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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44화 (221/256)

144화

무서워하는 사람을 상대로 취조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유를 가지고 안정 유도에 힘써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인류의 구성원이자 외계 지성체를 상대하는 군인으로서, 그리고 빌어먹을 유가족으로서의 궁금증이 기어이 혓바닥을 움직이게 했다.

“그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까? 그러니까 미지의 의식을 듣는 것 같은 거 말입니다.”

“환청은 없고, 소름 끼치고 기이한 느낌을 받은 적은 종종 있었어. 뭔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나 할까? 공포 영화에서 귀신이 나타날 때처럼. 그것도 아줌마가 만든 장치를 달고 난 이후는 사라졌고.”

“척추 장치 말씀입니까?”

“음. 장치 자체는 내 의식을 끊는 기능뿐이라고 하는데. 그보다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장치 거부 반응이 일어나잖아. 그게 너무 아파서 머리가 멍해져. 재생하느라 지쳐서 잠들다 보니 나름대로는 안정제 역할을 한다고 할까. 지금은 네 덕분에 아픈 거 없이 괜찮고.”

윤조는 기분이 이상했다. 목 넘김이 불편한 알약을 목에 걸린 것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데 찜찜함만은 확실했다.

불쾌감은 강수혁이 들은 환청 때문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척추 장치로 위안을 얻었다는 점, 그리고 가이드 김윤조가 생긴 이후로 더욱 안정을 찾았다는 점에 기인했다.

‘이게 왜 싫지?’

강수혁이 안정되었다면 좋은 일이다. 자신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재창조되었다. 대한민국 육군 특수작전사령부대 소속 A급 두뇌 강화 인간 심나연 대령에 의해서.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쏟아졌다. 둘이 있는 모래사장보다 지대가 높은 곳에, 심 박사가 이쪽을 향해 해를 지고 서 있었다.

“얘들아. 이럴 때가 아니야. 특작부에 연락을 좀 해야겠어. 지붕 있는 곳이 필요해. 연구실에 들러서 패드 챙긴 후에 내 숙소로 가자.”

“어.”

수혁이 대답했다. 뜻밖에도 싫은 기분이 더 커졌다.

이동은 당연히 강수혁 담당이었다. 그는 김윤조를 옆에 끼고, 다른 팔은 심 박사에게 내밀었다.

“뭘 둘이나 끼고 날아. 그냥 옮길 수 있잖아.”

심 박사가 손사래를 쳤다.

“안고 나는 편이 더 안정적인데.”

“징그러우니까 됐고, 네 애인이나 잘 챙겨.”

“올 때는 잘도 안겨 와 놓고는.”

수혁의 말에 심 박사가 갑자기 버럭 했다.

“그럼 나밖에 없는 데도 짐짝처럼 데려올 생각이었냐?”

“아니 같이 가면 되는데 갑자기 왜 그래?”

둘 사이에 벌어지는 아웅다웅은 일상이었다. 이상하게 지금은 보기 힘겨웠다.

“박사님의 안전을 우선하는 게 좋겠습니다.”

윤조가 수혁의 팔을 밀어냈다.

“그럼 너는?”

“이래 봬도 군인입니다. 떨어뜨리지만 마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수혁은 수긍했다.

“안 이래도 되는데.”

혼자 안기는 건 괜찮은지 심 박사는 싫다는 소린 안 했다.

“인간 택시 양보해 줘서 고맙다.”

“누가 인간 택시야.”

졸지에 택시 취급받은 강수혁은 심 박사를 양팔로 안고 윤조는 능력으로만 띄웠다.

하와이 연구소로 돌아오는 건 금방이었다. 이번엔 요란한 사이렌 음이 없었다. 심 박사를 위해 저속 비행을 한 탓이었다. 헬기장에 착지하는 대신 지상 저공비행을 통해 연구실까지 직행했다.

아까 있던 사람들이 아직도 연구실에 그대로 있었다.

“왜 안 가고 이러고 있어?”

-저는 여기가 근무처입니다.

-나도 그렇다네.

-저는 롭슨 대령의 보조입니다.

롭슨, 노리스에 이어 에이브리까지 핑계를 댔다.

-그쪽이 궁금해서.

로아무아는 확실한 이유를 밝혔다.

“그럼 계속 있든가.”

심 박사는 제 패드를 챙기더니 수혁과 윤조에게 따라오라고 눈치를 줬다. 셋이 나가는데 연구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심 박사는 제 숙소로 향했다. 본국 땅덩어리가 큰 나라라 그런지 섬인데도 모든 사이즈가 커서 부대 소속을 위해 제공하는 주택도 제법 넓었다. 하지만 생활감은 전혀 없었고 거실에는 아직 풀지 않은 군용 하드케이스가 여럿 쌓여 어지러웠다.

심 박사는 케이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 식탁에.”

수혁이 능력으로 옮기자마자 심 박사는 케이스 보안 장치에 생체 코드를 입력했다. 열자마자 바로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는 장치는, 고도의 보안 시스템을 갖춘 통신 장비였다. 심지어 마이크도 없었다. 말을 하는 순간 도청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인적이 없는 해변에서 말하지 않은 이유도 상통했다. 지붕이 없는 곳에서의 대화는 군사 위성에 잡힐 가능성이 있다. 하필 여기는 하와이고, 미군의 모든 정찰 자산이 집중된 곳이었다.

-이건 위성 신호도 교란하는 거야. 나중에 뭐라고 하면 수혁이 네 핑계 댈 거야. 윤조는 이거 줄 테니까 근처에 미확인 감청 장치 있는지 확인하고.

심 박사가 스크린에 글씨를 띄우면서 감청 감지기를 내밀었다. 받아서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2층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확인했습니다. 깨끗합니다.

통신 장비는 심 박사가 디자인했기에 당연히 윤조와 연결이 되었다. 윤조의 말도 스크린에 떴다.

-좋아. 방금 특작부에 연락 넣었어. 이건 긴급 장치니까 금방 답이 올 거야.

“특작부에는 왜?”

수혁이 물었다.

-말하지 마, 이 눈치 없는 새끼야.

-발화 금물입니다, 소령님.

두 사람이 동시에 수혁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러자 강수혁이 헛바람을 하 내쉬더니 발광했다. 손짓과 발짓으로 ‘나는 그럼 어떻게 얘기하라고?’라며 항의하는 그에게 심 박사가 패드에 메모 페이지를 펴서 넘겼다.

-구로니가 특짝뷰에는 왜?

스크린 키보드에 익숙하지 않은 수혁이 오타가 가득한 패드를 내밀었다.

-망할 놈아! 환청 조사 하려면 네 신상부터 털어야 하는데 그건 망할 너구리가 끼고 있잖아!

그때였다. 스크린에 다른 색으로 답변이 떴다.

-누가 너구리 영감이라고?

“헉!”

심 박사가 화들짝 놀랐다. 뒤늦게 오만상을 쓰면서 불판에 올라간 산낙지처럼 발광하는 걸 보니, 입력 문자는 모조리 상호 전송하는 모양이었다.

-환청은 무슨 얘기야. 망할 놈이라는 걸 보니 강수혁이 얘기 같은데.

망할 너구리 영감은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잠깐의 발광을 끝낸 심 박사는 지금껏 있었던 상황을 빠르게 타이핑했다. 이쪽 메시지가 쭉쭉 올라가는 동안 저쪽에서는 답이 없었다.

-이상입니다.

보고가 끝난 후에도 한참 뜸을 들이던 장선욱은 “중장님?”이라고 종용하고서야 뒤늦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강수혁 파일 열람입니다.

-안 돼.

칼 같은 불허였다.

“하, 안 돼? 시발? 지금 우리 망나니한테 이상이 생겼는데 안 돼애? 이 좆같은 시발 새끼가아.”

말하지 말라던 심 박사의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 수혁은 눈만 휘둥그레 떴다. 윤조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심 박사는 통신기에 달린 수화기를 들었다.

“야! 장선욱 이 양반아! 내 얘기 못 들었어?! 개망나니! 강수혁이! 당신이 그렇게 끼고 빨고 어쩔 줄 모르는 애기 에스퍼한테! 이상이 생겼다고! 이 좆같은 놈아! 애가 환청을 듣고 무섭다고 질질 짜는데 뭐? 파일 열람이 안 돼? 시발! 그렇게 말하면 내가 계속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강수혁 생체 샘플 이미 분석 다 끝났어! 개망니니가 뭔지 안다고! 계속 파일 안 내놓으면 내 마음대로 진단하고 알아서…… 뭐 항명? 항명은 시발 개미 똥구멍 화생방이다, 대머리 영감탱아! 어디서 소리를 쳐! 안 뒈지고 싶은데? 강수혁이 내 옆에 있는데! 어차피 하와이 온 거 윤조까지 엮어서 셋이 아주 미국으로 귀화해 버릴라! 내일부로 특작부 해체되는 꼴 안 보고 싶으면 닥치고 파일 보내! 1분 준다! 끊어!”

심 박사가 폭주하는 내내 수혁과 윤조는 조용히 눈만 굴렸다.

“시발놈이. 지금 강수혁이가 아프다는데 지랄 쌈을 싸고 있어.”

특수 탄소 소재으로 만든 군용 하드케이스에 흠집이 나도록 수화기를 내리치고도 모자란지 심 박사는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다 내던졌다. 수혁의 손에 잡혀 있던 패드가 거실 창을 뚫고 날아갔고, 식탁에 딸린 나무 의자가 타일 깔린 거실 바닥에 박살이 났다. 헐크가 따로 없었다.

“박사님. 진정하십시오. 이러다 다치십니다.”

윤조가 날뛰는 심 박사를 복서처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지금? 강수혁이를 데려가겠다는데! 그 외계 괴물 새끼가! 우리가 어떻게 키운 애를!”

“박사님.”

그래도 날뛰는 심 박사를 멀뚱히 보던 수혁을 향해 윤조가 뭐라도 해 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심 박사와 윤조 사이로 부드러운 압력이 발생했다. 잇달아 보이지 않는 공기 방울이 자글자글 터졌다. 시원하면서도 간지러운 바람이 불었다. 그제야 심 박사가 발광을 멈췄다.

“아줌마.”

강수혁이 다가왔다.

“나, 인간이야.”

뜬금없는 말에 놀란 건 윤조뿐이었다. 심 박사는 흥분에 가시지 않은 벌건 얼굴로 수혁을 보았다.

“혹시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야. 적어도 한국인이야. 그 망할 땅이 내 고향이라고. 난 한국어만 할 줄 알고 한국 음식 먹고 자랐고, 그리고 약간 개조하긴 했어도 어쨌거나 한국인이랑 살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 안 떠나.”

“그게 무슨?”

윤조가 멍하게 반문했다. 이번엔 수혁의 시선이 윤조를 향했다. 그는 슬그머니 웃었다.

“소령님,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박사님?”

그때 심 박사가 외친 말이 생각났다. 강수혁의 생체 분석이 끝났다고. 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때껏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왜 하지 못했을까. 너무 그럴싸해서, 그러지 않는 점이 더 이상한 상황인데.

“설마.”

“김윤조.”

시야 가득 강수혁만 들어왔다. 검은 홍채 주변으로 오팔 빛이 일렁였다. 그러자 그의 눈이 마치 소형 게이트처럼 보였다.

“이미 늦었어. 네가 무슨 얘기를 하든 나는 절대 이혼 안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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