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화나 나다 못해 머리꼭지가 돌 것 같았다. AI가 흥분이 지나치다며 경고음을 남발했다.
“흥분 안 하게 생겼냐, 이 눈치 없는 AI 새끼야! 너라도 좀 닥쳐!”
윤조는 숫제 호텔 천장에 대고 삿대질했다.
열받은 만큼 운동 에너지로 치환할 수 있다면 짱돌을 던져서 망할 AI 새끼의 위성에 달린 태양전지판 하나를 날렸을 거다. X선 촬영이 가능한 위성 AI는 건물 내에서 발작하는 또 다른 자아의 극심한 분노를 헤아리고 즉시 침묵했다.
“왜 열받은 건데?”
“열 안 받게 생겼습니까! 망할 내 배우자가 지금까지 나를 골탕 먹였는데요?”
윤조는 분노의 원흉에게 독사 같은 시선을 날렸다.
에이브리 핑계로 장난으로 화를 낼 때 수혁은 기겁하며 제 가이드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진심으로 화가 난 윤조 앞에서는 기가 죽은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도리어 뻔뻔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낯짝에는 불쾌감과 짜증도 서렸다.
감히 어디서? 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덩달아 윤조의 안면도 일그러지면서 군데군데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차분히 늘어져 있던 에스퍼의 양손이 바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슬슬 가학 성향이 올라올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둘 사이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알고 입을 닥친 AI가 굳이 가학 수치를 전달해 주진 않았다. 대신 붉은 점을 딱 세 번 깜빡였다. 조용한 경고였다. 저것은 자학이 아닌, 윤조를 향한 것이라고.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안 드는 파트너를 좀 패고 싶은 정도. 그 한 대가 제대로 맞으면 바로 죽는 수준의 치명적인 한 대라서 문제일 뿐. 그걸 잘 아는 수혁도 제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손을 주머니에 넣은 것이다.
비록 ‘사고’였으나, 태어난 순간부터 다중 살인을 저질렀던 트리플 S급 에스퍼 나름대로는 대단한 배려였다. 하지만 윤조에게는 별다른 위안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는 행위가, 이쪽이 한주먹감도 안 되니까 알아서 숙이라는 경고 같았다.
‘시발. 애초에 패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게 미친 새끼지.’
더 열받았다. 윤조는 보란 듯이 전투 모드를 승인했다. AI가 수혁에게 특별한 통보를 하지 않음에도 수혁은 윤조의 모드 전환을 알아채곤 했다. 심박이나 혈액 흐름 같은 미세한 변화로 짐작하는 듯했다.
“한 대 칠 기세네?”
“강수혁 씨야말로 저 한 대 치고 싶은 것 같습니다만.”
싸늘한 대꾸에 수혁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니라고는 안 했다.
“이젠 막 나가네. 이름도 부르고.”
“지금은 소령님이 아닌 배우자를 대하는 사적인 상황입니다.”
“그래 막 불러라. 이참에 아주 ‘수혁아’라고 하지 그래.”
“동갑이었으면 벌써 그랬습니다.”
“나이 챙겨 줘서 고맙다.”
“챙겨 드리는 만큼 나잇값을 하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유치한 말싸움 끝에 침묵이 이어졌다. 둘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대치한 지 3분이 막 지날 무렵이었다. 윤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수혁 씨.”
“왜? 인간 아닌 걸 알고 나니까 정떨어졌어?”
다만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강수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말하는 내용도 가관이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이게 이젠 나이도 씹어 먹고 아주 반말이네.”
반말을 지적한 강수혁이 뒤이어 못난 말을 늘어놨다.
“시발. 외계인 영향이 고작 2프로밖에 안 되는데 그거 가지고 이렇게 막 연장자 취급도 안 하고 정색하고. 야, 이 새끼야. 나, 이렇게 보여도 98프로는 사람이야. 그것도 정정당당 한국 사람. 어쩐지 김치 없이는 못 살겠다 싶었는데. 이거 따지고 보면 혼혈일 뿐이라고. 단지 섞인 피가 시발, 외계인 놈일 뿐이지. 나 살리고 죽은 엄마가 너 이러는 거 보면 슬퍼할 거다. 아니, 김치만 먹는다고 한국인 아니라고 뭐? 보편 정서? 그런 거 하라고 잔소리하던 새끼가 하루도 안 지나서 정색하기는. 나라고 뭐 외계인 피 땅땅 된 게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아?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서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뭘 어쩌라고?”
미친 개망나니 새끼가 쏟아내는 막말이 보이지 않는 주먹이 되어 윤조를 강하게 때렸다. 머리, 어깨, 배, 나아가서는 심장과 위장에 강렬한 충격을 선사했다. 심사가 뒤틀리다 못해 배알이 뒤틀리고 미세 신경이 꼬이더니, 꼭지가 휘리릭 돌아 버렸다.
어금니가 저절로 빠득빠득 갈렸다.
눈치 보던 AI가 소리 없는 적색 삼각 신호를 띄웠다. 조용히 저 때릴 곳이 마땅치 않은 초강력 에스퍼의 드문 약점을 찾느라 적색 삼각형이 이리저리 오갔다. 효과적인 타격점을 찾지 못한 AI는 조용히 가이드 스트레스 지수가 일정 이상을 넘었다며 패널티 옵션을 제시했다.
이건 사적인 문제다. 공적인 수단을 남발할 순 없다. 정말 유혹적인 수단임에도 윤조는 패널티 옵션은 치워 버렸다.
“강수혁…… 말…… 다 했냐?”
“그래, 이 새끼야.”
끝까지 못난 꼴을 보이는 에스퍼를 향해 윤조는 기어이 주먹을 날렸다.
퍽!
요란한 타격음이 터졌다. 하지만 에스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B급 에스퍼를 상회하는 인공 강화 인간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턱도 그 자리에서 1밀리미터도 이동하지 않았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타격으로 인한 충격 전체가 윤조의 주먹에 실렸다. 살점이 뭉그러지고 주먹 관절이 삐끗했다.
퍽! 퍽!
뒤이어 주먹을 연타로 날렸다. 하지만 상대는 동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혼신을 실은 공격임에도 트리플 S급에게는 머리카락을 흔들 실바람도 아닌 것이다.
주먹이 아니라 발차기도 동원되었다. A급 에스퍼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꽤 고통스러울 텐데. 수혁은 훈련용 더미처럼 묵묵히 맞고만 있었고, 지치는 건 김윤조뿐이었다.
“헉헉.”
주먹이 다 깨졌다. 발등에도 백크러시 충격으로 시큰거렸다.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 패널에 주유 마크가 뜨는 것처럼, 윤조의 시야에도 인큐베이터 마크가 떴다. 엉망진창이 되도록 때렸는데도 상대는 흔들리지도, 상처가 나지도 않았다. 망가지는 건 도리어 김윤조였다.
마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된 기분이었다. 비참한 만큼 더 화가 났다.
주먹을 치켜드는데 AI가 기어이 음성 경고를 했다.
-멈추십시오.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할 시, 자기 보호 프로토콜에 따라 행동 통제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먹 뼈마디에 가해진 충격을 수치로 제시했다. 무시하고 주먹을 내지르려는 찰나였다.
턱.
강수혁이 윤조의 손목을 잡았다. AI가 자기 보호 프로토콜에 따라 강수혁에게 윤조의 행동을 막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깡통이 멈추라잖아.”
“놓으십시오. 소령님이 언제부터 AI 말을 들었다고.”
“갑자기 왜 존대인 건데? 손 많이 다쳤어. 이 이상 치면 부러져.”
“부러지면 뭐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어차피 소령님도 저, 한 대 치실 생각 만만하셨으니 제가 대신 들어드릴 셈 칩시다.”
윤조는 심드렁하게 수혁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외계인인 게 그렇게 싫냐?”
“여기서 누가 외계인인데요? 2프로 차이 정도는 무시해도 되는 수치 아닙니까. 그 2프로도 이미 김치 파워로 무마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 이때까지와 달라질 것 없다니까. 갑자기 외계인이 된 게 아니라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 내 유전자 기원이 밝혀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어. 이미 말했지만, 난 너랑 헤어질 마음 눈곱만큼도 없어. 그러니까…….”
수혁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윤조를 추궁했다.
“누가 헤어진답니까? 그리고 소령님은 제발 제 말 안 듣고 급발진하는 버릇부터 고치십시오.”
“내가 뭘 급발진했는데?”
“제가 화낸 이유가 외계인 혼혈 아니, 외계 성분 고작 2프로 있는 걸로 소령님이 징그러워졌다고 지레짐작하셨잖아요.”
“징그……!”
징그럽다는 말에 수혁이 새삼 충격받았다. 시선을 사선으로 내린 그는 “징그러운 게 아니라 정떨어졌다고 했어.”라고 소심하게 정정했다.
“그게 그거죠. 그리고 그건 제가 화낸 이유와는 하등 관계없습니다.”
“뭐라고?”
“소령님 말마따나, 이미 할 거 다 해 본 사인데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심 박사님 말씀대로 오히려 의문이 해소돼서 후련합니다.”
“그럼 왜 화낸 건데?”
뒤늦게 욱신거리는 주먹이 신경 쓰였다. 너무 흥분한 탓인지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하, 됐습니다.”
윤조는 돌아서서 호텔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수도꼭지 아래 손을 넣고 찬물을 틀었다. 워낙 더운 동네라서 그런지 찬물이 미지근했다. 굳이 따라온 수혁이 어깨너머로 윤조의 붉은 손을 보았다.
“얼음 가져올게.”
그는 냉장고를 열어 보곤 얼음 대신 차가운 생수병을 가져왔다.
“얼음은 없어. 대신에 이거 대고 있어. 호텔에 달라고 할게.”
“이거면 됩니다.”
차가운 생수병을 손등 위에 굴렸다. 그사이 머리가 좀 식었다. 윤조는 저를 의식하는 수혁을 무시하고 욕실에서 나와 침실로 갔다. 침대에 벌러덩 눕는 사이 수혁은 냉장고에 든 생수병을 다 꺼내와 침대에 올렸다. 그러곤 늘어진 윤조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생수병을 굴렸다.
“화 많이 났냐?”
“예.”
“아직도?”
“예.”
묵묵히 생수병을 굴리던 수혁은 갑자기 목이 탄 듯이 생수병을 열어 벌컥벌컥 마셨다.
“저도 주세요.”
다른 생수병이 저절로 뚜껑이 열리고 알아서 윤조의 입가로 날아왔다. 잡아서 반병을 시원하게 비웠다. 그리고 다시 눕자, 수혁이 다른 생수병으로 다시 윤조의 손을 식히기 시작했다.
“왜 화난 건데?”
“아주 빨리도 물어보십니다.”
“……미안해.”
“이유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하는 사과는 안 받습니다.”
지친 상태로 눈을 감았다. 수혁은 생수병이 미지근해지도록 윤조의 손등을 문질렀다. 한참 후 생수병을 바꾸면서 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화난 이유가 뭔데?”
윤조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린 채였다. 말하기 피곤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왜…… 나한테 먼저 말 안 했습니까?”
“음?”
손등을 구르던 생수병이 멈췄다.
“그러니까, 환청 들은 거. 그것 때문에 고민한 거. 왜 저한테 먼저 말 안 하셨냐고요.”
“바로 말했잖아.”
어리둥절한 에스퍼 때문에 윤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요? 심 박사님에게 먼저 말하고 저는 다음이었잖습니까.”
“어……어?”
전혀 생각지 못했는지 수혁은 크게 당황했다.
“저는 소령님의 배우자인데요. 그런데 왜 소령님의 비밀을 다른 사람보다 늦게 알아야 합니까? 배우자가 되기 전에 있었던 일까지는 그렇다 칩시다. 하지만 이번 일은 아니잖아요. 아무리 제가 인큐베이터에 있었다지만, 그래도 저한테 먼저 얘기해야지요. 심 박사님이 아니라.”
아까 있었던 일을 상기하자 서운함이 새삼 물밀듯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