자고 턱짓했다. 더 있어 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윤조도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는 강수혁을 따르기 직전 윤조는 뒤를 돌아봤다. 화상 속 장선욱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지리멸렬한 회의는 별다른 소득이 없이 끝났다. 다만 한가지 확정한 것이 있는데, 환청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단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게이트에 대한 접근이 수월하면서도 정신 붕괴 위험이 가장 적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앞장서서 망할 놈의 환청을 수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날 더러 태평양 전체를 커버하라는 거야?”

따로 결정 사항을 전달하는 심 박사를 향해 수혁이 화를 냈다.

“아니.”

“그럼?”

회의 때문에 지친 심 박사는 에너지바를 까면서 대답했다.

“요청 있으면 대서양 쪽으로도 출동해야 해. 호주가 남극해 담당이니까 따지고 보면 지구 전체네.”

“예?”

이번엔 윤조가 놀랐다.

“태평양도 미칠 노릇인데, 지구 전체요?”

“다 하라는 건 아니고. 등급 높은 것만. 최소 대형 M이거나 복합형, 그리고 F형, G형은 말 안 해도 알 테고.”

에너지바를 뚝 깨문 심 박사는 천천히 씹었다.

“대형만이라고 해도 지구 전체로 따지면 연간 10회 이상은 터집니다.”

“정해진 사안이야. 하지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게으른 대답에 수혁이 눈을 번뜩였다.

“안 해도 돼?”

“그래. 안 해도 돼.”

“진심이야?”

의심병 환자처럼 따지고 드는 수혁을 향해 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가 싫다면 어쩔 건데? 특작부 헌병대는 소용이 없고 어느 나라 헌병대가 널 잡아갈 거야, 뭐야. 쪽수로 인민재판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안 하겠다면 안 하면 돼. 말릴 사람 없어.”

“그래도 되지? 나중에 뒷말하기 없어.”

“뒷말은 해야지. 뒷말이 나올 텐데.”

심 박사가 콧방귀를 꼈다.

“네가 안 하면 우리나라가 지구 왕따 되잖아. 나라 경제가 붕괴하고 살림이 팍팍해지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겠지. 배추, 고춧가루가 귀해지고 배추김치도 금치 돼서 양배추로 김치 담가야 할 거고. 근데 너, 양배추김치로 김치찌개 해 봤어? 난 예전에 괴식 좋아하는 어느 양반이 한번 해 줘서 먹어 봤는데 그거 먹느니 차라리 김치찌개를 끊을 거야, 난.”

그러면 그렇지. 그냥 안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뭐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문제니까. 정통 김치찌개의 명맥이 끊기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매국노 해. 아니면 외계인 하든지.”

수혁이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하란 얘기네.”

“강요한 적은 없어. 안 해도 돼.”

“할 거야. 하면 되잖아.”

수혁이 이를 벅벅 갈았다.

“자발적 참여다, 이거?”

“툭하면 국적을 건드리고 지랄이야. 신경 쓰는 거 알면서.”

이번 말다툼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된 부분에 대단히 민감한 에스퍼를 상대로 비겁한 수단을 동원한 인류 대표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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